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청춘 스케치 20

by 도라지

수정이는 대전에 있는 감리교 대학의 신학과에 지원했다. 나는 충북대학교 영문과에 지원했고, 미옥이는 충북대학교 약학과에 지원했다. 우리 집 근처에 살고 있던 영란이는 충북대학교 천문우주학과에 지원했다. 간호대 지망생인 재일이와 스튜어디스 지망생인 선희는 후기 시험에 응시할 예정이었다.


준영이는 그 해에 대학 입학시험을 보지 않았다. 준영이도 준영이 부모님도 시간의 흐름 따위 상관하지 않는 듯 보였다.


추운 겨울날이었다. 어머니가 싸주신 보온도시락통을 챙겨 들고, 아직 어두컴컴한 이른 아침에 서둘러 택시를 타고 충북대학교에 도착했다. 후배들의 요란한 응원 소리, 가족들과 헤어져 각자 시험실로 향하는 바쁜 발걸음들 소리 위로, 차가운 겨울의 아침 햇살이 조금씩 비추기 시작했다. 그 해 수험생들은 자기가 지원한 학교의 해당 학과 강의실에 가서 시험을 치렀다.


다음날 면접시험까지 보고, 이틀 뒤 우리는 학교에서 만났다. 멀리 서울이나 대전에서 시험을 보고 온 친구들은, 2박 3일의 지옥 여행을 경험하고 온 듯 모두 지친 표정들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 12월 16일에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김대중과 김영삼 두 명의 야당 후보가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전두환 정권을 물려받은 노태우가 새로운 대통령에 당선됐다.


겨울방학이 되려면 며칠은 더 기다려야 했다. 아직 합격자 발표도 나지 않았다. 더구나 전기 시험에서 떨어진 친구들과 전문대를 지원한 친구들은 후기 시험을 치러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도 3학년 교실은 이미 방학이 시작된 거나 다름없었다. 버젓이 지각하는 애들도 간혹 생기기 시작했다.


선생님들은 이제 수업 시간에 수업을 하지 않았다. 어떤 친구들은 벌써 대학생이라도 된 듯이 옅으게 화장 연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로맨스 소설을 꺼내 들었다. 남학생들이 플레이보이를 돌려 보며 여자와의 연애를 상상하듯이, 여학생들은 로맨스 소설을 돌려 읽으며 대학 생활의 로맨스를 꿈꾸었다.


대통령 선거일 다음날이었다. 수업이 없어서 교실에 잘 들어오지 않던 선생님이 갑자기 2교시 종소리와 함께 교실로 들어오셨다.


"자, 소지품 검사를 하겠습니다. 가방 안과 책상 서랍 속에 든 것들, 다 책상 위에 올려놓고 손 머리~"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시험도 끝나서 이제 졸업이 코앞인데, 무슨 소지품 검사냐며 항의를 하는 애들도 있었다. 옆반에서도 아이들의 시끄러운 불만 소리가 우리 교실까지 들렸다. 선생님은 친구들 불평을 들은 체도 안 하시고, 앞자리에 앉은 학생부터 검사를 하기 시작했다.


일이 학년 때는 손 검사까지 했었다. 가끔 매니큐어를 손톱에 바르고 오는 친구가 손 검사에 걸려서 주의를 받고 지운 적도 있었다. 그러나 선생님들은 매니큐어를 색출하려는 목적보다, 손가락에 밴 담배냄새의 범인을 색출하려는 목적이 더 컸던 것도 같다.


선생님이 성과도 없이 이대로 허탕을 칠 뻔하였을 때다. 교실 맨 뒷자리 창가에 앉아있던 은수의 가방이 다시 거꾸로 들리는가 싶더니, 무언가 툭툭 하고 떨어졌다. 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뒤를 향했다. 하나는 담배가 분명한데, 다른 하나는 크기도 작고 비닐에 쌓여 있어서 그게 무언지 아는 친구는 드물었다. 로맨스 소설이나 돌려 읽을 줄 알았지, 우리는 정작 로맨스에 필요한 준비물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나마 똘똘한 한 친구가, 은수가 없는 자리에서 비밀스럽게 콘돔의 용도를 어설프게 설명해주었다. 친구의 어설픈 설명을 듣는데도, 몇몇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선생님이 그 작은 물건과 담배를 선생님 양복 주머니에 넣으시며 은수를 따로 불렀다. 그리고 다시 교실로 돌아와 이런 말씀을 하신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벌써 대학생이 된 거 같겠지만, 엄연히 고등학생입니다. 남자 친구도 사귀고 싶고, 미팅도 나가고 싶을 거예요. 하지만, 여러분이 꼭 알아야 할 게 있어요. 남자들은 다 늑대의 속성을 가지고 있어요.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짓은 하면 안 됩니다. 이런 시기일수록 각별히 더 몸조심해야 합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짓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따로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선생님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어렴풋이 알아들었다.


은수는 누구보다 자주적이고 똑똑한 친구였다. 조무래기 같은 우리들과 어울려 시끄럽게 떠들기보다 혼자 조용히 책을 읽곤 했었다. 은수는 서강대 철학과 시험을 보고 왔었다. 그때는 우리가 너무 미숙해서 잘 몰랐지만, 스스로를 지키며 자신의 에너지를 적절하게 사용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비도덕적인 게 아니었다. 사람마다 성장 속도에도 차이가 있는 건 분명하다.


주로 여성에게 많이 따라붙어 사용되던 '순결'과 '정조'라는 단어가 주는 강압적인 폭력성에 대해, 우리는 미처 헤아릴 수가 없었다. 순결한 처녀는 도덕적이지만, 순결을 상실해버리는 순간 음탕한 죄인이 되어버리고 마는 사회의 부조리논리 앞에서, 우리는 순한 양처럼 어리석게 세뇌당하고 있었다.


은수가 마치 주홍글씨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친구들의 시선을 피했다. 준영이가 학교에서 교사로부터 이유 없이 매 맞는 친구를 보면서 느꼈다고 했던 환멸이 무엇인지 알 것도 같았다. 정작 가르쳐야 할 것들은 배척하고, 도덕을 가장한 폭력으로 우리를 조종하려 드는 학교 교육이 갑자기 끔찍하게 싫어졌다. 마치 내가 사육당하는 한 마리 짐승처럼 느껴졌다.


한참을 책상 위에 엎드려있던 은수가 일찍 조퇴를 했다. 은수의 빈 책상 옆으로 창밖에 눈이 날리고 있었다. 첫눈이었다.


(2021년 10월 21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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