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청춘 스케치 22(최종회)

by 도라지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첫 눈치고 제법 눈이 쌓여 있었다. 어제저녁 소연이의 전화를 받았을 때 적어두었던 메모지를 코트 주머니에 집어넣고, 눈길을 따라서 등교를 했다.


교실 뒷문을 열고 들어서며, 어제 일찍 조퇴한 은수의 자리부터 확인한다. 창가에 앉은 은수가 책을 읽고 있었다. 은수가 고개를 들었을 때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은수를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은수도 나를 향해 씨익 웃었다. 그리고 다시 은수는, 평소대로 묵묵히 자기의 책을 읽는다.


오후에 학교를 마치고 병원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진태가 병원 침대에 다리를 매달고 누워있었다. 진태가 애써 덤덤하게 말했다.


"다음 주에 합격자 발표 나고, 만약에 내가 대학 떨어지면 너한테 연락을 못할 거 같아서, 그래서 소연이한테 부탁했어. 아픈 걸 구실 삼으면, 니가 날 찾아와 줄 거 같아서.."


아파서 그런 건지, 병원 침상 위에 누워있는 진태는 표정도 말투도 영 자신이 없어 보였다. 전기 시험에서 불합격해도 후기 시험도 있고 전문대도 있었다. 이런 나약한 모습은 진태에게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차라리 무서워 보이는 표정을 짓는 진태가 한결 진태다워 보인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 마음속에 그려진 진태의 모습은 이런 게 아니었나 보다. 진태는 침대에서 움직이지도 못한 채 멀어져 가는 나를 배웅했다. 나는 병원 문을 나서며, 지난 오월에 학교 앞으로 나를 찾아서 성큼성큼 걸어왔던 저돌적인 청년의 모습으로 진태가 다시 돌아가기를 바랬다.


거리마다 성탄절 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쟝글제과와 레코드 가게는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구세군의 종소리가 산타의 썰매를 끄는 루돌프 방울소리를 닮은 것도 같았다. 그 종소리를 들으면 루돌프가 끄는 썰매에 올라타기라도 한 것처럼, 어디론가 멀리멀리 평화로운 세상으로 우리 모두를 데려갈 거 같기만 하다. 세상에 배고픈 사람도, 외로운 사람도 없을 것처럼 느껴진다.


주말이 지나고 드디어 합격자 발표가 나는 월요일이 되었다. 수정이도 미옥이도 영란이도 나도 모두 합격했다. 서강대 철학과에 지원했던 은수도 합격했다. 재일이와 선희는 선택한 대학의 시험이 아직 남아 있다. 도시락 투정을 부리던 은정이는 이번에 떨어졌다. 후기 시험을 다시 봐야 한다. 그래도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준영이는 지난주 목요일에 첫눈을 맞은 날, 감기에 걸렸다고 했다. 기승 오빠 송별식이 있던 날이었다. 우리는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준영이 병문안을 핑계로, 성탄절 전날 점심부터 준영이 집으로 몰려갔다. 준영이 어머니가 손수 빚은 만둣국을 끓여주셨다. 장난기가 발동한 수정이가 준영이 어머니에게 물었다.


"권사님, 저희 셋 중에 며느리를 골라야 한다면, 누구 고르시겠어요?"


준영이 어머니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시며 이렇게 대답했다.


"아들이 셋인데, 왜 한 명만 골라야 하니? 세명 다 며느리 하면 돼지~"


수정이가 웃으며, 준영이를 돌아본다.


"준영이 너는 우리 셋 중에 누구랑 결혼하고 싶어?"


수정이의 정말 엉뚱한 질문에, 미옥이와 나는 귀를 바짝 세우고 준영이의 답을 기다렸다.


"음... 약사 와이프가 아무래도 좋겠지?"


그러자 미옥이가 환하게 잇몸을 드러내며, 승자의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인다. 준영이의 대답은 나무랄 데 없는 최고의 답변이었다. 그것이 준영이의 진짜 속마음이라 해도 세상 물정을 아는 똑똑한 사람임을 증명한 것이고, 설령 난처한 질문에 궁여지책이었다 해도 우리들이 항변할 수 없을 만큼 슬기로운 답변이었다.


준영이가 학교 교육이 싫어서 고등학교를 자퇴했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 내가 준영이를 어설프게 속단했었나 보다. 가수 김민기를 닮은 아이인 줄 알았더니, 삼성 이건희를 더 많이 닮아 있었다.


성탄절 이브에는 성당과 교회는 행사로 분주하다. 우리는 준영이를 앞세우고 수정이네 교회로 우르르 몰려갔다. 어두워지는 저녁 하늘을 배경으로, 교회 건물에 늘어뜨려진 크리스마스트리가 반짝거린다. 준삼이는 고등학생부에서, 준희는 중학생부에서 각각 무대 공연을 마쳤다. 성당도 아닌 친구들 교회에서, 나는 친구들과 함께 성탄 축하 노래를 불렀다. 우리의 여고시절 마지막 성탄절 밤이 흐르고 있었다.


검은빛이 감도는 어두운 보라색 밤하늘 위로 거짓말처럼 또 하얀 눈이 내렸다. 약대에 들어간 미옥이와 결혼하겠다고 대답했던 준영이와 둘이서 하얀 밤길을 걸어,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끝)


그동안 <청춘 스케치>를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21년 10월 22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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