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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맏이 1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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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자 Sep 24. 2023

맏이 25. 38선까지 북진

 


그날 우리는 홍천을 거쳐 춘천으로 갔다. 홍천은 중부지방의 교통 요충지인지라 춘천과 인제 쪽으로 가는 군용트럭과 행군하는 보병들 그리고 주민과 수복하는 피난민 때문에 대혼잡을 이루고 있었다. 혹시 피난민 속에 인민군이 있지 않을까 염려할 정도였으나 검문소의 헌병들의 검문도 엄한 것 같았다. 이미 인민군은 산에 숨은 공비의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춘천에 들어서니 역시 강원도 도청 소재지답게 많은 주민이 오고 가며 군인들의 행렬도 빈번하다. 선두를 다투어 국도 혹은 지방도로 진출한 국군들이 이곳에서 합류하였기 때문에 혼잡은 대단하였다.

인민군이 불시에 침략한 6.25때부터 약 3개월 반쯤 되었을까? 남한을 거의 유린한 김일성의 만행도 역사 속에 민족적 汚點만 남기고 국토는 황폐되었다. 그 많은 인명의 희생과 살상 등 비극적인 참상을 고조시켰다. 그러나 그는 실패한 것이다.

춘천부터 38선까지는 불과 40Km 정도밖에 안되니 이제 失地回復은 목전에 있다. 이곳에서 우리는 선발대 임무를 해제하고 사단 사령부 직속으로 복귀했다. 보병들은 그사이 화천, 양구 쪽 38선까지 진출하여 배치를 완료했다고 들었다. 역시 서부와 동부전선도 많은 진출을 했으나 개성까지는 가지 않고 임진강 선에서 일단 멈추었다고 한다.

戰況을 결정적으로 성공시킨 맥아더 장군(유엔사령관)의 인천상륙작전은 참으로 우리의 국난을 막아주었다. 멋진 작전이었다. 용감한 우리 해병들의 손에 의해 중앙청에 태극기가 다시 올라갔다. 이른바 9.28 수도 탈환이다. 부산으로 피난 갔던 정부는 이승만 대통령의 귀경과 함께 많은 피난민이 정든 고향을 찾아 속속 상경하고 헤어졌던 일가친척을 찾으며 파괴된 집들을 수리하는 등 숱한 비극을 안은 채 이후의 상황 전개에 관심을 모았다. 유엔의 참전으로 군의 작전권은 모두 미8군의 지휘권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현 위치에서 정전이냐 그렇지 않으면 승리의 기세로 차제에 백두산까지 진격하느냐 하는 문제가 가장 큰 관심거리였다.

우리는 춘천에서 3~4일 정도 쉬면서 다음 명령을 대기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이승만 대통령은 만약 유엔에서 38선에서 정전하면 우리 국군만이라도 북진을 고집했다고 한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북진 명령만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모든 국민의 여론도 북진 쪽으로 입을 모으고 있는 현실이고 보면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이 기회야말로 남북통일을 이룩할 절호의 찬스가 아닌가.

그 비참했던 6.25 당시의 우리의 복장도 무기도 식량도 미군의 원조로 그 모습이 나날이 달라졌다. 나는 미군 장교의 잠바 정복 스타일로 바뀌고 헬멧도 보급받았다. 그러나 신발은 운동화로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소대원도 신병이 보충되어 소대원 30명을 채웠다. 무기도 M1, 칼빈으로 통일되었다. 식량은 풍부했다. 그동안 식량은 현지 조달로 충분하였으나 앞으로는 현지 조달은 민폐만 조성하기 때문데 주로 보급미 또는 미군 레이션 등을 주식으로 하고 부식은 된장, 소금의 보급에 의존하며 그 외는 현지에서 구입하였다.

춘천 막국수는 이곳의 명물이었다. 취사병들이 어디서 메밀을 구해왔는지 즉석에서 만들어내는 막국수는 별미였다. 소대원 중에는 식당 경험자, 양복 수선공, 이발사, 철공, 농부 등 생활에 필요한 여러 기능을 갖추고 있어 야전 생활에 점차 자급자족으로의 터전을 다졌다.

춘천 시민도 점차 수복하고 많은 사람들이 喜悲喜樂의 생활 속으로 들어갔으나 아직 텅 빈 집들은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춘천 북쪽에서 가끔 총소리와 포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인민군의 발악인가?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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