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호 존중의 시대는 올까?
이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자신의 삶을 정의할 수 있는 수식어’를
만들어보아야 합니다.
그 단어가 본업으로 인지될 수 있다면
정체성의 뿌리가 단단히 자리잡을 수 있습니다.
- 155p
시대 예보:호명사회, 송길영
출판사:교보문고
[평점]
⭐⭐⭐
알랭 드 보통의 <불안>과 송길영의 <시대 예보:호명 사회>는 도서관에서 우연히 뽑아든 책들이다. 하지만 두 책을 연달아 읽으면서 현대인들의 주요 과제인 '불안'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에 대한 저마다의 해답을 내놓는다는 점에서 주제가 비슷했다.
송길영 작가는 대학 시절 <그냥 하지 말라>라는 책으로 처음 접했다. 그때는 빅데이터 분석가의 측면에서 사회를 진단한 내용이었다면 이번 책은 빅데이터 분석가의 시선은 내려놓고 작가가 오랜 시간 축적한 인사이트를 풀어내는 책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전자가 더 와닿는 듯 했다.
저자는 꾸준히 핵개인의 시대가 도래함을 예견해왔다. '취향 존중'이라는 슬로건이 모두에게 익숙한 메시지로 다가왔고, 쿠팡을 비롯한 다양한 커머스에서는 고객 한명 한명에게 최적화된 서비스와 마케팅을 진행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한 그룹에 묶이기 보다는 개인의 선호와 취향에 맞춘 서비스에 더 익숙하다. 코로나 시기를 지나오며 '사회적 거리두기'가 이제는 '호명 사회'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가 책에서 예견하는 '호명 사회'를 짧고 거칠게 요약하자면 '모두의 선택이 존중받고, 내 이름을 걸고 일하게 되는 사회'를 말하는 듯 하다.
자신의 이름에 책임을 지는 이들의 수평적 연대는 각자가 스스로 완결하여 이름의 값을 해내는 신뢰의 사회를 형성합니다.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고 이름에 부응하는 자기 완결성의 사회, 호명사회가 다가옵니다.
'시대 예보'라는 책 이름에 걸맞게, 저자는 사회적인 문제점을 먼저 짚고 넘어가며 호명 사회가 도래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 사회적 문제라 함은, 우리 모두가 직접 겪고 있는 '불안'에 관련된 것이다. 저자는 이를 '시뮬레이션 과잉'과 '상호 경쟁의 인플레이션'으로 설명한다.
우리는 지금 지구 반내편에서 벌어지는 처참한 일들도 뉴스를 통해 빠르게 전달 받는다. 하루에도 처리해야 하는 정보들이 수천, 수만 개에 달한다. 이런 정보 과잉의 사회에서 우리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시뮬레이션'을 돌리게 된다. 예를 들어, 아이가 미대에 진학해 전업 화가로 일하게 된다면 훗날 경제적 위기에 처할 확률이 너무나 높다. 그러니 안정적으로 돈을 벌고 추후에 경제적 위기에 시달리지 않기 위해 의대에 진학시키려는 부모들이 많아지고 있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나 공포가 '시뮬레이션 과잉'에 해당한다.
시뮬레이션 과잉의 이유로는 우리가 접하는 정보의 양이 늘어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우리 모두의 욕망이 커진 것에 기인합니다. (…) 풍요로운 삶에 대한 선망은 이국의 정취가 흐르는 화면에서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노력한다면, 그 노력의 정당성과 방법은 차치하고라도 누구나 백만장자가 될 수 있다는 광고가 방금 본 동영상에 이어져 흐릅니다. 얼마나 많이 소비했는지를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사치의 경쟁이 가상의 네트워크 위를 가득 채우며 내가 실제로 가진 것에 대한 아쉬움보다 타인의 소비를 통해 더욱 허기짐을 느낍니다. - 44p
시뮬레이션 과잉이 만들어지게 된 것 또한 '후회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는 욕망이 만들어낸 결과라는 점에서 씁쓸하고 안타깝다. 시뮬레이션을 통해 미래의 위협을 제거하고 안정적으로 살면 좋겠지만, 그럴수록 방대한 선택지에 의지와 열정이 소진될 뿐이다. 결국 시뮬레이션 과잉이 만들어지게 된 이유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 59p
또한, 이런 상호 경쟁 인플레이션은 개인의 불안감을 키울 뿐만 아니라 사회적 비용도 커진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저자는 바로 이런 비효율적인 사회 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해서라도 호명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상호 경쟁의 인플레이션은 개인과 사회 양쪽 모두에 더 큰 비용을 지불하게 만습니다. 개인에게는 ‘충분히 잘하고 있음’에도 도태되는 것 같은 불안을 안겨주고, 사회에는 경쟁을 위한 경쟁을 만드는 선발제도를 운영하기 위해 더 많은 자원을 투자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 102p
스스로가 앞으로 무엇을 할지 모르기 때문에 선택지를 늘리려는 것이 아니라 ‘축적’을 추구하며 자신이 스스로 커리어를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발 당하기 위한 노력은 막연히 국영수를 중심으로 예습 복습해 일단은 대학에 가는 것이고, 축적을 쌓는 것은 직접 식자재를 골라 요리하고, 여기에 어울리는 와인을 찾아서 맛보며 경험과 지식을 쌓는 것입니다. - 136p
취준생의 입장에서 이 문장은 선발 시스템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 계기가 됐다. 스펙 인플레이션이 심해지면 내 커리어에 상관 없는 무수한 것들도 챙겨야 한다. 어학 성적, 인턴, 대외활동, 데이터 자격증 등 조금이나마 선택지를 늘리기 위해 활동하다 보면 채워야 할 스펙 역시 무한대로 늘어난다. 이는 비효율적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학대에 가깝다.
불안을 해소하는 것은 자기 혼자만의 심적 평화에 그치지 않습니다. (…) 즉 자신의 본진을 고르고 그곳에만 매진하는 일이 언뜻 개별적 선택의 집합에 불과한 듯해도, 전체 집단으로 보면 경쟁으로 인한 낭비가 없어지는 효율화에 도달하는 셈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역할을 다하는 것으로 우리 모두를 위한 각자의 최적화를 도모할 수 있습니다. - 148p
차라리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명확히 정하고, 선발을 위한 스펙을 쌓는 것이 아니라 성장을 위해 축적하는 것이 요즘 시대에서는 더 잘 먹히는 스펙인 것 같다. 자소서에서 스토리텔링이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이건 선발 시스템이 고도화되었을 뿐 취준생의 부담이 덜어진 건 아닌 것 같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느낌이지만 그럼에도 마인드라도 가볍게 가지고 가면 사는 데에 도움이 된다.)
여튼, 저자는 우리의 불안을 덜고 무한 경쟁의 궤도에서 벗어나기 위해 '각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각성이란, 나를 잘 정의내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다양한 정체성을 수립하기 전에 '본진'을 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출발점에서부터 최종적인 성장 단계에 이르기까지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본진’입니다. 복수의 정체성을 추구하고자 할 때 오히려 더욱 필요한 것은 깊이 뿌리내려 전문성을 키워나갈 수 있는 주력 분야의 확립입니다. - 156p
이러한 본진은 결국 내가 어떤 일을 좋아하는지, 다른 사람과 비교했을 때 어떤 일에 더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지 등 우선 자신을 돌아보는 일에 수렴한다. 나를 먼저 알아야 내가 하고자 하는 일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내가 가고 싶은 회사를 먼저 정하기보다는 나를 정의하는 문장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한다. 이는 회사에 나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회사를 선택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취준 생활 동안 주체성을 확립하기 어려운데 마인드를 다르게 설정하니 오래 숨통을 조여오던 압박이 조금은 가벼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저자는 결국에는 회사가 아니라 내 이름을 걸고 일 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말한다. 모두가 전문성을 갖춰야 하는 시대가 올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남을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는 취향과 연대와도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해 각자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옳기 때문이 아니라, 각자가 이름을 걸고 하는 것이 우월하기 떄문에 조직은 이러한 대등함과 호명의 시스템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시점이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다시 찾은 이들은 그 이름을 알리기 위해 각자의 가리에서 맹렬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 282p
핵개인이 서로 연대해 나가는 과정에서 같은 고민을 나누는 동료들과 함꼐 성장하는 기쁨을 누리는 것은 대등함을 바탕으로 타인을 존중하는 이들만이 억을 수 있는 선물 같은 것입니다. 그 과정이 떄로는 고단하고 외로울지 몰라도 우리는 결국 그 길 위에서 진정한 자아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 303p
책을 읽은 감상을 한 줄로 줄이자면, 반신반의 (半信半疑)다. 대등함을 기반으로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회는 겉보기에는 지금 심화되고 있는 상호 경쟁의 인플레이션을 멈추는 다정한 시대가 될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결국 개인은 개인과 경쟁해야 하는 시대가 오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개인과의 경쟁을 더 심화시키고, 승자와 패자를 더 명확히 가르는 사회가 되지는 않을까?
또, 호명 사회에서 개인의 전문성이 각광받는 시대가 온다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전문성을 축적하기 위해 개인이 더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다. 단순히 다정함과 상호 존중만으로 경쟁이 줄어들 것 같지는 않다.
핵 개인의 시대를 진단하고, 추후에는 곧 호명 사회가 올 것이라는 저자의 진단은 상호 경쟁 인플레이션에 지친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진통제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하며 눈을 흘기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내 이름이 남들에게 다 알려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적당히 벌고 적당히 살아도 행복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송길영 작가의 다른 책들도 읽어봐야겠다!
ps. 이제와 밝히기 좀 쑥스럽지만, 내가 책을 읽은 포인트와 저자가 책을 쓴 포인트가 맞지 않았던 것 같다 ㅎㅎ 저자는 변화하는 시대 속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더 초점을 맞춘 거라면, 나는 시대가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가에 더 초점을 맞춰 읽어서 불호 포인트가 있었던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