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청춘 스케치 14

by 도라지

고등학생이 되면서 내가 한 첫 모험은 주말에 공원묘지 산책 가기였다.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을 때, 교리교사 선생님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나는 복잡한 일이 있을 때, 묘지를 산책하며 생각들을 정리하곤 한다." 어린 시절에도 그 말은 꽤나 멋지고 특별하게 들렸던 것 같다.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던 겨울 방학, 어느 작가의 책에서도 비슷한 구절을 읽은 적이 있었다. 묘지는 사유하며 산책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라는 글이었다. 그 작가는 외국 작가였다. 외국의 공원묘지를 가보지 않았지만, 마치 공원처럼 숲도 우거지고 아름다울 거라는 생각은 들었다.


나는 고등학생이 된 기념으로 첫 일요일에, 미션을 수행하듯이 가덕공원묘지를 갔었다. 그 이후로 겨울과 한여름을 제외한 계절에, 일 년에 두세 번씩은 산책과 사유를 위한 공간으로 그곳을 찾아갔다. 집에서 버스로 한 시간이 조금 못 되는 거리였다.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비밀스러운 모험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또 다른 모험이 시작되고 있었다. 수요일은 맹학교에 공부 선생을 핑계로 준영이를 보러 가는 날이다. 담임선생님의 허락도 쉬웠다. 수정이와 민아 언니랑 맹학교까지 가는 동안에도, 온통 준영이 얼굴 볼 생각뿐이었다.


교실에는 기승 오빠가 먼저 와있었다. 우리가 도착하고 나서 곧이어 준영이도 왔다. 기승 오빠가 물었다.


"지난주엔 다들 집에 잘 들어갔니? 수정이는 집이 가깝다고 들어서 안심인데.. 서은이는 집이 머니? 혹시 누가 따라오거나 그러진 않고?"


기승 오빠는 지난주 목요일 저녁에 진태 일을 기억하며 말하고 있는 거 같았다. 내가 기승 오빠를 안심시키듯 말했다.


"버스 타고 25분~30분 걸려요. 버스도 자주 있고, 골목길 불도 환해서 괜찮아요~"


내 목소리를 듣고, 그제야 안심된다는 듯이 기승 오빠가 편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준영에게도 수정에게도 진태 일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공부 시간 내내 기승 오빠는 좋은 일이라도 생긴 사람처럼 빙그레 웃음을 짓고 있었다. 나는 준영이와 잠깐 눈이라도 마주치면 자꾸만 빨개지는 얼굴을 감추려고, 시선을 책으로만 두고 있었다. 수정이는 이런 우리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날도 준영이가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리고 토요일에 준규 오빠 학교 전시회에 함께 가는 날이 되었다. 우리는 오빠가 다니는 대학교 정문에서 만났다. 세명이 다 모였다. 그런데 수정이가 조금만 더 기다리자고 한다. 저쪽에서 안경을 쓴 단정하게 생긴 여학생 한 명이 우리를 보고 웃으며 걸어왔다.


"내 친구 미옥이야, 준영이랑 우리는 다 교회 친구야~"


수정이가 나에게 미옥이를 소개했다. 지난 토요일에 수정이가 준영이 어머니에게, 미옥이와 함께 놀러 가도 되냐고 물었던 게 생각이 났다. 미옥의 존재는 내게 좋은 친구가 한 명 더 생기는 게 아니라, 새로운 라이벌의 등장을 의미할 뿐이었다.


"안녕~ 나는 이서은이야~ 반가워."


그러자 미옥이가 톤이 높지 않은 목소리로 금빛 안경테를 한번 만지며, 언니처럼 점잖게 말했다.


"니 얘기는 수정이한테 얼핏 들었어~난 서 미옥이야~"


얼핏 들었어? 무언가 나를 가볍게 무시하는 듯한 말투였다. 수정이와 미옥이의 우정에 비한다면, 나와 수정이의 우정은 별 거 아니라는 식으로도 들렸다. 수정이와 준영이, 그리고 미옥은 같은 교회 친구다. 나보다 먼저 준영이를 알고 있었다. 미옥이가 말했다.


"준규 오빠 전시회 가는 건데, 꽃이라도 사가야 하는 거 아니니, 수정아?"


미옥이가 준규 오빠랑 친한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선수를 친다. 그때 준영이가 말했다.


"에잇, 무슨 작가 개인 전시회도 아니고, 고작 대학생들 전시회인데~ 그냥 가자."


준영이를 사이에 두고 여자애들 셋이 나란히 함께 걸었다. 저만치 준규 오빠가 나타났다. 미옥이가 먼저 쌩하고 오빠 곁으로 달려간다. 아까 늦게 올 때는 걸어오더니, 뛸 줄도 아는 아이였다. 준규 오빠 팔에 매달리며, 미옥이가 엄청 예쁘게 미소를 짓는다. 가만히 보니까 괜찮게 곱상한 여자애였다.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들은 다들 하나같이 추상적이었다. 미술 교과서에서 보았던 피카소나 뭉크의 추상적인 느낌과는 또 다른 차원이었다. 대학생들은 이렇게 세상을 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준규 오빠가 얘기했던 현대미술이라는 것의 흐름을 조금 알 수도 있을 거 같았다.


관람 내내 미옥이는 준규 오빠 팔에 매달려 있었다. 미옥이는 오빠의 불편해하는 표정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미옥이가 매달린 팔이 준영이의 팔이 아닌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나 보다. 준규 오빠의 등 뒤에서 불쑥 나타난 대학생 언니가, 오빠를 불러 세웠다. 예쁘게 눈 화장까지 하고 앞머리를 클레오파트라 스타일처럼 내린 언니였다.


"선배님, 동생들이에요?"

"응, 내 동생이랑 동생 친구들~"

"어머, 얘가 선배님 동생인가 봐요, 예쁘게 생겼네요~"


클레오파트라 언니가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준규 오빠가 준영이를 앞으로 밀면서, 얘가 내 동생이라고 소개를 했다. 그 언니의 말이 가관이었다.


"어머, 벌써 일부다처제야? 너 선배님 하곤 다르게 능력 있다~"


어쩐 일인지 미옥이가 뾰로통한 얼굴로, 준규 오빠를 대신해서 그 언니에게 대꾸를 한다.


"준규 오빠가 왜 능력이 없어요? 우리는 다 그냥 친구거든요~"


농담을 너무 주책스럽게 했던 클레오파트라 언니가 우리들에게 얼른 사과를 한다.


"농담이 기분 나쁘게 들렸다면 미안해, 얘들아~ 내가 사과할게."


그리고 그 언니는 사과의 의미로, 우리를 학교 앞 빵집으로 데려갔다. 나는 그날 미옥이와 그 언니의 은밀한 신경전이 싫지가 않았다. 준규 오빠에게 집까지 바래다 달라고 떼를 쓰는 미옥이에게, 클레오파트라 언니가 말했다.


"선배님, 오늘 개념 미술 스터디 있는 거 아시죠?"


준규 오빠가 그 언니와 다시 학교로 올라가고, 우리는 다 함께 버스 정류장까지 내려왔다. 준영이와 나만 같은 방향이고, 다들 방향이 달랐다. 미옥이가 이번엔 준영이에게 달라붙었다. 준영이는 굳이 버스를 갈아타면서까지 너를 바래다줘야 할 만큼 늦은 시간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준영이는 나 따위를 의식해서 그런 대답을 한 게 아니다. 자기가 생각하고 바라보는 상황 그대로를 서술할 뿐이었다. 한편으론 통쾌하면서도 준영이의 단호함이 차갑게 느껴지기도 했다. 마치 내가 거절당하는 묘한 기분이었다.


(2021년 10월 15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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