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방학이 끝나고 개학한 첫날이었다. 가슴이 너무 커서 체육 시간마다 양호실에 가서 누워있곤 했던 희경이가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등교했다. 방학 동안 희경이의 큰 가슴이 사라지고, 조금 글래머러스하게 보기 좋은 성숙한 여성의 가슴이 되어 희경이가 나타났다.
나중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유방 축소 수술을 한 거라고 했다. 몇몇 친구들이 희경이의 큰 가슴을 보고 젖소부인이라고 놀린 적도 있다. 희경이는 늘 어깨를 움츠리며 다니곤 했다. 한번은 체육 시간에 달리기를 하는데, 희경이의 가슴이 너무 출렁거려서 체육 선생님이 시선을 딴 데로 돌린 사이 시간 체크를 잊은 적도 있었다.
초등학생처럼 간신히 젖봉오리가 올라와있는 발육이 딸리는 여자애들 중에는, 오히려 희경이의 젖소만 한 가슴이 부러운 애들도 있었다. 나는 희경이가 가슴을 일부 잘라내고 온 것이 예뻐 보이기도 하면서, 한편 아깝기도 했다. 유방 비대증이란 그 병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 건지, 그때 여자애들은 알지 못했다.
여름 방학 동안, 민아 언니와 기승 오빠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서 생활을 했다. 9월이 되어 우리는 다시 만났다. 민아 언니가 반가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며 우리 손을 잡았다. 옆에 있던 기승 오빠는 보고 싶었다고 말하며, 수정이와 나를 번갈아 안아주었다. 준영이가 아직 도착하기 전이었다.
수정이가 징그럽다고 얼굴을 찌푸리며 기승 오빠를 살짝 밀어냈다. 나는 기승 오빠와 허그가 낯설었지만, 크게 징그럽게 여겨지지도 않았다. 가벼운 허그 동작만으로도 사람과 사람 사이가 더욱 따뜻해진 느낌이었다.
민아 언니 집은 청주 근교의 시골 마을이라고 했었다. 불현듯 기승 오빠가 궁금해진 내가 물었다.
"기승 오빠도 청주 근처 살아요?"
"어? 아니~ 우리 집은 서울이야. 그런데 왜 여기까지 왔냐고 묻고 싶겠지? 흐흐, 여기 교장 선생님이 아버지 친구 분이셔~"
맹학교 교장 선생님은 여성으로 알고 있다. 그러니까 기승 오빠 아버지와 맹학교 여자 교장 선생님이 친구 사이라는 설명이다.
그날은 수정이와 내가 맹학교에 좀 일찍 온 날이었다. 여섯 시가 되려면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복도를 걸어오는 누군가의 구두굽 소리가 급하게 들렸다. 곧이어 반쯤 닫혀 있는 교실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는 여기 학교 교장이에요. 민아랑 기승이야 우리 학교 학생들이니까 잘 알고 있지만, 예쁜 여학생들은 내가 처음이지요?"
맹학교에 올 때마다, 어두컴컴하고 적막한 학교 분위기는 마치 봉쇄 수도원을 연상케 했었다. 그래서 여기 근무하는 선생님들의 복장 역시 수도자처럼 회색빛의 코스튬일 거라고 상상했었다. 그런데 교장 선생님은 하이힐을 신고, 몸매를 강조한 자주색 투피스를 입고 계신다. 순간 깜짝 놀랐다. 그녀가 스스로 교장이라고 소개하지 않았다면, 우연히 학교를 방문한 연예인 아줌마로 오해했을 정도다. 붉은색 루즈를 짙게 바른 그녀가 기승 오빠 이름을 호명했다.
"기승아, 잠깐 선생님 좀 도와줄 수 있겠니?"
"네, 선생님~ 무슨 일이신데요?"
"지금 학교에 영국 손님이 한 분 오셨어. 같이 내려가서 통역 좀 부탁해~"
교장 선생님과 기승 오빠가 일층으로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통역? 영어 담당을 하고 있던 내가 화들짝 놀라서 민아 언니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언니, 기승 오빠 뭐예요? 통역이라니요, 것도 교장선생님이 부탁할 정도의 능력자?"
민아 언니가 공연히 죄지은 사람처럼 더듬거렸다.
"아, 그게 말이야, 기승이가 어릴 때 미국에서 오래 지내다 왔대~"
기가 막혔다. to 부정사가 어떻고 재귀대명사의 관용적 용법이 어떻고 설명하느라 똥줄이 타는 내 모습을 보며, 기승 오빠는 속으로 얼마나 웃었을까...
"그런데, 왜 여기서 이런 시시한 공부를 듣고 있어요?"
내가 어이가 없어서 또다시 말을 뱉었다.
"그게, 기승이가 미국서 살다 온 얘기 같은 거 하지 말아 달라고 했어. 그냥 너희들이랑 함께 공부하면, 자기가 눈먼 장님이란 생각을 잠시 잊어버리게 된다고.."
아, 그 순간 나의 유치한 영어 실력 같은 이기적인 수치심이 진짜로 수치심이 되어 내 가슴에 돌아왔다. 기승 오빠는 나의 영어 실력을 기대하거나, 대학 진학이 목표가 아니었나 보다.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베풀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상대방은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기승 오빠는 사람과 사람 사이 대등한 관계에서 우러나오는, 밝고 따뜻한 온정 같은 걸 그리워했나 보다.
스스로 부끄러운 생각에 다시 얼굴이 벌게지고 있을 때, 준영이가 교실로 들어왔다.
"서은이, 감기 걸렸니? 얼굴에 열나는데~"
준영이의 물음에, 수정이가 대신 말했다.
"감기는 아니고, 마음에 좀 화가 찼을 거야."
그게 아니라고, 애써 변명하지 않았다. 나는 그날 이후로, 타인을 위한 희생이니 헌신이니 이런 거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타인을 위해 희생하거나 봉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일종의 자기 관념 속에서 정립된 허상적인 개념일 뿐이다.
얼마 후 저만치 복도 끝에서 바닥을 두드리는 지팡이 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기승 오빠가 화장실이 급해서 다녀온 학생처럼,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영국 방문객과 기승 오빠의 통역 내용에 관해선 아무도 묻지 않았다. 궁금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기승 오빠가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을 때까지, 우리는 기다릴 참이었다. 나는 영어책을 펴고, 관계대명사 What을 조금 더 신중하게 설명했다.
(2021년 10월 19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