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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운사 Feb 22. 2023

(14) 궁궐을 주무른 - 김개시

★ 18禁 역사 읽기 ★ (230221)

필자(筆者)는 우리나라 소설가(小說家)나 극작가(劇作家), 드라마 작가들 취향(趣向)이 너무 미녀(美女) 편향(偏向)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남자 작가는 말할 것도 없고 여자 작가들도 역사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의 극본(劇本)을 쓸 때 예쁘고 잘 생긴 여자들만 편식(偏食)하는 것처럼 보인다. 조선시대를 녹신녹신하게 주무르거나 임금을 쥐락펴락하던 여인들 중 장희빈(張禧嬪)·장녹수(張綠水) 등 수많은 왕후(王后) 비빈(妃嬪)들 모두 주인공(主人公)으로 뻔질나게 TV, 영화, 소설에 등장하지만, 이중에 얼굴 못 생긴 여자들 한 명이라도 있는가? 물론 그들이 당시에 가문(家門)도 좋고 얼굴도 잘 생겨서 그 자리에 간택(揀擇)되어서 역사의 몇 페이지를 장식했으니까, 당연히 그들이 주인공으로 많이 캐스팅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얼굴 못 생겨도, 집안이 허름해도 본인의 노력으로 왕실(王室)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정도면 그를 주인공으로 소설(小說)이나 영화(映畫), 드라마를 잘 생긴 여자들 정도로 만들어 줄 수 있는 거 아닐까? 하긴 못 생긴 주인공은 인기가 덜하니 시청률(視聽率)이나 열독률(閱讀率), 관객 동원율(動員率)이 떨어지니 상업적 입장에서 수지(收支)가 안 맞겠지. 그래서 그동안 미디어에서 최고의 주인공(主人公)으로 주목(注目) 받지 못했던 조선의 별 볼일 없는 미천(微賤)한 출신의 김개시(金介屎)라는 여인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김개시(金介屎)에 대한 간략한 소개는 광해군(光海君)에게 총애(寵愛)를 받았으며, 문고리 삼인방(三人幇)의 비선(秘線) 실세(實勢)처럼 국정(國政)에 관여(關與)하고, 매관매직(賣官賣職)을 일삼는 등 권력을 휘두르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인해 참수(斬首)되었다. 그녀는 연산군(燕山君) 때에 흥청(興淸) 출신 장녹수(張綠水)와 함께 조선의 악질적인 궁녀(宮女)로 결국은 드라마 주제가처럼 부귀(富貴)도 영화(榮華)도 한 편의 꿈이 되고 말았다. 말하자면 탄핵(彈劾) 당한 전(前) 박통(朴統) 시절에 국정(國政) 농단(隴斷)의 책임을 물어 형사(刑事) 처벌당한 최모(崔某)씨처럼 용모(容貌)나 교태(嬌態)가 아닌 본인의 짱구를 굴려 왕을 이리저리 요리를 했다는 점에서 특이한 사례이다. 이름이 개시(介屎)인데, 조선시대에는 순 한글 이름인 ‘개똥이’를 한자(漢字)로 표현할 때 개견(犬) 자 대신 음(音)이 같은 개(介) 자와 똥시(屎) 자를 붙여서 기록하거나 호칭하는 게 일반적이다. 광해군(光海君) 때 궁녀가 한글로 쓴 <계축일기(癸丑日記)>에서는 ‘가히’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글의 한자 표기에 대한 사례를 보면, 광해군 재위 중인 1617년에 펴낸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서는 ‘가히’를 ‘가시(加屎)’로 기록했다. 똥이라는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니라 ‘히’ 자의 음가(音價)를 표기한 것 같다. 또 1527년 최세진(崔世珍)이 펴낸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도 ‘히읗’을 시(屎)로 적은 것을 보면 ‘屎(시)’는 ‘히’의 음가(音價)를 적은 것이지, 개똥이나 소똥이를 적은 것이 아닐 것이다. 당시 일반적인 이름표기를 보면,  사람이름에 ‘돌히(乭屎/突屎)·나히(乃屎)·막돌히(莫乭屎)·소히(牛屎)·일히(一屎)·차돌히(次乭屎)’등으로 기록된 것이 많음에서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녀의 이름 ‘개시(介屎)’는 기존에 흔히 알려져 있는 개똥이가 아니라 ‘가히’의 음가인 것이 확실하다. 더구나 남자도 아닌 궁녀(宮女)의 이름이 개똥이라는 건 좀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김개시(金介屎)의 출생 정보는 정확하지는 않으나 아버지는 김씨(金氏)이고, 어머니는 강씨(姜氏)로 나타나 있다. 일설(一說)에는 노비(奴婢) 출신의 소생이라는데 문서(文書) 처리를 잘하고, 상황 판단이 빨라서 왕의 총애(寵愛)를 받아서 국정(國政)을 쥐락펴락했다면 공부를 꾀하여 지식수준이 상당한 것으로 보인다.

김개시(金介屎)는 정확하지 않으나 광해군(光海君)이 세자(世子) 시절에 동궁(東宮)의 궁녀(宮女)로 들어와서, 후에 선조(宣祖)의 궁녀로 발탁되었다. 다시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해서 자신의 궁녀로 한 것으로 여기저기서 기록되어 있다. 이런 기록들로만 보면 부자간(父子間)에 한 궁녀(宮女)를 번갈아 시중들게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역사상 부자간에 후궁(後宮)을 서로 번갈아 시중들게 한 사례가 없지 않으며, 제일 유명한 것이 양귀비(楊貴妃)와 측천무후(則天武后)이다. 양귀비는 당현종(唐玄宗)이 아들로부터 며느리를 빼앗아 마누라로 만들었고, 측천무후는 당고종(唐高宗)이 아비가 죽자 의붓어미를 마누라로 삼은 것이니까 요로꼬롬하다. 광해군(光海君)이 1592년 18살에 세자(世子)에 책봉되었으니, 그 나이면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를 알고 있을 정도가 아니라 철철 넘칠 정도였을 테니까 그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없지는 않았을 거다. 그러다가 어전(御殿)의 궁녀로 영전되어 가지만, 첫 남자를 못 잊어 모든 일에 그를 위해 충성(忠誠)을 다 바친 스토리가 아닐까 생각된다.

김개시(金介屎)의 상황을 유추하자면 대충 이러할 것이다. <계축일기(癸丑日記)>의 기록에, 김개시(金介屎)가 비슷한 시기에 입궁(入宮)한 변상궁에게 “우리는 아이 때부터 함께 살다가 우연히 사이가 멀어진 게 아닌가?”라는 말을 했다니 어린 나이에 입궁(入宮) 한 것으로 보인다. 어릴 때 동궁(東宮) 나인으로 입궐하여, 당시 이미 세자(世子)였던 광해군의 젊은 욕정(慾情)을 받아내는 대상으로서 처녀를 열었을 것이다. 김개시(金介屎)는 얼굴이 피지 않고 그저 그런 용모(容貌)였지만, 똑똑하고 영민(英敏)하다는 평을 들었는데, 글도 잘 알고 문서 처리에도 능숙(能熟)한 역량을 가졌다. 그 능력을 눈여겨본 선조(宣祖)와 신하들이 그녀를 동궁(東宮) 나인에서 선조(宣祖)의 나인으로 뽑아 임금 곁으로 시중을 들게 된 것이다. 이것이 그녀와 광해군의 앞날에 새옹지마(塞翁之馬) 같은 운명의 장난을 맞이하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당시 광해군의 세자(世子) 책봉(冊封)을 두고 정치적 다툼이 심했다. 선조의 정비(正妃) 의인왕후(懿仁王后)가 자식을 낳지 못하자, 어쩔 수 없이 후궁의 서자(庶子) 중에서 왕세자를 선택해야 했다. 선조(宣祖)는 후궁인 인빈김씨(仁嬪金氏)를 총애(寵愛)해서 그녀의 아들인 신성군(信城君)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이미 장성한 여러 왕자들이 있었으나 임해군(臨海君), 정원군(定遠君), 순화군(順和君) 등은 성격상 도저히 불가(不可)하였고, 자질은 광해군이 가장 유력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정실(正室)이 아닌 공빈김씨(恭嬪金氏)의 둘째 아들이고, 더구나 공빈김씨는 세상을 뜬 지 오래되어서 궁궐(宮闕)에서 공식적으로 광해군을 음양으로 후원해 줄 사람이 없었다. 선조(宣祖)는 본인의 출신도 그렇고 해서 계속해서 세자 책봉을 미루고 있었는데, 정철(鄭澈)이 광해군의 책봉을 주장하다가 유배(流配)를 가게 된다. 말하자면 건저의사건(建儲議事件)이다. 이 일로 많은 서인(西人)들이 다치고 세자 책봉은 물 건너가고 말았다. 선조가 광해군이 싫은지 정철이 싫은지, 정철에 대하여 간철(姦澈 : 간사한 정철), 흉철(兇澈 : 흉악한 정철), 독철(毒澈 : 독한 정철)이라고 했다니 역린(逆鱗)을 잘못 건드린 거다.

그러다가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선조는 모든 걸 팽개치고 도망치기 바빴다. 본마누라도 내버리고 아끼는 인빈김씨(仁嬪金氏)와 아들인 신성군(信城君)과 정원군(定遠君)만 데리고 말이다. 그러나 신성군이 피난길에 죽고, 자기는 명(明)나라로 망명(亡命)하고, 국내에서 전쟁을 지휘할 대리자(代理者) 즉 분조(分朝 : 아바타 조정)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래서 선조는 마음으론 싫지만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광해군은 전쟁 중에 선조(宣祖)가 피난 가고 없는 동안 전란(戰亂)을 비교적 잘 수습했다. 얼마나 미웠으면 전란(戰亂)이 끝난 뒤, 피난 중에 병들어 죽은 신성군과 아무 일도 안 한 정원군 등을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추록한 데 반해 광해군은 국물도 없었다. 그리고 말년에 정비(正妃)가 죽자, 51세에 19살짜리 인목왕후(仁穆王后)와 재혼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고, 이 젖도 떼지 않은 아이에게 보위(寶位)를 물려주려고 짱구를 박박 굴리고 있었다. 광해군에게는 중국에서 세자의 고명(誥命)을 받지 못해서 안 된다고 하는 등 왕위의 향방이 오리무중(五里霧中) 일 때 우리의 주인공 김개시(金介屎)의 활약이 새삼 돋보일 수밖에 없다.

정사(正史)와 야사(野史)를 얼버무려 두루뭉수리하게 김개시(金介屎)의 주도면밀(周到綿密)한 업무 처리를 살펴보자. 선조(宣祖)가 말년에 골골하고 있을 때 대권(大權)의 물망(物望)에 오르는 잠룡(潛龍)은 당연 세자인 광해군이지만, 왕과 왕비 및 소북파(小北派)는 어린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擁立)하고자 했다. 왕권 주자들마다 저 잘났다고 기자회견하며 출마선언하고, 출판기념회까지 개최하면서 난리를 치자, 그렇지 않아도 전쟁 후유증과 레임덕 현상으로 국정은 개판이 되었다. 동인(東人), 서인(西人), 대북(大北), 소북(小北) 갈라져서 대신(大臣)들은 요령(鐃鈴) 소리 딸랑거리며 줄 대기, 줄 서기에 바빴던 시절이었다. 눈치 9단에 요령(要領) 9단, 정치감각 9단인 김개시(金介屎)가 곰곰 통박을 굴려보니, 지금 모시고 있는 늙탱이 선조(宣祖)와 영창대군보다는 아무래도 육정(肉情)이 깊었고, 앞날이 훤한 광해군(光海君)이 싹수 있어 보였다. 그래서 은밀하게 선조 몰래 광해군 쪽으로 줄 서기를 했다.

하지만 선조의 방어막(防禦幕)은 의외(意外)로 견고(堅固)했고, 광해군의 한 칼은 이외로 무디어서 눈치만 보다가 낙동강(洛東江) 오리 알 신세가 될 것 같았다. 여기서부터 김개시(金介屎)의 기민성(機敏性), 영리성(營利性), 악독성(惡毒性), 치밀성(緻密性) 있는 추진력이 드디어 김개시 아니 그냥 개시(開始)된다. 강개시(?)였으면 더 세게 밀어붙였을까나?  김개시(金介屎)는 선조와 상대측 대권주자 영창대군이 같이 있는 틈을 타서 약밥을 간식(間食)으로 올리고, 선조는 그걸 먹고 그만 숨을 거두고, 영창대군은 죽지 않는다. 독(毒)을 넣은 건지 무슨 요술(妖術)은 부린 건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정적(政敵)의 선거대책본부장을 한방에 제거한 것이다. 특검이 없어서 모르지만, 이 사건은 김개시(金介屎)가 광해군을 위해 스스로 한 일이지, 광해군이 직접 지시(指示)하거나 간여(干與)한 일이 아니었다. 선조가 최근 병석에서 영창대군이 너무 어려 광해군에게 왕위를 계승시킨다는 교서를 내렸는데, 소북파(小北派)의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이 이를 자기 집에 감추어 두었다가 후에 발각(發覺)되었다는 설(說)도 있다.

아무튼 선조 사망으로 광해군이 즉위하자 궁중(宮中)의 모든 일은 김개시의 손아귀에 넝쿨째 들어왔다. 김개시(金介屎)의 위세는 시쳇말로 박통(朴統) 때의 차지철(車智澈)이나 전통(全統) 때의 전경환(全敬煥)을 뛰어넘는 최고의 왕수석(王首席)이었다. 궁녀들은 김개시(金介屎)에게 뇌물을 바쳐야만 왕과 잠자리를 할 수 있었고, 임금도 김개시(金介屎)가 찍어주는 궁녀와 한 방을 써야 했다. 밤낮으로 최고 울트라 파워를 행사했다. 김개시(金介屎)가 눈을 찡긋 윙크하며 고개를 트는 순간 바로 그녀를 데리고 홍콩 구경을 시켜 줘야 할 정도였다. 비록 야사(野史)이기는 하지만 김개시(金介屎)의 힘을 보여주는 한 대목이 있다. 어쩐 일인지 몸이 후끈 달아오른 김개시(金介屎)가 광해군을 산보 나온 애완견 끌고 가듯 침소(寢所)로 끌고 가다가 박상궁(朴尙宮)에게 그만 들켜 버린다. 너무 어이없는 모습을 본 박상궁이 부왕(父王)의 궁녀로서 부당함을 호소하자 쪽팔림에 얼굴 벌개 진 광해군이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멈칫거렸다. 한바탕 열락(悅樂)의 꿈을 꾸던 김개시(金介屎)가 앙칼진 목소리로 "전하는 저의 은혜를 잊었습니까? 제가 입을 뻥끗하면 그 자리도 결코 무사하지는 않을 터이지요?" 공개적인 한 방에 광해군은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방문을 닫고 이불속으로 스며들었다는 얘기인데, 믿거나 말거나이다. 또 한 가지는 얼굴은 못 생겼지만 기묘한 방중술을 익혀서 김개시(金介屎)의 육정(肉情)을 맛보면 도저히 헤어나지 못했다는 설도 있다.

세상의 모든 이치가 끗발이 세지면 부(富)와 색(色)은 자동으로 따라오고, 돈 발이 세져도 권(權)과 색(色)이 모여드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못 생긴 김개시(金介屎)라고 해서 결코 예외는 아니다. 김개시(金介屎)는 그 당시 최고의 관직(官職) 끗발인 이이첨(李爾瞻)과 한 패가 되어서 날뛰고, 자기 어머니가 개가(改嫁)한 남편 즉 의붓아비인 유몽옥(劉夢玉), 조카사위인 정몽필(鄭夢弼)을 양자로 삼아 벼슬장사로 뇌물 챙기기와 백성 수탈하기를 맡겼다. 그런데 어떤 야설(野說)에 따르면, 이 정몽필(鄭夢弼)의 물건이 천하의 명품(名品) 임을 알게 된 김개시(金介屎)는 밤만 되면 그의 방에 가서 날밤을 새우기 일쑤였는데, 그 소리가 얼마나 요란한지 밖에까지 다 들릴 정도였단다. 급기야 대낮에도 하루 종일 그놈과 틀어 박혀 지냈고, 김개시(金介屎)가 힘이 딸 릴 때는 나이 어린 쭉쭉빵빵 윤소의(尹昭儀)를 넣어주었단다. 그러고는 두 사람이 교접(交接)하는 모습을 보고 흥분하며 좋아했다니, 암스테르담 홍등가(紅燈街)의 성인 실연극장(實演劇場)을 뺨칠 정도였다. 정몽필(鄭夢弼) 이 작자도 웃기는 짬뽕이다. 거기다가 다마를 박았는지, 낙타 눈썹을 끼었는지는 몰라도 당시 김개시(金介屎) 이외에도 궁궐 안의 여자들을 닥치는 대로 농락(籠絡)해 버렸단다. 이 때문에 궁궐 안에는 음란한 추문(醜聞)이 크게 번졌는데도 광해군은 손을 못 댔다.


한 번은 청도(淸道) 현감(縣監) 아무개가 김개시(金介屎)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동안의 고마움에 답례로 진상품(進上品)을 보내니 잘 좀 봐주세요, 그리고 그대와 함께 보낸 그 밤을 잊을 수 없어요."라고 적었다. 그런데 김개시가 실수로 진상품을 이 편지와 함께 왕에게 올려 버렸다. 멍한 광해군은 이걸 보고도 크게 웃고는 표창(表彰)했다는 거다. 믿거나 말거나 이다. 그러니 김개시(金介屎)의 콧대는 하늘 높은 줄 올라가고, 아울러 국정 농단(隴斷)과 매관매직(賣官賣職) 등 온갖 못된 짓에 세월을 잊게 된다. 참의(參議) 이정원(李挺元)이 흉악한 무리들에게 아부하고 이들과 결탁하여 정권을 독차지한 지 7ㆍ8년에 부유함이 왕공(王公)에 비길 만하였다. 위로 감사(監司)ㆍ병사(兵使)ㆍ수사(水使)로부터 아래로 권관(權管)ㆍ찰방에 이르기까지 천냥 백냥 하는 식으로 모두 정해진 액수가 있어 값에 따라 임명하고, 낙점도 또한 이런 액수로 정하였다. 김개시(金介屎)가 붓을 잡고 마음대로 하니 임금도 어떻게 하지 못하고, 6명의 숙의(淑儀)와 10명의 소원(昭媛)들도 머리를 모아 낙점을 애걸할 때에는 김개시(金介屎)가 없는 때를 엿보고, 그녀가 나타나면 흩어졌다. 조정에서 귀양 간 사람에게 은을 바치고 풀려나는 것을 허락하였다. 형조(刑曹)로 하여금 귀양 간 사람들 이름을 나열하여 보고토록 하였다. 그중에서 신흠(申欽)ㆍ서성(徐渻)ㆍ박동량(朴東亮)ㆍ한준겸(韓浚謙) 등은 각각 은 수백 냥을 바치고 석방되었다.

이를 보다 못한 충신들이 직언(直言)을 하지만 정신이 팔린 광해군은 아예 듣질 않는다.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지은 윤선도(尹善道)가 진사 시절인 광해군 8년(1616)에 이이첨(李爾瞻)과 그의 도당들을 처형하라는 장문의 상소(上疏)를 올렸다. 그 내용에 김개시(金介屎)를 구체적으로 적시(摘示) 하지는 않았으나 그녀 역시 이이첨과 한 패이니 간접적으로 언급되었다고 봄이 타당하다. 그 일로 윤선도는 외딴섬으로 안치되고 양부인 윤유기(尹惟幾)도 삭탈관직(削奪官職)을 당했다. 당시 명(明)나라 사신 조도사(趙都司)도 한양에 와서 지은 시가 있는데, 아래와 같은데 춘향전(春香傳)에 나오는 이몽룡(李夢龍)의 시와 비슷하다.

淸香旨酒千人血(청향지주천인혈) / 맑은 향기 맛있는 술은 천 사람의 짜낸 피요.

細切珍羞萬姓膏(세절진수만성고) / 잘게 자른 좋은 음식은 만백성의 기름일세.

燭淚落時民淚落(촉루낙시민루락) / 촛농 떨어질 때 백성들 눈물 떨어지고

歌聲高處怨聲高(가성고처원성고) /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 높도다.

시속(時俗) 말에 ‘역사(歷史)는 밤에 이루어진다.’, ‘역사(歷史)는 남자가 만들고, 그 남자는 여자가 만든다.’는 게 있다.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하긴 서양(西洋)의 역사도 그의 이야기인 ‘History’이지, 그녀의 이야기인 ‘Herstory’가 아닌 걸 보면 말이다. 아무튼 그 당시 조선(朝鮮) 역사의 물꼬를 이리저리 돌리는 중차대(重且大)한 사건의 결정적인 이면(裏面)에 두 사람의 여인이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지금까지 이야기한 김개시(金介屎)이고, 또 다른 한 명은 이여순(李女順)이다. 조선의 3대 반정(反正)으로 집권한 왕이 세조(世祖), 중종(中宗), 인조(仁祖)인데, 앞의 두 반정(反正)은 남자들의 역사이고, 인조반정(仁祖反正)만이 여자들이 개입된 ‘Herstory’ 성격이 강하다. 바로 이 두 여인이 반정의 과정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흐리멍덩한 광해군이 쿠데타 계획을 보고 받았는데도 김개시에게 끝내 눈이 멀어 힘 한번 못 쓰고 왕좌에서 쫓겨난다. 김개시(金介屎) 또한 이 여자에게 꽂혀서 딸처럼 신임하고 의지하면서 벌어진 사단이다. 역사의 이면(裏面)을 야설적(野說的)으로 세밀히 들여다보면, 이 쿠데타는 조선 역사에 보기 드물게 굉장한 성추문(性醜聞)으로 얽혀있다. 요즘도 간혹 강남 무슨 멤버십 클럽에서 이루어지는 스와핑(Swapping)이나 쓰리썸(Three Sum)은 언론에 대서특필(大書特筆)되는 대사건인데, 조선 중기에 이런 사건으로 한양 조정(朝廷)과 전국을 떠들썩하게 하였다니 대단한 선구자임에 틀림없다.

이런 흥미진진(興味津津)한 사건을 내밀하게 한번 들여다보실까? 당시 인조반정을 주도한 이귀(李貴)에게는 이여순(李女順)이라는 딸이 있었는데, 그녀는 김자점(金自點 : 인조반정의 중심인물)의 형인 김자겸(金自謙)에게 시집간다. 이 김자겸(金自謙)이라는 사내가 당시로서는 좀 선구자였나 보다. 그는 주류(主流) 학문인 성리학(性理學)은 도외시(度外視)하고 불란서(佛蘭西)의 불문학(佛文學)이 아닌 유림(儒林)에서 증오하는 석가모니(釋迦牟尼) 불문학(佛門學)에 빠졌다. 당시 찬성(贊成) 오겸(吳謙)의 서얼(庶孼) 아들 오언관(吳彦寬)도 이 불문학(佛門學)에 심취하였고, 어느 정도 성취가 있어서 서로 죽고 못 사는 친구로 지냈다. 김자겸(金自謙)은 아내 이여순(李女順)과 아이도 낳지 않았는지 부실해서 못 낳았는지는 모르지만 그녀를 불문(佛門)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같이 공부하다가 친구 오언관(吳彦寬)이 더 경지가 높다고 셋이서 밤낮 방구석에 쳐 박혀 지냈다. 야설(野說)에는 그들이 얼마나 친했는지 두 놈이 내외를 가리지 않고 생활했단다. 콩도 나누어 먹는데 마누라인들 못 나눌 건가. 즉 이여순(李女順)은 남편과 남편의 친구 오언관(吳彦寬)과 더불어 더블 플레이 및 스와핑 플레이, 쓰리썸으로 상대했다는 거다. 이 여자 역시 어찌나 뜨거운 여자였던지 두 남자가 매일 밤 몇 차례씩 교합해도 전혀 지치지 않고 모두 받아주어 기분을 흡족하게 해 주었단다. 그러다가 남편이 병으로 골골하면서 어느 날 친구 오언관(吳彦寬)에게 자기의 아내를 부탁한다는 유언을 하고 다음날 죽었단다. 그러자 오언관(吳彦寬)이 이여순(李女順)과 전(前) 목사(牧使) 나정언(羅廷彦)의 첩(妾) 정이(靜伊)라는 여자 둘을 데리고 지리산으로 은거(隱居)를 하였다. 정이(靜伊)라는 여자야 그렇다 치더라도 이여순(李女順)은 어엿한 사대부집 미망인(未亡人)으로서 가정을 버리고 외간남성과 산속에서 살림을 하면서 간통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이때 서자(庶子)들의 모임인 강변칠우(江邊七友)가 있었는데, 박응서(朴應犀 : 박순朴淳의 서자) ·서양갑(徐羊甲 : 서익徐益의 서자) ·심우영(沈友英 : 심현沈鉉의 서자) ·이경준(李耕俊 : 이제신李濟臣의 서자) ·박치인(朴致仁 : 박충간朴忠侃의 서자) ·박치의(朴致毅 : 박치인朴致仁의 동생) ·김평손(金平孫) 등 고관들의 서출(庶出) 자제들이 벼슬길이 막혔음을 한탄하며 세상을 증오하여 약탈과 도둑질을 하는 등 패악(悖惡)을 저질렀다. 오언관(吳彦寬)이 이들의 일당으로 오인(誤認)되어 산음현(山陰縣 : 지금의 경남 함양)에서 체포되어 결국은 광해군이 친국(親鞫)을 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이상하게 1남 2녀가 산속에서 같이 기거하니 모두 색안경(色眼鏡)을 끼고 볼 수밖에 없었을 거다. 문초(問招)를 하면서 점점 더 드러나는 사실로 조정은 혼란에 빠졌다. 남자는 고관(高官)인 찬성(贊成)의 서자(庶子)이고, 여자도 엄연히 사대부인 이귀(李貴)의 딸, 목사의 첩인데 서로 한 집에서 상호 간통하고 생활했다니 세간이 시끄러운 것은 당연했다. 당시 지방관이었던 이여순(李女順)의 아버지 이귀(李貴)도 탄핵 상소를 받고, 오언관(吳彦寬)은 이름으로 쓸 수 없는 글자인 선조(宣祖)의 이름인 ‘연(昖)’자로 개명(改名)을 했다 하여 두 가지 죄목으로 의금부(義禁府)에서 국문(鞫問) 당하다가 죽었다.

이여순(李女順)은 국문(鞫問) 당시 간통을 하지 않고 불문(佛門)의 공부만 하였고, 세 사람 진술이 모두 같아서 극형에 처하지 않고 궁노비(宮奴婢)로 천역(賤役) 되었다. 그때 그녀가 지은 시(詩)가 아래와 같다.

至今衣上汚黃塵(지금의상오황진) / 이제 와서 가사 저고리가 누런 먼지로 욕을 보는데

何事靑山不許人(하사청산불허인) / 어인 일로 푸른 산은 이 사람을 받아주지 않았는지

寰宇只能囚四大(환우지능수사대) / 임금이 다스리는 곳은 내 육신을 가둘 수 있을 뿐

金吾難禁遠遊神(금오난금원유신) / 의금부가 높은 곳을 노니는 내 정신을 금할 수는 없네.

필자(筆者)가 보기에 상당히 정신적인 고수(高手)의 시(詩)이다. 사대(四大)는 불가(佛家)의 《원각경(圓覺經)》에서 말하는 지(地)ㆍ수(水)ㆍ풍(風)ㆍ화(火)를 나타내는 말로 곧 사람의 인체를 말하며, 사람이 죽으면 각각 그 유(類)에 따라 네 가지로 흩어진다고 한다. 환우(寰宇)는 천자가 다스리는 땅으로 인간세상을 말한다. 금오(金吾)는 의금부의 다른 표현이다. 즉 당시 법과 제도가 내 몸은 어찌할 수 있지만, 내 정신은 내 맘 대로할 수 있다는 뜻이다. 득도(得道)한 사람의 경지이다.

그 후 궁중에서 노비(奴婢)로 지내다가, 세월이 흘러 어찌어찌하다가 이여순(李女順)은 궁중의 실권자인 김개시(金介屎)와 선이 닿게 된다. 김개시(金介屎)와 끈이 닿은 그녀는 행여 이 동아줄을 놓칠세라 온갖 정성을 바쳐서 신임을 듬뿍 받는다. 급기야 그녀는 김개시(金介屎)와 모녀의 의를 맺기에 이르렀고, 기회 있을 때마다 김개시(金介屎)에게 귀엣말을 해댄다. “불법을 믿으세요. 우리 아버지는 이귀(李貴)와 죽은 남편의 형 김자점(金自點)은 진짜 충신입니다.”라고 세뇌(洗腦)시킨다. 이를 곧이곧대로 믿은 김개시(金介屎)는 또 광해군에게 침 튀기며 옮겨대고, 김개시(金介屎)라면 껌뻑 죽는 광해군은 모든 걸 믿는다. 결국 이귀(李貴)와 김자점(金自點)은 타도(打倒) 대상인 광해군의 보호를 받으며 쿠데타를 진행한 셈이었으니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인조반정이 일어나기 전 수차례에 걸쳐 반정이 있을 거라는 밀고(密告)가 의금부에 접수됐었고, 광해군에게 상소(上疏)도 수차례 올라와서 그도 주모자(主謀者)들을 소환하라고 명령까지 내렸다. 그러나 그때마다 김개시(金介屎)가 적극 변론에 나서며 “가짜 뉴스에 속지 마세요. 민심(民心)은 우리 편입니다. 마녀 사냥식의 여론에 속으시면 아니 되옵니다.”라고 반정 세력을 두둔했다. 아무 물정 모르는 광해군은 “그래? 가짜 뉴스만 듣고 특검팀을 꾸리면 국고(國庫)만 낭비하고 백성들의 조롱거리가 되겠지? 나 같은 성군(聖君)에게 누가 감히...?”라며 더 이상의 수사를 하지 않고 세월아 네월아 술잔치 벌이다가 사달이 나게 된다. 쿠데타 그날도 김자점이 성대한 주찬을 마련하여 김개시(金介屎)에게 바쳤기 때문에 광해군이 궐에서 한창 궁녀들과 연회를 열어 즐기고 있었다. 그 무렵에 고변하는 글이 올라갔으나 일부러 그대로 두고 보고하지 않았다. 날이 저물어 대궐 문이 닫히고 밤이 되자, 장단부사(長湍府使) 이서(李曙)가 군사를 이끌고 와서 이괄(李适)의 지휘를 따라 창의문(彰義門)을 부수고 들어왔다. 광해군은 도망가고, 입직 중인 모든 관리들도 도망쳤으며, 이튿날 광해군을 민가(民家)에서 찾아서 폐위(廢位)시켰다. 광해군이 자기 무덤을 파는 줄도 모르고 김개시(金介屎)를 옆에 둔 이유는 두 가지 정도로 생각된다. 첫째는 사춘기(思春期) 때인 세자 시절에 여체를 알게 해 준 육정(肉情)의 첫사랑으로 맺은 인연이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서 그 끈을 쉽사리 끊지 못하였을 것이다. 둘째는 궁중 내외에서 일어나는 대소사에 대한 정확한 정보(情報)를 은밀하게 알려주는 충성스럽고 똑똑한 보좌진(保佐陳)이 필요해서였다. 셋째, 대권 도전 정국(政局)에서 기대 곳이 없는 외로운 처지에 자신의 즉위(卽位)에 가장 큰 공헌(貢獻)을 한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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