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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맏이 1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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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자 Sep 26. 2023

맏이 27. 희천에 진주

 


희천이 가까워지는데 어떤 광산촌에서 인민군 여군을 포로로 잡았다. 네 사람의 젊은 간호원이었다. 먼저 간 일행에서 낙오됐다고 한다. 각 소대 차 운전석에 나누어 태우고 차 안에서 신문을 했다. 의외로 답변을 잘해 호감마저 느꼈다.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니 평양에서 왔다며 간호원으로 갔다가 이제 집으로 가는 길이란다.     

“이름은?”     

“⭕⭕⭕”     

“나이는?”     

“스물 하나예요.”     

“집은? 고향 말이야?”     

집은 희천에서 얼마 안 되는 개고(价古)라 하고 만포진 가는 도중이라 한다.     

“집에서는 뭘 했나?”     

집에서는 농사짓고 자기는 인민학교 선생이라고 한다. 학교는 희천서 나왔다고 먼저 대답한다. 그 여자는 나의 신문에 겁도 없이 솔직하게 대답하는데 국군과 인민군의 대화 같지 않다. 다리가 아픈 터에 고맙게도 차를 태워주니 그것만이 고마운 아가씨 같았다.

같이 온 여자들은 어디 사는 자냐고 하니 그 애들은 모두 평양에 살고 학교를 그곳에서 졸업하고 여맹원으로 있었다고 한다. 그럼 골수 빨갱이겠구나 하고 집을 평양에 두고 어디로 가려고 이곳까지 왔냐고 물으니 인민군 따라서 같이 만주로 갈 계획이었다고 한다. 간호원 일행은 모두 20여 명이었는데 중간에서 떨어져 나가 그들만 남은 것이라 한다.

희천에 도착하니 그곳은 산간에 있는 작은 역을 낀 도시였다. 만포진으로 가는 철도역이 있고 그 앞으로 청천강이 흐른다. 역 앞에는 주로 목재가 많은 것으로 보아 목재 생산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짐을 풀고 부대원들에게 각자 자유시간을 주었다. 대원들은 도착하자마자 현지 조달에 바쁘다. 쌀은 하나도 없고 옥수수만 가득하다고 취사병은 투덜투덜한다. 우리는 비상식량의 쌀은 있으나 축을 안 내려고 하는 취사병의 심정을 이해했다.

저녁식사는 취사병이 닭으로 찜을 해 가지고 왔다. 나는 여자에게 흰밥과 닭찜을 먹으라고 했더니 얼마나 배가 고팠던지 잘 먹는다. 어린애 같은 아가씨였다. 그러나 밤이 되면서 여자들의 처리에 당황했다. 중대장에게 보고했더니 죽이지는 말고 적당히 재우고 내일 보내라고 한다. 간호원이 작전에 지장을 줄 그런 대상은 못 되니 풀어주라는 것이었다.

나는 연락병과 함께 나의 방에 데리고 와서 신문 아닌 신문을 했다.     

“아가씨 동무, 김일성 본 적이 있어?”     

있단다. 평양에서 한 번 보았다고 하며 젊은 사람이라고 한다. 진짜 김일성이 아닌 딴 김일성이라고 시사를 한다. 이 아가씨도 김일성 장군은 나이도 많고 신출귀몰하는 전설의 위인으로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러면서 벌써 먼저 만주로 건너갔을 거란다. 퍽 이야기를 잘하는 아가씨였다. 적이라고 보는 느낌은 전혀 없었으나 무슨 짓을 할는지 모르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경계는 게을리하지 않았다.     

“아가씨 동무, 이제 안심해. 여기까지 국군이 왔으니 남북통일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그러니 빨리 집에 돌아가 부모님 만나 뵈어야지.”     

했더니 무척 좋아한다. 여자는 비로소 자기의 옷차림이 남루한 것을 몹시 신경 쓰는 것 같아서 연락병을 불러 가까운 곳에 가서 여자 옷 좀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얼마 후 여자 옷만 한보따리 가지고 들어왔다. 여자더러 적당히 맞는 것이 있으면 갈아입으라 하고 필요하면 내일 집에 가져가도 좋다고 말해주었다. 그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이것저것 옷을 고르는 걸 보니 과히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날 밤은 호기심에 많은 이야기를 했다. 6.25의 이야기, 집의 사정, 평양에서의 일들. 나의 고향과 남한의 이야기 등.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여자도 아무 거리낌 없이 먼저 말을 하기도 한다. 밤이 깊어지면서 나는 소대원의 동정을 확인하기 위해 순찰을 나갔다. 거의 잠들어 있었고 몇몇 분대장, 선임하사관들, 고참들이 모여 앉아 그동안 이동 중에 수집한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그 내력을 설명하며 자랑하고 있었다. 옷감이니 시계, 사진기 등등 호기심이 나는 물건들이 꽤 많았다. 내심 이놈들 이제 압록강 가까이 오니 고향에 가져갈 선물을 준비하는구나 하면서 고소를 금치 못했다. 그렇다. 얼마 있으면 남북통일이 되니 얼마나 좋으랴. 나는 무슨 선물이 좋을까.     

 숙소에 돌아와 보니 그 여자는 그때까지 잠을 안 자고 나와 연락병의 양말을 빨아 놓았다. 정말 겁도 없고 착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가씨 동무에게 이제 잠을 잘 것을 청했다. “이렇게 됐으니 할 수 없다. 별도로 방을 줄 수는 없고 이 방에서 같이 자야지.” 하고는 태연한 척했다. 그리고 눈치를 살폈다. 여자는 쉬이 대답하며 구석에 자리를 잡는다. 이미 연락병이 모포를 갈아 놓았던 것이다. 나도 옷을 입은 채 자리에 누웠으나 불안한 예감으로 총을 안고 잤다. 여자는 전혀 그런 눈치를 보이지 않는다. 눕자마자 모두 잠이 들어 눈을 떴을 때는 벌써 아침이었다. 그 여자는 무엇을 하는지 다른 대원들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제보다 더 예뻐 보였다. 세수하고 크림이라도 발랐나?

이제부터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지 궁금하였다. 그 여자의 집이 만포진 가는 쪽이니 우리도 그 쪽으로 가면 압록강도 빨리 볼 수 있고 또 그 여자도 집 근처까지 태워다 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날 저녁 우리의 진격 방향은 온정리(溫井里)로 해서 초산(楚山)으로 가기로 이미 결정되었고 아침 08:00시에 출발이라고 했다. 그날 밤 나는 그 여자에게 말했다.     

“아가씨 동무 집에 갈 때까지 우리가 태워주려고 했는데 그렇게 안 되겠소. 차라리 아침 일찍 떠났으면 집에 도착했을 것을 괜히 시간만 낭비했소.”

하니 크게 실망하면서 눈물을 흘린다.

“소대장님 모두 좋은 분인데…. 내가 잡혔을 때 나는 총살당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셨으니 정말 고마워요.” 한다.

나는 그날 밤 약속을 했다. 우리가 압록강까지 가면 통일이 되는 것이니 그때 꼭 너희 집에 찾아가겠다. 그러니 기다리라고 힘을 주어 말했다. 그녀는 이미 성숙한 여자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특유의 토박이 사투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전기불을 덩기불이라고. 마음을 털어놓은 그런 정이 오간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우현령을 너머 초산으로 진격하기 위해 예정대로 출발했다. 여자는 그곳에서 헤어졌다. 일일이 소대원에게 인사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잘 가거라, 아가씨 동무….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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