(소설) 청춘 스케치 11

by 도라지

오월의 마지막 토요일이었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갔다가, 나는 옷을 갈아입고 다시 시내 방향의 버스를 탔다. 세일러 카라가 달린 연두색 원피스를 골라 입었다. 수정이가 일러준 교회 앞에 도착했을 때, 수정이가 교회 앞에 나와 있었다. 수정이는 시시콜콜 설명하는 아이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크게 궁금한 게 아니면, 수정이에겐 사소한 질문들을 하지 않는 버릇이 있었다.


흰색 페인트칠이 벗겨져 조금씩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 교회 예배당은 오래된 건물 느낌이 났다. 예배당 옆으로 작은 나무 현판에 붓글씨체로 청소년회관이라고 적혀있는 건물 앞에서, 수정이가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다. 그날 문화제 순서표였다. 수정이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데, 수정이가 어느 중년의 부부를 보고 반갑게 인사를 드린다.


"안녕하세요, 권사님~"

"아, 수정이구나~반갑다~"


점잖으면서도 눈빛과 음성에 기백이 있는 아저씨가 반가운 표정으로 수정이에게 말씀하셨다.


"준삼이는 두 번째 순서에 나오구요, 준영이는 마지막 순서예요~"


수정이가 다시 일정표를 확인하면서, 어른들께 다정하게 알려 드린다. 수정이 입에서 준영이 이름을 듣고 나서야, 나는 그분들이 준영이 부모님이란 걸 알아챘다. 준삼이는 이름에 "삼"자가 들어가는 걸로 보아 그 집의 셋째 아들이며, 준영이와 학년으로만 1년 차이난다는 두 살 어린 남동생일 거 같았다.


"여기는 제 친구 이 서은이에요. 준영이랑 다음 주부터 맹학교에서 함께 공부하기로 했어요."


수정이가 어른들께 나를 소개했다. 나는 준영이 부모님께 허리를 굽히며 공손하게 처음 인사를 드렸다.


"아휴, 예쁜 여학생이네~반가워요~"


준영이 어머니가 나를 보며 환하게 웃으셨다.


"권사님, 미옥이랑 서은이랑 나중에 권사님 집에 놀러 가도 돼요?"


수정이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준영이 어머니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밝게 웃으시며 언제든 놀러 와도 좋다고 말씀하셨다.


회관 안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치 소공연장처럼 무대가 꾸며진 넓은 홀이 나왔다. 무대를 사이에 두고 무대 양쪽과 앞쪽으로 둥그렇게 의자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순서표에서 두 번째는 연극이었다. 배신자 유다 역할을 맡은 애가 준삼이라고 수정이가 가르쳐주었다.


무대에 막이 오르고 준삼이가 드디어 등장했다. 극 중에서 주인공은 예수가 아니라, 스승인 예수를 팔아야 하는 배신자 가룟 유다였다. 유다의 갈등과 고뇌를 부각한 흥미로운 해석이었다. 예수의 죽음엔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작용하고 있었다는 걸, 그때만 해도 교회에선 설명해주지 않았다. 준삼이의 약간 앞으로 돌출된듯한 턱 모양은, 오히려 유다의 고뇌를 극도로 상승시키는 연출 효과마저 있었다. 고등학생치곤 충분히 개성 있는 연기였다.


마지막 무대는 청일고 중창단이었다. 청일고 중창 단원중에 이 교회를 다니는 친구들이 많아서 아예 중창단 전원이 참석해주었다고, 키가 크고 목소리가 운치 있는 사회자가 소개를 했다. 준영이는 청일고 다닐 때 중창단 활동을 했던가 보다. 여기는 준영이가 다니는 교회니까, 오늘 이 무대 위 청일고 중창단 속에 준영이가 있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문화제가 끝나고 수정이가 내 손목을 끌고, 사회자 앞으로 데려갔다.


"준규 오빠, 오늘 공연 너무 좋았어요~"


수정이가 준규 오빠라고 부르는 사람 옆으로, 아까 유다 역할을 했던 준삼이가 분장도 지우지 않은 채로 싱글거리며 폴짝 뛰어 다가왔다.

"수정이 누나, 우리 연극 어땠어? 어, 근데, 이 girl은 못 보던 얼굴인데~"


그러자 수정이가 나를 소개했다.


"이 girl은 이 서은~ 나랑 같은 반 친구야."


호기심과 장난기가 가득한 준삼이의 두 눈동자가 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엉거주춤하게 내가 인사를 했다. "아, 안녕~" 안녕이라는 인사말이 끝나기도 전에, 준삼이가 삽시간에 내 손을 채가듯이 덥석 잡고 흔들며 인사를 한다.


"어, 누나~ 반가워, 난 이준삼이라고 해~ 앞으로 자주 봤으면 좋겠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서있던 오빠가, 아까 마이크를 잡고 사회를 볼 때의 운치 있는 목소리로 내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니가 서은이구나, 준영이가 며칠 전에 얘기했어. 너희들 맹학교에서 같이 공부하기로 했다면서? 아, 참, 내 소개를 깜빡했네, 나는 이준규~ 준영이, 준삼이 형이야. 만나서 반갑다~"


그날 나는 얼떨결에 준영이의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막내 여동생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날은 교회에 오지 않았나 보다. 이렇게 멋있는 세 명의 오빠들을 매일 집에서 보는데, 구태여 교회까지 나와서 볼 필요는 없을 것도 같았다.


중창반 친구들을 교회 문 앞까지 배웅하고 돌아온 준영이가, 어느새 내 곁에 바짝 다가와 서있었다.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삼 형제가, 좋은 토양에서 거침없이 자란 세 그루의 나무처럼 다른 빛깔로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헤세의 <데미안>에 등장하는 주인공 싱클레어가, 세 사람 속에 각각 들어있는 것 같았다.


(2021년 10월 12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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