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유네이로프레니아, Switzerland

2023.08.24 / 7박 9일

by imsong
Euneirophrenia, 즐거운 꿈에서 깨어났을 때 느끼는 만족


정말 좋은 꿈을 꾸면, 잠에서 깼다가도 그 꿈을 계속 이어가고 싶어 다시 잠드는 때가 있지 않은가. 지난 스위스 여행은 그런 꿈 같은 여행이었다. 자꾸 회상하고, 이야기하고, 꺼내어 보는 흐뭇한 추억. 그런데 꿈은 금새 희미해진다. 추억은 꿈보단 힘이 있지만, 추억도 천천히 희미해진다. 그래서 오늘도 기록한다.


2023년 5월 20일 7년 연애 끝에 결혼을 했고, 이직한 시기와 맞물려 그 해 8월 늦은 신혼여행을 갔다. 1년 전 결혼 준비를 했을 땐, 내가 다른 회사로 이직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다. '마지막 미혼의 신분으로 지원해보지 뭐.' 큰 기대없이 지원했던 회사였기 때문이다. 2023년 4월 입사 후, 한 달 뒤 결혼을 했는데 이게 웬 떡이람. 회사는 한 달 밖에 안 된 직원인데도 너무나 감사하게 결혼 항공권(비즈니스석) 복지를 적용해줬다. 내 인생에 비즈니스석이라니! 스위스 여행은 서사부터 꿈 같았다.





1일차


장시간 비행이 이렇게 설렜던 적은 없었다. 남편과 쭈뼛쭈뼛 좌석을 찾아 앉았고, 안 그래야지 다짐했지만 누가봐도 비즈니스석이 처음인 사람처럼 열심히 좌석, 어메니티, 기내식 메뉴판을 사진으로 남겼다. 그런데 남편은 우리 바로 앞 좌석에 배우 이동욱님이 있다고 한껏 흥분된 목소리로 내 귀에 속삭였다. 나는 순간, '혹시, 내가 본인을 몰래 사진 찍었다고 오해하면 어쩌지?'라는 걱정이 스쳐지나갔고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교양을 되찾았다.


이전에도 비행기는 많이 타봤지만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탄 것 마냥, 좌석을 조절하거나 메뉴/음료를 선정하는 것 조차 어색했다. 기내식이 순차적으로 나올 때마다, '하늘 위에서 이런 요리를 먹다니!'라고 마음 속에서 감탄하고 환희했지만, 나의 촌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입술을 앙 다물고 새어나오는 웃음을 힘껏 막았다. 한참 동안 1차 기내식 코스 요리를 먹고, 영화를 조금 보다가 잠들고, 또 한참 동안 2차 기내식 코스 요리를 먹고 나니 아주 금방 취리히에 도착했다. 성공한 삶이 무엇인지 아직 정의내리지 못 했지만, 남편과 나는 지루함도, 근골격계 통증도 못 느낀 10시간의 비행으로 인생 성공의 기분을 누렸다.


남편은 첫 유럽 여행이었다. 그런데 여권 만료일*이 얼마 남지 않아 긴급 여권을 발급받았고, 입국 심사시 사유를 물어볼 것 같아 남편에게 영어 문장을 준비해두라고 했다. 역시나, 준비하지 않은 남편은 뒤를 돌아보며 나에게 도움의 눈빛을 보냈다. 우선 나는 허니문이라는 달달한 단어로 입국 심사관의 경계를 풀고 더듬더듬 긴급 여권 발급 사유를 설명했다. 그렇게 입국 심사관의 환대와 함께 우리의 여행은 시작됐다.

(*) 여권 만료일이 3개월 미만 남은 경우, 입국이 불가한 국가 많음


2023년 8월 24일, 인생 첫 비즈니스 기내식


우리는 신혼여행인 만큼 체력도 아끼고 편하게 놀고 오자는 마음으로 렌터카 여행을 결정했다. 남편은 기차에서 짐 걱정을 안해도 된다며 매우 좋아했다. Hertz에서 우리에게 제공한 차는 쨍한 파란색의 기아 스토닉이었는데, 8일 동안 함께 여행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괜스레 정이 갔다. 그리고 약 1시간 20분 달려 스위스위 수도 베른에 도착했다. 우리가 베른에서 머문 숙소는 'Evi's Home Hotel & Apartments'라는 곳이다. 숙소 인테리어는 별 감흥이 없었는지 내 휴대폰 앨범엔 숙소 사진이 없다. 숙소는 없는게 많아 불편했지만, 스위스의 깨끗한 환경을 몸소 체험했다. 에어컨은 없었지만 창문을 열어놔도 해충 한 마리 들어오지 않았고, 냉장고에 시원한 물은 없었지만 수돗물을 먹어도 별 탈 없었다. 그리고 스위스는 숙박 업체에 1박당 1.5 ~ 6프랑 정도의 도시세를 내는데, 대신 대중교통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Guest Card를 제공해준다. 숙소 바로 앞에 버스 정류장이 있어서 시내로 왔다갔다 하기 편한 가성비(스위스 물가 고려) 숙소였다. 저녁식사는 늦게 도착해서 한국에서 가져온 소중한 컵밥과 컵라면으로 해결했다.


렌터카 : Hertz / 8일 약 118만원
숙소 : Evi's Home Hotel & Apartments (Link) / 1박 약 20만원
2023년 8월 24일, Evi's Home Hotel & Apartments (출처 : Google Maps) / Hertz Car Rental KIA Stonic


2일차


10시쯤 숙소에서 나와 장미공원으로 향했다. 장미공원은 베른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포토 스팟에서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는데, 자매처럼 보이는 엄마 또래의 한국인 여성 두 분이 사진을 요청하여 찍어드렸다. 저 세대, 저 연세에 두 분이서 자유여행을 하신다니 정말 대단하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공원엔 피크닉을 즐기는 엄마와 아이, 단체로 요가하는 동네 주민들이 보였고 그런 일상의 여유가 보기 좋았다. 장미공원에는 'Restaurant Rosengarten'이라는 식당이 있는데, 메뉴엔 안보였지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찾으니 내어주셨다. 남편과 나는 평화롭게 티타임을 가지며, 장미공원의 여유로운 분위기에 물들었다.


커피 한 잔 후, Bear Pit → Nydegg Bridge → 아인슈타인 하우스 시계탑 → Bundesplatz 경로로 천천히 걸으며, 베른 시내를 둘러보았다. 시계탑 앞에선 스위스 전통악기인 알프호른(Alphorn)을 연주하는 시니어 그룹 공연도 볼 수 있었다. 걷다가 드문드문 보이는 기념품 샵의 예쁜 엽서들, 분데스플라츠 근처 아기자기한 시장도 구경하는 잔재미가 있었다.


장소/식당 : Rosengarten Bern(Link) & Restaurant Rosengarten (Link)
장소 : Bear Pit (Link), Nydeggbrücke (Link), Einsteinhaus Bern (Link), 시계탑 Zytglogge (Link), Bundesplatz (Link)
2023년 8월 25일, 장미공원 / 시계탑 / 근처 기념품샵
2023년 8월 25일, Bundesplatz 마켓


베른 시내를 2~3시간 둘러봤는데 도시가 작아서 그런지 금방 익숙해졌다. 베른 성당까지 둘러보고, 샌드위치를 사서 아레강으로 가기로 했다. 'HOLLYFOOD'라는 샌드위치 가게는 물가로 악명높은 스위스에서 야채를 아낌없이 넣어준다는 리뷰를 보고 찾아갔는데, 맛은 무난했지만 구글 평점은 무려 4.9이다.


'Kirchenfeldbrücke(Link)' 다리를 건너서 곰공원 방향으로 아레강을 따라 걸었다. 중간중간 수영, 패들 보트, 자전거, 런닝 등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을 보았다. 어찌나 즐거워 보이던지, 보고만 있는 우리도 덩달하 시원하고 행복했다. 곰공원 근처에 다다르면, 아레강에 발을 담그고 오순도순 사람들이 모여있다. 우리도 한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포장한 샌드위치를 먹었다. 아레강 물은 정말 맑고, 차가웠다. 한참 동안 우린 사진도 찍고, 수다도 떨었는데, 날씨가 점차 흐려지자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숙소로 돌아가기 전 Coop(Link)에 들러서 장을 봤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고작 이 마트가 스위스 여행에서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는지 몰랐다.


장소 : Cathedral of Bern (Link)
식당 : Hollyfood Take-away (Link) / 샌드위치 맛집 (약 10프랑/개)
장소 : 아레강 / 곰공원(Link) 근처 엘레베이터
2023년 8월 25일, HOLLYFOOD 샌드위치 / 아레강


3일차


숙소에서 또 다시 컵밥과 컵라면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그린델발트로 향했다. 이 날은 남편의 첫 해외 운전 데뷔날이었고, 나는 이 멋진 순간을 동영상으로 남겼다. 남편의 해외 경험은 대학시절 싱가포르 여행, 연애시절 보홀 여행이 전부다. 그래서 서툴지만 열심히 즐기는 방법을 터득해 나가는 모습이 대견했다. 본인도 귀한 경험 해본다며 좋아했다. 이렇게 한 번씩 함께 성장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린델발트는 정말 동화같은 곳이었다. 날씨가 화창하면 더 좋았겠지만, 산에 걸려있는 구름마저 예술이었다. 그리고 알프스의 공기는 나의 오랜 결막염과 비염을 치료해주는 듯 했다. 우리는 서둘러 숙소에 주차만 하고, Coop에서 점심으로 먹을 빵과 음료를 사서, 융프라우요흐로 가기 위해 아이거 익스프레스를 타러 갔다. 아이거 익스프레스 밖으로 보이는 풍경의 색은 말도 안되게 선명했고, 마치 내 눈에 어떤 효과 필터가 씌워진 듯한 비현실적인 색감이었다. 아이거글레처까진 그랬다. 산악열차를 타고 더 위로 올라가니, 사방이 구름으로 뒤덮히고 바람은 매섭게 불었다. 구름이 걷힐 때까지 기다렸지만, 아래 사진이 최선이었다. 스위스 국기 뒤편 거대한 자연을 사진을 담지 못해 아쉬웠다.


장소 : Jungfraujoch (Link) / 융프라우 VIP 패스 2일권 (1인당 200프랑 w/동신항운 쿠폰)
방법 : 그린델발트 터미널 (by. 아이거 익스프레스*) → 아이거글레처 (by. 산악열차*) → 융프라우요흐

(*) 융프라우 VIP 패스 2일권 (1인당 200프랑 w/동신항운 쿠폰)

2023년 8월 26일, 아이거 익스프레스(Eiger Express) / 융프라우요흐(Jungfraujoch)


부서배치 후 2주만에 결정된 여행이라 인테리어, 뷰, 가격이 모두 좋은 숙소는 남아있지 않았고, 신혼여행을 핑계로 아이거(Eiger) 산이 보이는 비싼 숙소를 덜컥 예약했다. 그런데 분명 아이거뷰로 방을 예약했는데, 창 밖으로 맞은편 숙소만 보였다. 1박에 68만원만 아니었어도 그냥 넘어갔을 텐데 참을 수 없는 가격이었다. 나는 다시 프런트 데스크로 가서 아이거뷰로 방을 예약했는데 산이 코빼기도 안보인다고 야무지게 항의를 했다. 리셉션 직원은 층이 낮아서 그렇다며, 다음날 더 높은 층으로 방(아래 사진)을 바꿔주겠다며 나를 달래주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내가 예약한 방은 Cozy Room(with Eiger View)이었는데, 이 방은 앞 동으로 가려져 아이거뷰가 답답하게 보이는 방이었고, Luxury Room(with Eiger View)이 아이거뷰가 시원하게 보이는 방이었다. 스위스의 자본주의는 융프라우요흐 정상의 바람만큼 매섭다.


숙소 : BERGWELT GRINDELWALD (Link) / 1박 약 68만원
2023년 8월 26일, BERGWELT GRINDELWALD 숙소 앞 전경, Cozy Room(with Eiger View), 스파


스파를 하는 동안 몸도 녹이고, 아이거뷰도 실컷 즐겼다. 스위스에 온 이후, 제대로된 끼니를 챙겨먹은 적이 없는 것 같아 진정한 요리를 사먹기로 했다. 근처 평이 괜찮은 피자 테이크아웃 가게를 찾았다. 메뉴판에 있는 피자들은 비주얼이 썩 맛있어 보이진 않았고, 구글 리뷰 중에 비주얼이 제일 괜찮아 보이는 피자를 보여주며 똑같은 메뉴로 달라고 주문했다. 아마, Pizza Salami(페퍼로니 피자)에 버섯, 올리브, 양파 토핑을 추가해서 만들어주신 듯 했다. 숙소에서 간신히 보이는 아이거뷰를 감상하며, 피자와 맥주 그리고 Coop에서 산 납작 복숭아로 달콤하게 하루를 마무리했다. 돌이켜보면, 스위스에서 사먹은 음식 중 이 피자가 제일 맛있었다.


식당 : Take Away 191 (Link) / 피자 맛집 (약 25프랑/한 판)
2023년 8월 26일, TAKE AWAY 191 / 스위스 맥주 Hell quollfrisch


4일차


남편은 호텔 조식을 좋아하지만, 스위스에선 유독 더 좋아했던 것 같다. 신선한 과일과 야채, 그리고 갓 조리된 요리를 배불리 먹을 수 있어서 아니었을까. 어제 저녁으로 먹은 Medium 사이즈 피자 한 판이 한화로 4만원 돈이었다. 스위스는 물가가 너무 비싸서 매 끼니 외식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우린 분명 점심이 시원찮을 것이라고 예상했고, 전투적으로 배를 단단히 채웠다.


2023년 8월 27일, BERGWELT GRINDELWALD 조식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피르스트로 가기 위해 Firstbanhn AG로 곤돌라를 타러 갔다. 이 날도 날씨가 흐려서 아쉬웠지만, 나름 운치있고 좋았다. 절벽을 따라 만들어진 클리프 워크(Cliff Walk) 덕분에 피르스트의 자연 경관을 360º로 즐길 수 있었다. 사방이 트여있어 대자연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데, 고소공포증이 있는 남편은 약간 무서워했다. 내려오는 길엔 대만 친구 두 명이 글라이더를 같이 타자고 제안하여 흔쾌히 수락했다. 우리 순번을 기다리는 동안엔 앞서 탄 커플이 본인들 동영상을 찍어달라고 부탁하여 흔쾌히 찍어줬다. 우리가 신뢰감을 주는 인상인가 싶어 괜히 흐뭇했다.


피르스트에서 내려온 후, 그린델발트역에서 기차를 타고 인터라켄 동역으로 갔다. 스위스는 기차 여행이 매력인데, 렌터카를 빌렸지만 이렇게 기차로 이동하는 때가 있어서 좋았다. 유람선을 타기 전, 역 근처 햄버거 가게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바짝 마른 패티에 양상추 1~2장이 들어있는 햄버거가 4만원 정도 나온 듯 싶다. 남편은 한참을 투덜거렸다.


베른의 아레강도, 인터라켄의 브리엔츠 호수도, 스위스의 물은 어딜가나 옥색빛이었다. 우린 어떻게 물이 이렇게 깨끗할 수 있는지 매번 감탄했다. 이렇게 맑은 물에서 낚시하는 사람이 없다며 신기해했는데,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낚시를 하려면 자격증 소지 및 허가가 필요하다고 한다. 1시간 가량 유람선을 타며 옥색빛 호수와 잘 어우러지는 풍경을 마음껏 감상했다. 다음 일정으로 하더쿨름 전망대(Link)에서 저녁을 먹을 생각이었는데, 스위스관공청 홈페이지에서 웹캠(Link)을 확인해보니, 회색 구름이 사방을 가렸다. 우리의 기분도 우중충해져서 브리엔츠에서 기차를 타고 그린델발트로 돌아가기로 했다.


숙소로 돌아가기 전, Coop에 들러 훈제 닭다리를 샀다. 먹는 것에 진심인 남편은 행여나 닭다리가 식을까봐 품에 안은채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낮에 비싼 돈 주고 사먹은 햄버거에 대한 배신감도 종일 마음에 담아둔 듯 했다. 우린 이 날도 컵밥과 컵라면, 그리고 따뜻한 훈제 닭다리로 저녁을 대충 때웠다.


장소 : Firstbanhn AG (Link) & First
장소 : Interlaken Ost (Link) & 브리엔츠 호수 유람선
2023년 8월 27일, 피르스트 / 브리엔츠 호수


5일차


이 날은 오전에 체르마트 마테호른(Link)에 갈 계획이었는데, 어제보다 더 짙어진 구름에 포기했다. 대신, 그린델발트의 신선한 공기를 가득 마시고, 충분히 휴식을 취한 뒤 브베(Vevey)로 이동했다. 브베 숙소도 신혼여행을 핑계로 비싼 곳으로 잡았는데, 이 곳의 시설은 돈이 많아야 진탕만탕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수영을 못 했던 우리라, 수영장도 온전히 즐기진 못했다. 돈 아까웠단 얘기다. 대신, 발코니에 서 있던 남편의 뒷모습이 성공한 남자 같다며 사진에 담았는데, 또 한 번 인생 성공의 기분을 누렸다.


숙소 : Le Mirador Resort and Spa (Link) / 1박 약 61만원
2023년 8월 28일, Le Mirador Resort and Spa 숙소, 발코니 전경, 수영장


리조트는 지형이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FUN이라는 교통수단을 10분 정도 타고 내려가면 바로 시내로 갈 수 있다. 라보지구(로잔~브베~몽트뢰)는 포도 재배지로 유명하다. 우린 기념품으로 와인을 사기 위해 'Obrist SA'라는 와인 공장에 갔다. 남편은 브베의 'Château d'Hauteville'라는 농가에서 재배된 포도로 만든 와인이 의미있는 것 같아 상사 선물로 제격이라며 마음에 쏙 들어했다. 우린 와인에 대해 잘 모르지만, 향과 맛이 괜찮았다. 스위스 와인은 생산량이 적어 거의 전량이 내수에서 소비되고, 1.5% 정도만 수출된다고 하여 희소성에 홀라당 넘어가 6병이나 샀다.


와인을 사고, 쌀밥을 먹고싶어 하는 남편을 위해 아시아 음식을 파는 식당을 찾았다. 어느 나라 음식인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 원하는 토핑과 소스를 선택하면 조리해서 덮밥식으로 내어주신다. 개업한지 얼마 안되어 보이는 가게였는데, 사장님이 엄청 친절하셨다. 음식이 양도 많고 향신료 향이 강해 다 먹지 못하고 남겼는데, 사장님께서는 우리가 맛이 없어서 남긴 줄 아시고 매우 슬픈 표정을 지으셨다. 남편은 그 표정을 보고 마음이 쓰였는지, 다음날 아침으로 먹겠다며 포장해가자고 했다. 그러자 사장님 표정이 다시 밝아지셨다. 그렇게 우린 무거운 짐과 가벼운 마음으로 숙소로 돌아갔다.


장소 : Obrist SA (Link) / 와인 공장
식당 : Urumqi Traiteur Asiatique (Link) / 덮밥류
2023년 8월 28일, FUN (출처 : The Guardian) / Obrist SA 와인 공장 (출처 : Google Maps) / 소고기 덮밥

6일차


전 날 포장해 온 소고기 덮밥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시옹성으로 갔다. 시옹성은 스위스에서 가장 많은 방문객이 찾는 역사적 건축물이라는데, 흐린 날씨 때문에 그런지 둘 다 시큰둥 했다. 대신, 시옹성부터 몽트뢰 시내까지 제네바 호수(레만호)를 따라 걸었는데,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고 한적하여 산책하기 좋았다. 그리고 여름에 이 곳에 방문한다면, 중간중간 수영 포인트가 있어 수영복을 챙겨와서 물놀이를 해도 좋을 것 같다. 물이 너무 맑아서 만지고 싶었는지, 남편은 물가에 내려가 한참을 손도 담가보고 물수제비를 만들었다.


장소 : Château de Chillon (Link) & Montreux (Link)
2023년 8월 29일, 시옹성 / 몽트뢰 산책로


이 날은 근사한 점심을 먹기로 했다. 구글 평점도 높고 리뷰도 좋은 'Restaurant Chez john The Roadhouse(Link)'를 오픈 시간에 맞춰 찾아갔다. 그런데 문이 닫혀있어 두리번 거리니, 사장님께서 손을 다쳐 점심 영업을 못 한다며, 붕대 감은 손을 보여주셨다. 사진 속 스테이크가 정말 맛있어 보였는데, 몽트뢰에서 가장 아쉬운 순간이었다. 대안으로 찾은 'Du Pont'이라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분위기도 아늑하고 사장님도 친절했지만, 음식 가격은 사악했다. 주먹만한 스테이크와 퐁듀는 합이 14만원이었다. 스테이크는 각자 두 입만에 끝났고, 감자와 빵 쪼가리를 비싼 돈주고 먹는다며 남편은 억울해했다. 감자로 배는 빵빵하게 채웠다. 심지어 친절하게 남은 감자도 싸가라고 하셔서 가져올 수 밖에 없었다.


식당 : Du Pont (Link) / 스테이크, 퐁듀 맛집
2023년 8월 29일, Du Pont 스테이크, 퐁듀


마지막 2박 머물렀던 숙소는 도로 앞이라 시끄러운 것 빼곤, 모두 마음에 들었다. 제네바 호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와서 속이 시원했고, 바로 앞에 Cully 기차역과 수영 포인트, 바로 뒤엔 포도밭이 있어 차 없이도 이곳저곳에서 놀기 좋았다. 우린 짐을 푼 후, 바로 기차를 타고 로잔 시내를 구경하러 갔다. 나를 위한 선물 마그넷도 사고, Victorinox에서 감자칼도 구경한 후, 저녁을 포장해가려고 Bibibowl(Link)이라는 한식당을 찾아갔는데 오후 3시에 이미 영업이 종료됐다. 우리는 오후 3시부터 일이 끝나는 삶에 충격을 받은 채로 버거킹으로 갔다. 버거킹에서는 햄버거 세트 두 개를 시켰는데, 5만원이 나와 또 충격을 받은 채로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 : Hôtel Lavaux (Link) / 1박 약 23만원
장소 : Lausanne (Link) / 시내
2023년 8월 29일, Hôtel Lavaux 숙소 내부, 외부 / 로잔 시내


7일차


며칠만에 맑게 갠 하늘을 보는 것인지, 이 날은 정말 기분이 좋았다. 아침 일찍 싱그러운 포도밭 사이를 누볐다. 걷는 동안 런닝하는 한 명 빼곤 마주친 사람이 없었는데, 40분 정도 걸어 Viewpoint(Link)에 도착하니, 자전거 타는 관광객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고즈넉한 이 동네가 우린 마음에 들었다. 우린 커피와 점심을 사러 근처 Coop까지 17분을 더 걸었다. 또 Coop 앞에서 행운을 만났다. 전기 통닭 구이! 따끈한 통닭을 먹기 위해 숙소로 돌아올 땐 버스를 탔다.


2023년 8월 30일, 포도밭 트레킹


점심을 먹고, 숙소 바로 앞 'Plage de Cully'라는 수영 포인트로 갔다. 계속 서늘했던 날씨가 이 날 하루는 뜨거웠다. 심지어 동네 주민처럼 보이는 남자 아이 두 명 빼고는 사람도 없어서 이 호수를 독차지했다. 행운이 넘치는 날이었다. 우린 팔튜브를 끼고 물놀이를 했는데, 남자 아이들이 맨 몸으로 시원하게 수영하는 모습을 보고, 한국에 돌아가면 수영을 꼭 배우기로 했다. 이 호수에서 한참을 놀았다.


우린 샤워를 하고, 또 가장 가까운 Coop을 찾아서 걸었다. 물놀이 하다가 다친 남편의 반창고를 사러 갔는데, 팔지 않아서 어느 친절한 직원분이 한 개 내어 주셨다. 그리고 와인 한 병을 사서 낮에 놀았던 호수로 돌아가 오붓하게 와인을 마셨다. 이 순간을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남편 모습을 보며, 덩달아 행복해졌다. 남편은 와인에 취해 속마음을 잔뜩 말했는데, 나도 와인에 취해 남편이 무슨 말을 했는지 잊어버렸다. 그리고 곧 이 달콤한 꿈에서 깰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깨닫고는 아쉬움이 폭풍처럼 밀려왔다. 다음 여행을 기약하며, 서로 아쉬운 마음을 달래주었다.


장소 : Plage de Cully (Link) / 수영 포인트
2023년 8월 30일, 제네바 호수(레만호) 수영


8일차


아침 일찍 서둘러 라보를 떠나 취리히로 향했다. 3시간 정도 운전을 했는데, 남편은 스위스에서의 운전이 편해진 듯 했다. 취리히 시내는 조금 복잡하여, 둘 다 잠시 예민해지긴 했지만 별 탈 없이 주차까지 성공했다. 우선, 빅토리아녹스에서 친구들에게 나눠줄 감자칼을 잔뜩 사고, Lindenhof(Link) ~ Grossmünster(Link) ~ Rentenwiese 공원(Link)까지 걸으며 반나절 동안 마지막 스위스를 즐겼다. 공항으로 가기 전, 혼자 렌터카 주유까지 해 낸 남편이 기특했다.


스위스 여행은 펜데믹 이후 오랜만에 떠난 여행이어서 여느 때보다 설렜던, 낯설고 거대한 세상에 오롯이 둘만 떨어진 듯한 애틋함이 있던 여행이었다. 무엇보다도, 신혼여행이라는 명목 하에 회사 눈치도 안 보고, 현실 걱정도 잊은 채 온전히 여행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더 좋았다. 돌아오는 비행기도 비즈니스석에 앉았는데, 남편은 잭콕을 주문하고 제로콜라를 받았지만, 처음보단 익숙하게 기내 서비스를 즐겼다. 둘 다 첫 번째 기내식을 먹은 뒤 바로 골아떨어졌는데, 눈을 번쩍 뜨자 인천 도착 3시간 정도 남아 있었다. 개운하게 자고 일어났더니, 스위스 여행이 끝나고 현실로 복귀해 있었다. 날씨가 내내 아쉬웠지만, 여독 없는 즐거운 여행이었다.


2023년 8월 31일, 취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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