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수험생의 여름방학은 학기 중과 그다지 다를 게 없다. 그나마 우리 학교는 여름 방학 자율학습 기간에도 학생들의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비교적 존중하는 편이었다. 수정이가 칠월의 마지막 토요일에 나와 미옥이를 준영이 집으로 초대했다.
준영이네 집은 재밌는 구조였다. 옆으로 나란히 붙어있는 아파트 두 채를 연결하여 하나의 집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준영이 어머니가 오이채 고명을 얹은 콩국수를 말아주셨다. 미옥이는 콩국수를 싫어한다고 해서, 준영이 어머니는 급하게 비빔국수 하나를 따로 만들어 주셨다.
준삼이가 우리를 자기 방으로 안내한다. 모니터에서는 마이클 잭슨이 춤을 추고 있고, 방 안에는 널브러진 잡지책들이 한가득이었다. 플레이보이라고 커다랗게 박힌 영어 글씨의 책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두 귀가 쫑긋한 토끼가 턱시도 타이를 매고 있는 그림도 눈에 띄었다. 미옥이가 준삼이 방에 들어서자마자 한마디 한다.
"아이, 지저분해~"
"이게 지저분하다고? 준영이 형 방에 가봐. 거긴 더 장난 아니야. 전쟁터야~"
준삼이의 대꾸에, 준영이는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대답한다.
"인간이 왜 병에 걸리는 건데~ 적절한 균을 가지고 살아야 저항력도 생기는 거라고.. 균을 가지고 있던 서양인들이 원주민들한테 균을 퍼뜨려서 식민지로 만들었다는 얘기도 있어~"
학교에 안 가는 대신, 준영이는 집에서 색다른 공부들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준영이는 하루 두세 번 음식을 섭취해야 하는 인간의 섭생 구조와 식습관에 대해서도 비효율적이라며 반발했다.
"인간도 언젠가는 캡슐 하나에 필요한 에너지원을 다 담아서, 하루 한 알 복용만으로 생존이 지속 가능해지는 시대가 올 거야~"
음식 먹는 걸 좋아하는 나에겐 영 반갑지 않은 소리였다. 나는 사는 재미 중에 먹는 재미가 반 이상을 차지한다. 친구도 책도 먹는 재미만큼은 아니었다. 더구나 치아를 쓰지 않고 물로 알약을 복용한다니, 아무리 준영이의 생각이라 해도 동의할 수 없었다. 나는 우주시대보다는 차라리 석기시대의 삶을 동경하는 편에 속한다.
준영이의 방은 기대했던 것보다 깨끗했다. 우리들이 온다는 연락받고 부랴부랴 방 정리를 좀 했노라고 으스댄다. 침대 위에 뒤집혀 누워있는 책은 사회경제 쪽 책처럼 보였다. 문학책과 로맨스 소설을 읽는 나와는 차원이 다른 아이였다.
준삼이가 잭슨의 문워크를 흉내 내며 이미 열려 있는 준영이의 방문을 노크했다.
"누나들, 노벨 평화상은 누가 타야 하는 거라고 생각해?"
미옥이가 눈빛을 반짝이며 정답을 아는 목소리톤으로 대답했다.
"당연히 인류와 세계 평화에 기여한 정치인이나 종교인, 인권운동가들이지. 1948년엔 간디가 죽는 바람에 그해 노벨평화상을 아무도 받지 못했다지만, 마더 테레사는 1979년 받았잖아~"
"땡~ 누나는 이미 지나간 사실을 말하는 거고, 마이클 잭슨이야말로 세계평화에 일등 공헌자지."
준삼이는 잭슨의 천재성을 위대하게 표현하며, 마이클 잭슨이야말로 노벨평화상의 적임자라고 열변을 토했다. 미옥이가 다시 말했다.
"그런데 준규 오빠는 오늘도 작업실에 간 거야?"
"오늘 큰 형은 입시생들 학원 알바래~ 늦을 거야."
준삼이의 대답에 미옥이가 서운한 표정을 짓는다. 수정이가 준규 오빠 방도 구경할 수 있냐고 물었다. 준영이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준규 오빠 방문을 열었다.
방문과 마주 보이는 벽에, 여자 두 명이 나신으로 뒤엉켜 침대 위에 누워 잠을 자고 있는 커다란 그림이 걸려 있었다. 여자아이 셋이 동시에 깜짝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수정이와 미옥이가 준규 오빠 방의 문턱을 넘지도 않고 돌아섰다. 한참 동안 그림을 바라보며 서있는 내 뒤에서, 준삼이 목소리가 들렸다.
"귀스타브 쿠르베 작품이래. 제목은 <잠>~ 큰형이 저 그림 그리는 데 몇 달은 걸렸을 걸~ 누나는 저 그림 보고 안 놀랬어?"
인간의 의식이란, 종이 위에 그려진 그림처럼 형언할 수 없는 다채로운 색들로 물들어질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쿠르베라는 19세기 프랑스 화가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다.
"처음 보는 그림이야, 놀라워~ 작가는 관습과 규범이란 것에 도전하고 싶은 거겠지?"
내가 쿠르베의 그림을 보고 느낀 생각을 말하자, 준삼이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한순간 준삼이의 정신 속에 있는 그 무언가가 내 속으로 쑤욱 들어오는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준삼이가 나를 바라보는 진지한 눈빛 뒤로, 준영이가 서있었다.
(2021년 10월 17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