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이 되면서 미사 시간마다 신부님은 정의구현사제단의 선언문을 낭독하시거나, 정부에 대한 비판을 더 자주 하셨다. 지난 사월에 제5공화국 정부에서 4.13호헌조치가 발표되고, 오월에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명동 성당에서 서울대생 오빠의 죽음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한 뒤부터 이런 현상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의 각 성당에서도 정부에 대한 비판은 공공연해졌다.
6월 9일 연세대 학생이 시위 중에 최루탄에 맞고 쓰러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4.13호헌 철폐를 외치던 민중들에게 그 사건은 기폭제가 되어 민심이 불같이 활활 타올랐다. 대학가에서도 각종 성명서가 발표되고 학생들의 시위가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우리 집의 유일한 아들인 오빠는 마침 해병대에서 군 복무 중이었다. 서울서 대학을 다녔지만, 오빠는 군대가 아니었어도 시위에 가담할 사람은 아니었다.
준규 오빠도 시위에 가담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준영이는 서울대 오빠와 연세대 오빠 사건에 대해 가장 분노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고등 2학년인 준삼이라고 했다. 준삼이는 고등학생이지만, 지역 내 극단에서 활동하는 연극학과 지망생이었다. 그 당시 우리 지역에선 의식 있는 연극 단체들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대학생들의 시위 모습이 텔레비전에서만 시끄럽게 등장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충북대학교와 청주대학교에서도 화염병과 벽돌을 깬 돌멩이들이 날아다니고 최루탄 연기가 자욱하게 번지던 때였다. 선생님들은 대학교 시위가 있는 날이면, 우리들의 교문 바깥 출입을 더 엄격하게 통제하곤 하셨다. 1987년 6월이었다.
그런 어수선한 시국에도, 우리는 매주 수요일 정해진 시간에 공부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준영이가 나라 걱정을 크게 해도, 나는 수요일에 준영이가 맹학교에만 무사히 나오면 그걸로 충분했다.
한여름의 뜨거운 열기보다 더 뜨거웠던 6월이 지나면서 6.29선언이 발표되었다. 그리고 7월 5일 연세대 오빠의 사망 소식으로 또다시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준영이가 7월의 어느 수요일에 충북대학교 신문 한 장을 가지고 왔다. 헤드라인에는 이런 기사 제목이 실려 있었다.
<이한열 열사의 죽음에 분개한 영문과 복학생 투신, 기적적으로 살아나~>
충북대에도 투신까지 하며 저항하는 학생이 있다는 게 은근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장차 나의 모교가 될 학교였다. 게다가 내가 진학하고 싶은 영문과에 저런 훌륭한 선배가 있다는 게 더욱 놀라웠다.
훗날, 1987년 7월에 충북대 인문대에서 투신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진 영문과 복학생 선배가, 검찰 공무원 신분이 되어 내 앞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박종철, 이한열의 죽음에 분개했던 것은 사실이나, 내 한 몸 투신하여 독재정권에 저항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졸업 후 진로 고민 때문에 술을 좀 과하게 먹었는데, 화장실이 급해서 헤매다가 이층 창밖으로 떨어졌다. 떨어져서 의식을 잃었고, 다음 날 병원에서 깨어났다. 깨어나 보니, 충북대학교 신문에 내 기사가 났다. 독재정권에 분개하여 투신을 시도한 민주 항쟁 투사로, 학교신문에 내 이름이 버젓이 적혀있었다."
기사가 오보라고 정정할 새도 없이, 그날 학교 총장과 직원들이 과일바구니를 들고 병원을 방문했다고 한다. 그 상황에서 영문과 복학생은 이건 잘못된 기사라고 밝힐 수조차 없게 되었다. 만취 상태의 덕분이었는지 선배는 다친 데 하나 없이, 삼일 후 걸어서 퇴원을 했단다. 그 잘못된 기사를 읽고, 나는 대학 진학에 대해 확고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2021년 10월 16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