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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맏이 1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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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자 Sep 25. 2023

맏이 26. 38선 이북으로 진격

  


드디어 북진명령이 하달되었다. 6사단 사령부에 모인 사단 전 장교에게 사단장은 엄숙하게 말했다. ‘우리 국군은 不意의 인민군의 침공으로 낙동강까지 후퇴하는 수모를 당했다. 그러나 유엔군의 지원으로 38선 이남은 다시 수복하고 민족상잔의 비극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이제 우리는 북진하고자 한다. 이미 김일성은 북쪽으로 도주했으나 우리는 새로운 사명감으로 이 統一聖戰에 최후의 승리를 걸자.'며 진격 시의 주의사항을 설명했다. 진격 시기는 내일 새벽이라고 했다.

부대원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이미 준비는 완료된 상태다. 그러나 북쪽의 지리에는 어둡다. 전에 이북에 다녀온 바 있는 노인들을 찾아 정보 얻기에 바빴고 그 결과 꽤 많은 정보를 얻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고대하던 진격이 개시되었다. 제1 목표는 화천이고 화천 발전소 접수가 우리의 임무였다. 38선을 넘었다. 오늘의 춘천댐 부근이다. 38선을 통과하고 보니 뜻밖에도 인민군과 주민들은 하나도 눈에 띄지 않는다. 화천에 올 때까지 한차례 선두 보병과 전투가 있었던 모양이다. 보병과 헌병들이 통행을 통제하고 있었고 포로가 된 패잔병들이 길가에 앉아 우리 진격을 표정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화천에 들어서니 주민은 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다. 홍천과 비슷한 크기의 부락이었고 우리는 인민위원회에 가보았다. 이곳의 면사무소와 같은 곳이다. 사무실은 비어있었고 벽에 벼 이삭이 한 묶음씩 수없이 걸려있다. 공출 기준이 되는 각 농가의 샘플이라고 누가 말했다. 다음은 바로 옆에 있는 인민군 부대로 가보았다. 우리 국군 부대와 같이 넓은 운동장이며 내무반, 취사장이 있었다. 취사장에 가보니 그 옆 창고에 마른 북어가 산더미 같이 쌓여 있어 우리는 부식용으로 그것을 차에 싣고 정해진 숙소로 갔다.

화천 발전소는 이미 우리 보병과 공병, 1개 소대가 접수하였다 한다. 적의 구역에서의 숙영에 우리는 야간 경계를 철저히 하였으나 아무 일 없이 북진 첫날밤을 새웠다. 후발대로 편성된 우리는 전투도 없이 생전 처음인 이 코스를 신기한 마음으로 진격했다. 섭섭하게도 우리를 맞아야 할 주민은 하나도 없다. 웬일일까.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피난시킨 것이 틀림없다. 산에 숨었거나 북으로 갔을 것이다.     

며칠이 지났을까. 우리는 회양(淮陽)에 다다랐다. 그 유명한 금강산의 안내판을 보았으나 글씨는 총알의 흔적 때문에 내용을 알 수 없었다. 바로 금강산 입구가 된다고 생각했다. 주위의 경치도 좋았고 산마다 수목이 우거졌다. 특히 잣나무가 많았다.

별다른 작전도 없이 진격을 계속하니 우리는 어느새 안변 가까이 왔다. 그 유명한 신고산을 넘게 되었는데 산허리를 빙빙 돌면서 용케도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했다. 경치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고개를 넘을 때 길가에 많은 전투의 흔적으로 보아 선발대는 간간이 인민군과의 전투가 있었음을 짐작케 했으나 우리는 후발대로 아무 저항도 없이 진격하며 차를 달렸다.

얼마쯤 산에서 내려와 안변(安邊)에 도달했다. 역시 주민들을 볼 수 없었고 시야에는 많은 사과밭이 들어왔다. 우리는 곧바로 원산(元山)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얼마 안 되는 거리였다. 원산항이 보였을 때 우리는 모두 만세를 불렀다. 그 유명한 명사십리도 보였다. 그러나 그 해변은 철조망을 쳐놓아 앙상한 것이 그렇게 좋은 경치는 아니었다.     

원산 시내에 들어가니 벌써 수도사단이 먼저 들어와 있었다. 이곳에 와서 북진 후 처음으로 시민의 환영을 받았다. 학생, 농민 등 시민들의 환영회가 도처에서 벌어졌다. 역시 원산은 큰 도시이니만큼 다르구나 생각했다. 우리 소대도 한 민간인 집에서 대접을 받았다. 술은 모두 과실주였고 이 집 주인은 우리와 같이 노래도 부르고 노는데 그 무렵 유행했던 ‘가거라 38선’을 잘 불렀다. 어디에서 배웠느냐고 했더니 그는 형님이 배의 선장으로 분단 후에도 여러 번 속초, 삼척까지 갔다 온 적이 있어 레코드판이 여러 장 있다고 자랑을 한다. 그날 저녁은 오랜만에 많은 술을 마셨다.

다음 날 아침 부두에 나가보았더니 항구 시설은 형편없고 비린내만 나는 황폐된 항구였다. 원산 시민들은 점차 자기 집을 찾아 모여들었고 시내는 활기가 있었다. 이제 국군이 남북통일의 위업을 달성할 것이라고 믿는 것 같았다. 축제 기분은 절정에 이르렀다. 이날 밤도 역시 이곳에 머물렀는데 또 술자리가 벌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중간에서 사양하고 숙소로 정한 개인집에서 푹 쉬었다.

이날은 원산 형무소에 갇혀있던 죄수와 소위 반동분자를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불을 질러 몰살한 현장을 가족들이 뒤늦게 발견하고 통곡하는 것을 또 보았다. 양평에서 본 그 수보다 훨씬 많은 희생자여서 마음이 우울했다. 희비가 엇갈린 하루였다. 내일은 출발이라고 연락이 왔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양덕(陽德)으로 향하였다. 원산은 원래 항구도시로 유명하거니와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했다. 해변을 따라 북으로 함흥, 청진, 나진으로 가는 철도도 있다. 끝까지 가서 통일하려면 아직도 많은 진격을 해야 한다. 그리고 양덕을 거쳐 평양으로 가는 길도 있고 이 도로선을 따라 서쪽으로 가다 보면 또 북으로 갈 수 있는 길이 많다. 우리는 중부 전선을 맡고 양덕 경유 희천(熙川)으로 가는 것이다. 도중에 우리 보병들이 인민군과 여러 곳에서 싸운 흔적이 보였다. 고개를 넘을 때마다 시원한 바람에 살갗에 와 닿았다. 이곳 태백 준령의 나무마다 서서히 단풍이 드는 것 같다. ‘아! 벌써 시월이지.’

민가의 지붕은 거의 돌판 집이었다. 농가는 남쪽과 별 차이가 없었으나 논은 적고 밭은 화전이었다. 이미 수확은 다 끝나고 드문드문 배추만이 남아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양덕으로 가는 도중에 온천장을 지났으나 무슨 온천장인지 알 수 없었다. 통일이 되면 한 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진격은 계속되고 밤이 되면 우리는 숙영을 했다. 여전히 인근 주민을 볼 수 없고 선발대를 따라 뒤질세라 우리는 양덕을 거쳐 희천 방면으로 북진했다. 무인지경의 진격은 계속되었다. 각 부대마다 앞다투어 진격하는 전격 진군이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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