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청춘 스케치 12

by 도라지

수정이가 준삼이의 등을 떠미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오빠, 준삼이 분장 지우고 나오면 우리 저녁 좀 사주세요~"


준삼이가 그 소리를 듣자마자, 냉큼 저쪽 문으로 뛰듯이 나가면서 큰 소리로 말한다.


"잠깐만 기다려~ 나 빼고 가버리면, 내가 어떻게 변할지 다들 알지?"


준규 오빠가 다 안다는 듯 준삼이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 우리는 회관 밖으로 나왔다. 분장을 지운 준삼이가 우리 뒤를 얼른 따라붙는다. 두 줄로 서서 다섯 명이 나란히 걸어가는데, 삼 형제가 다들 키가 컸다. 잠시 만났던 준영이 부모님도 두 분 다 보통 이상의 신장이었다.


오월의 싱그러운 저녁에, 우월한 유전자에 따뜻한 부모 사랑이 더해져서 아름다운 청년들이 된 삼 형제가 길을 걷는다. 어린 시절의 섬세한 감수성이 문드러지지 않은 채 청년이 된 남자 세 명은, 영원히 세상의 탁류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교회 앞 좁은 골목길의 가로등 불빛마저 신비로워 보였다.


교회 골목길을 돌아 나가면, 곧바로 음식점과 상점들이 즐비한 성안길로 연결된다. 우리는 쫄면과 우동, 빵을 함께 파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시험이 끝나서 야자가 없는 날에는 어김없이 들르곤 하는 분식집이다. 나는 매콤 달콤한 쫄면을 더 좋아하지만, 그날은 맑은 우동을 먹기로 했다. 행여나 벌건 색의 고춧가루가 나도 모르는 새 입안 어딘가에 붙을까 걱정스러웠다.


나는 별다른 질문도 하지 못하고, 그냥 말없이 우동만 먹었다. 가족이나 여자 친구들 외에 낯선 사람들과 식사하는 것도 처음인데, 멋있는 남자가 한 명도 아니고 세 명이나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다. 우동 국물도 조심스럽게 숟가락으로 떠먹었다.


수정이가 우동을 먹으며 물었다.


"오빠네는 전시회 같은 거 안 해요? 이맘때 하지 않나~"


그러자 준규 오빠가, 빵을 한입 크게 베어 물려다가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응, 다음 주부터 보름 동안 전시회야~ 서은이도 그림 좋아하니?"


갑작스러운 질문에, 내가 젓가락을 든 채로 대답을 했다.


"아, 저는 그림을 잘 몰라요. 피카소나 이중섭처럼 교과서에서 배웠던 것 말고는, 한 번도 전시회에 가본 적이 없어요."


"그럼 전시회에 와서 현대미술 그림도 구경해 보는 건 어떠니? 다음 주 토요일에 준영이랑 수정이랑 함께 우리 학교로 와~"


준규 오빠의 초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준삼이가 끼어들며 퉁퉁거렸다.


"나는 투명 인간인가? 왜 나는 쏙 빼고 초대를 하실까?"


준규 오빠가 멋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인마, 너는 고2잖아~"


그 말에 우리가 약속이나 한 것처럼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형, 얘들은 고3이야~ 내가 학교를 안 다니니까, 얘들도 학생이 아닌 줄 아나 봐."


준영이의 난데없는 자아성찰에 모두들 한바탕 크게 웃고 말았다. 식사 후 수정이는 혼자 걸어서 집으로 갔다. 음식점에서 걸어서 오분 거리였다. 준규 오빠는 학교 작업실로 가고, 준영이와 준삼이가 나와 함께 버스를 탔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날은 준영이가 나를 따라 버스에서 내리며 동생에게 말했다.


"나는 서은이 바래다주고 갈게~"


버스 안에 앉아있던 준삼이의 눈이 둥그레졌다. 버스에서 내려서 준영이랑 둘이서 집으로 가는 길을 따라 걸었다. 평소대로라면 정류장에서 우리 집까지 내 걸음은, 지금 걷는 걸음의 3배 빠른 속도이다. 친구들은 내 빠른 걸음을 보고 학생에게 필요한 속독법은 못 배우고, 도사에게나 어울릴법한 축지법만 배웠느냐고 놀리곤 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느린 걸음으로 집을 향해 걸었다. 오늘 점심때까지만 해도 버스정류장이 집 앞에 있었으면 하고 바랬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 집이 조금 더 멀리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느새 저녁 하늘에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2021년 10월 13일 씀)




이전 11화(소설) 청춘 스케치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