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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정 Nov 08. 2024

신이 선물한 것처럼

느닷없이 찾아오는 안락함에 대하여

01.

퇴근길에는 정말 많은 감정을 느낀다. 하루의 피로가 뚝뚝 흘러내려 여과되는 과정이라 더 고되다. 퇴근길 지하철 안, 손잡이를 잡은 팔에 머리를 기대고 열차의 움직임에 맞춰 흔들거린다. 눈은 죽었고, 배는 고프다. 이럴 땐 내가 배가 고픈 건지 우울한 건지 헷갈린다. 우울감은 허기짐과 자주 오인된다.


역에서부터 집까지는 씩씩하게 걸어다닌다. 역과 집이 그다지 멀지 않고, 버스를 탄다고 해도 퇴근길이라 어차피 차가 많이 막히기 때문에 피곤한 몸을 씩씩하게 움직여 집까지 도착한다. 그 짧은 거리를 걷는 동안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샤워하고 저녁을 먹으면 휘발되는 감정들이지만, 내면 깊숙이 자리잡은 가장 진실한 감정들이기도 하다. 가슴에 돌을 올려둔 것처럼 답답한 기분도 심심한 길에서는 잘 구슬려 놀 수 있는 장난감이 된다. 대체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의 찌꺼기를 다시 곱씹는 과정이라 잘 변하지 않는 생각들이다. 하지만 어제는, 신이 선물한 것처럼, 모든 생각이 뒤바뀌는 경험을 했다.


어떤 생각을 했냐면.

내가 가진 것이 이것 뿐이라면, 이것으로 시작하면 된다는 생각을 했다.

시작, 그게 중요하다. 나는 이제 시작 선상에 서있다는 것. 그게 중요하다.

여태 나는 처음 맞이한 실패에 놀라 그 상처만 되짚어보고 있었다. 하지만 어제는 신이 내 생각을 보듬어준 것처럼 마음이 밝아졌다. 그동안 인정하지 못했던 모든 것들을 수용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정말 느닷없이 찾아온 밝은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에너지로 오늘의 출근길 또한 버텨낼 수 있었다.


남과 비교하면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나를 작게 볼 수밖에 없다. 

남과 비교할 때 기본적으로 우리는 나보다 못난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다.

무조건 나보다 잘 된 사람들만을 기준 삼아 비교한다.

예전에 자주 '뱁새가 황새 따라잡다가 다리 찢어진다'는 속담을 활용해 나를 '다리 찢어진 뱁새'라고 표현하곤 했다. 다리가 찢어졌다 한들,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한들, 뱁새가 뱁새의 걸음으로 걸어왔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게다가 황새를 따라잡겠다며 열심히 걸어온 순간들이 거짓은 아니니까. 나는 떳떳하다.


내가 나를 이긴 얼마 안 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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