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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자 Aug 30. 2023

맏이 2. 소학교에 입학하다

나도 만 여덟 살에 그곳 풍교시의 마츠바소학교(松葉小學校)에 입학했다. 난 원래 공부보다 체육을 좋아했다. 몸도 건강하고 무슨 운동이든 그 또래에서는 나를 따를 자가 없었다. 달리기는 이미 육 학년 급에 속하여 하급생으로는 드물게 현내(縣內) 체육대회에 선발되어 여러 번 출전하기도 했다. 우리 동포인 조선인 친구도 꽤 많이 있었다. 그중에는 절친한 유부영 씨도 있었다. 오로지 지금까지 생존하여 친숙하게 지내는 단 한 사람의 친구다. 유부영은 고향이 신탄진으로 아버지의 친구의 아들이다. 나이는 나보다 세 살 정도 위인데 비위가 좋고 재담을 잘하여 비 오는 날이면 자진해 나서서 이야기를 하던 생각이 난다.

그때 우리 집은 물론 셋집이었을 것이다. 한 집에 신탄진 노산에 사는 유ㅇㅇ와 또 한 가족이 있었으나 기억은 없고 아버지는 제사공장에서 조선인 종업원을 관리하면서 학원을 하셨다. 사회활동도 많이 하신 것 같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것은 어떤 조선인 친선 씨름대회를 개최하시면서 대회사를 낭독하는 모습과 수상자에게 상품으로 자전거 등을 시상하는 모습이 선하다. 이런 일은 여러 번 볼 수 있었는데 그 무렵 우리 가정에 일대 사건이 발생했다.


아버지가 테러를 당하여 피투성이가 된 채 아버지의 친구에 의해 집으로 오셨다. 후에 병원에 가셨는지는 기억에 없다. 다만 그 경위에 대해 어머니로부터 울음 섞인 어조로 들었을 뿐이다.


당시 그곳 풍교시 내에 많은 조선인이 우리와 같은 경위로 영주한 사람이 많았는데, 아버지가 이곳에 온 후 시작한 사업이랄까 이권이 개재되는 그런 곳에는 조선 사람 중에도 서로 파가 형성되어 사사건건 물의가 많았던 모양이다. 그것은 자연히 정치적으로 일본 관계 부처의 배후가 작용하고 그 힘의 과시로 종종 충돌이 잦았던 모양이다. 어찌 되었건 아버지는 그 사건으로 눈이 하나 빠지고 오른쪽 손에 꺽깽이로 찔려 구멍이 났다.


어머니의 비탄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생명만이라도 살린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얼마간 모은 돈도 이 바람에 바닥이 나고 아버지는 그 무렵부터 제1선에서 물러앉았다. 생존경쟁의 결과다. 같은 민족끼리 외국까지 와서 그것도 한일합방된 민족의 한이 서려 있는 그런 환경에서의 일이었으니……. 그때 아버지의 나이 37세, 어머니는 34세 때의 일이었다.


이유는 여하간 이때부터 아버지는 실의에 잠겼다. 도저히 이런 곳에서의 재기는 어렵고 당장 생활에 지장이 오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추종하던 친구들도 하나하나 타지로 이사하기 시작했다. 사촌도 그리고 제사공장에 취직하러 왔던 사촌 누님도 아버지 눈치만 보게 되었다. 그들은 우리도 다른 곳으로 이사 가자고 권유하기 시작했다. 사촌 누님은 조선에서의 생활고 때문에 작은아버지를 따라 건너온 것이다. 물론 사촌은 조선에서 징용 때문에 구천 모 탄광에 있던 것을 아버지의 주선으로 이곳에 빼돌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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