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겨울 첫눈이 내렸다. 하얀 눈송이가 이불솜처럼 폭신하게 날리는 모습이, 바깥이 오히려 하나도 춥지 않을 거 같았다. 여기저기 교실에서 여학생들이 탄성을 지르며 들떠 있었다.
점심시간에 보이지 않았던 수정이가, 오후 시간이 끝나기 전에 또 쪽지를 보내왔다.
"오늘 학교 끝나고, 맹학교 소집. 기승 오빠 송별식~"
송별식? 앞이 보이지 않으니 군대 갈 일도 없는데, 기승 오빠가 어디로 간다는 소리지?
며칠 후면 겨울방학이었다. 전기 시험이 끝난 3학년들은 1학년보다 빨리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수정이와 첫눈이 내려앉은 길을 나란히 걸었다. 하얀 눈이 쌓인 학교 교정을 언제 다시 수정이와 둘이서 걸을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 마음이 아련해졌다.
회색빛 하늘에서 다시 눈송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맹학교 본관 앞에서 준영이를 만났다. 자기 어깨에 내려앉은 흰 눈을 털어내고 있었다. 수정이가 준영이의 팔을 잡아끌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야, 바깥에서 털면 뭐해? 안에서 털어야지. 다시 또 어깨에 쌓이잖아~"
수정이가 툴툴거리며 준영이의 어깨와 머리 위에 내려앉은 눈을 털어주었다. 허옇게 성에가 낀 안경을 벗으며 준영이가 히죽 웃었다. 저렇게 웃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하얀 눈이 내리면, 모두가 어린 강아지처럼 순해지는 것 같았다.
교실에는 민아 언니와 기승 오빠가 먼저 와있었다. 우리 학교보다 여기 교실이 훨씬 더 따뜻했다. 난로도 보이지 않았다. 양쪽 벽면으로 스팀 난방기구가 붙어 있었다. 기승 오빠가 먼저 말했다.
"너희들한테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열세 살까지 미국에서 자랐어. 그때 부모님이 다 미국에서 공부 중이셨거든. 아버지가 다음 달에 미국 대학으로 가시게 돼서, 나도 함께 가기로 했어."
기승 오빠는 작별 인사를 하며, 수정이와 우리 집 전화번호를 물어보았다. 수정이가 종이 하나에 우리들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우리는 기승 오빠와 마지막 허그를 나누었다. 그새 허그가 익숙해진 수정이는 기승 오빠의 등까지 두드려주었다. 준영이가 어색하게 기승 오빠와 허그하는 모습이 약간 낯설기도 했다. 기승 오빠는 소중한 것을 품듯이 나를 가슴에 포옥 안았다. 그리고 내 귀에 말했다.
"너무 늦지 않게 돌아와서, 꼭 연락할게~"
나에게만 속삭이듯 말했던 기승 오빠의 목소리가 다른 친구들에게도 들렸나 보다. 수정이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나 대신 약속이라도 하는 것처럼 대답해 주었다. 그러자 기승 오빠가 큰 숨을 한번 몰아 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서은아, 니 얼굴을 한번 만져봐도 될까? 기억해 두고 싶어서.."
모두들 놀라는 눈치였다. 다른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저런 태도와 음성으로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맹학교에 처음 왔던 날이 떠올랐다. 괜찮다고 허락하는 내 얼굴 위로, 오빠의 다섯 개의 손가락이 붓질을 하듯이 섬세하게 내려왔다. 내 얼굴이 한 폭의 그림이 되어 기승 오빠의 손끝에서 완성되는 것 같았다. 신성한 의식이라도 치르는 것처럼 모두들 숨을 죽였다.
아쉬운 작별을 뒤로하고, 우리는 어둑해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탔다. 우산을 쓰지 않고 눈을 맞은 탓인지, 준영이의 킁킁거리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나는 혼자 버스에서 내리며, 준영이에게 집에 가서 따뜻하게 쉬는 게 좋을 거 같다고 말해주었다.
첫눈이 내리는 겨울 저녁, 집에 돌아와 거실에 있는 턴테이블 위에 레코드판 한 장을 올려놓았다. 지난겨울에 개봉한 영화 <미션>의 주제곡이 낮게 깔린 조명 사이로 집안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미션>은 학교에서 단체로 영화 관람을 갔었다. 고귀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 그 영화를 보고 눈이 퉁퉁 부을 만큼 울었었다. 여기저기서 친구들의 울음소리가 요란했었다.
어릴 때 인어공주 책을 읽고, 매일 밤마다 인어공주의 슬픈 운명이 떠올라 울곤 했었다. 그다음엔 성냥팔이 소녀를 읽고 너무 슬퍼서 또 며칠을 울었다. 프란다스의 개를 읽었을 때는, 밥도 넘어가지 않을 만큼 이 세상 전부가 슬펐던 기억이 난다. 슬픔이 내 온 몸을 휘감아 안을 수 있다는 것을 그 때 알았다.
기승 오빠랑 특별히 더 친했던 것도 아닌데, 공연히 마음이 쓸쓸해지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누군가와 이별하는 거에 익숙하지가 않아서 그런가 보다고 나 혼자 설명할 무렵이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삼 년 만에 국민학교 동창 소연이가 전화를 걸어왔다.
"서은아, 오월 달에 진태 만난 적 있었니?"
"응, 그랬어. 그런데 왜 그러니?"
"진태가 지금 병원에 입원했는데, 나한테 네게 연락을 해달라고 부탁하더라~"
큰 병은 아니라고 했다. 시험이 끝나고 운동을 심하게 하다가 다리를 다쳐서 병원에 입원한 거라고 했다. 나는 소연이가 일러주는 대로 병원 이름을 받아 적었다.
(2021년 10월 22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