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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운사 Mar 02. 2023

(15) 로마를 위협한 아랍의 클레오파트라 – 제노비아

★ 18禁 역사 읽기 ★ (230302)

시리아의 수도인 다마스쿠스(Damascus)의 북동쪽으로 사막(沙漠)을 가로질러 이라크의 수도인 바그다드(Baghdad)는 직선거리로 약 600㎞다. 두 도시사이는 온통 사막지대뿐인데 이러한 사막의 한가운데, 정확히는 약 230여 Km 지점에 오아시스 도시 팔미라(Palmyra)가 있다. 이곳은 동서양의 상업 중심지이자 중요한 문화 중심지 중 하나로, 대도시의 기념비적인 유적(遺蹟)이 남아 있는 곳이다. 팔미라는 오늘날도 에프카(Efqa)라고 불리는 샘에서 끊임없이 물이 솟아나고 있다. 팔미라의 원래 이름은 성서에도 나오는 타드몰(Tadmor)인데 이는 고대 셈족어로서 야자수(椰子樹)라는 의미다. 성경(聖經) 역대하(歷代下) 8장 4절에 “솔로몬이 광야에서 타드몰을 건축하고....”라고 되어있다. 상식 문제하나 내볼까? 야자수(椰子樹)와 코코넛(Coconut)과 팜(palm)은 서로 다른 식물인가? 모두 같은 종류인데 지역에 따라 이름을 달리 부르는 것이다. 스페인 사람은 코코넛(Coconut), 유럽에서는 팜(Palm), 중국에서는 야자(椰子)라고 부른다. 야자수의 종류로는 제주도에서 흔히 가로수로 심는 카나리야자(Canary date palm), 열매껍질에서 코이어(Coir)라는 섬유를 얻을 수 있는 코코야자(Coconut palm), 과육(果肉)에서 팜유와 커널유를 얻을 수 있는 기름야자(Oil palm), 열대(熱帶) 지방에서 가로수로 흔히 심는 대왕야자(Royal palm), 한그루에서 매년 250kg의 열매를 생산하는 대추야자(Date palm) 등이 있다. '코코'는 스페인어로 '도깨비, 유령'을 뜻한다. 스페인 군대가 필리핀을 점령(占領)하러 왔을 때, 야자수에 매달린 열매를 보고 사람의 해골(骸骨)인 줄 알고 식겁(食怯)했다는 전설이 있긴 하다.

따라서 팜(Palm)이 많이 자라는 땅이라는 뜻에서 팔미라(Palmyra)라고 불렸다. “뜨거운 모래사막 한가운데 땅 속에서 솟아오른 듯한 환상적(幻想的)인 도시 팔미라.” 추리작가 아가사 크리스티(Agatha Christie)가 팔미라를 방문한 후 그곳에 매료(魅了)되어 묘사(描寫)한 구절이다. 시리아 사막 교통의 요지(要衝地) 요 오아시스여서 기원전 수세기 전부터 도시 발달의 기틀을 다져왔던 팔미라는 "사막의 초록 궁전(宮殿)"이라고 불렸다. 실크 로드를 따라 여행하던 캐러밴이 머물러 쉬어 가는 중요한 장소인 팔미라는 찾아오는 사람들의 마음을 경이에 찬 감동과 찬탄(讚歎)으로 채워주고 있었다. 당시 이집트를 잡아먹고 주변 아시아를 병합(倂合)하며, 로마와도 맞짱을 뜰 정도로 위세를 떨쳤던 사막의 도시국가 팔미라. 이 도시국가를 이끌었던 사람은 여왕 "제노비아(Zenobia)"였다. 오늘날 갖가지 여성 제품의 브랜드로 잘 알려진 제노비아(Zenobia). 사실 공식 이름은 셉티미아 제노비아(Septimia Zenobia)이고, 직함(職銜)은 왕후, 섭정 왕태후로 아들을 대신하여 거의 여왕처럼 통치를 하여서 그렇게 불렸고, 막판에 공동 여제(女帝)로 즉위하였으나 로마에 패하여 생을 마감한다. 오리엔트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가장 고귀하고 강한 여왕이라는 칭송을 받는 여인 제노비아다. 그녀의 아버지는 사막 집시의 호족(豪族)이고, 어머니는 이집트인이었다. 아버지로부터는 아랍인 특유의 청갈색 피부를 받았고, 어머니를 닮아 이집트풍의 새까만 눈동자가 매력이었다고 한다. 치아(齒牙)는 진주(珍珠)와 같이 희고, 커다란 검은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목소리는 맑고, 허리힘은 세고, 껴안고 싶어지는 상냥함을 가졌단다. 체력도 강해서, 말을 타지 않고 도보(徒步)로 몇 시간 동안 병사들과 행군을 할 정도였다. 승마(乘馬)가 아니라 낙타 타기와 수렵(狩獵)에 능숙했고, 이집트어, 라틴어, 그리스어, 시리아어를 구사했고, 고전을 배우는 동안 클레오파트라에 심취하여 자신을 클레오파트라의 후손이라 믿었다. 하긴 어머니가 이집트 여인이었으니까. 팔미라의 통치하면서 신 플라톤 학파 카시우스 롱기누스(Cassius Longinus)를 고문(顧問)으로 두어 플라톤과 호메로스에 정통했다. 그는 당시 살아있는 도서관이자 걸어 다니는 박물관이라고 불리었다.

제노비아의 미모는 어릴 때부터 소문이 자자(藉藉)해서 클레오파트라를 트럭으로 데려와도 안 바꾸어 준다고 할 정도였다. 그런 소문은 아라비아의 대상(隊商)들의 입소문을 타고 넓게 퍼졌을 것이다. 그녀는 미모만 뛰어났던 게 아니었다. 어떤 사내들보다도 낙타(駱駝)를 모는 기술이 뛰어나서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대신해서 집시부족의 지도자가 되었다. 당시 팔미라는 로마제국의 보호 아래 동서교역의 중간지로 크게 번성하고 있었으며, 아름답고 웅장(雄壯)하기로 세계에서 손꼽히는 융성(隆盛)한 도시였다. 그런데 이 도시를 호시탐탐(虎視眈眈) 침 흘리며 노리는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페르시아다. 로마의 속주(屬州)였던 팔미라는 통행료와 관세 등을 징수해서 경제적으로 매우 강성했고, 페르시아 사산 왕조의 황제 샤푸르 1세가 팔미라 북쪽으로 침략하자 로마제국의 황제 발레리아누스가 대항(對抗)하여 전쟁을 벌였으나 생포(生捕) 당하는 수모(受侮)를 겪고 패했다. 당시 로마 제국은 군인 황제들의 난립과 잇따른 내전으로 인해 브리타니아와 갈리아, 히스파니아에 걸쳐 갈리아제국이라는 서쪽 지방정권이 들어서서 황제를 참칭(僭稱)할 만큼 어지러운 상황이라, 동쪽 지역을 잘 관리할 엄두를 못 낼 사정이었다. 그런 와중(渦中)에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가 포로로 잡혀 갔다가 죽고, 팔미라의 통치자 오다에나투스(Odaenathus)가 로마를 대신하여 페르시아의 샤푸르 1세를 기습하여 팔미라로부터 도망가게 만들자, 로마제국은 그를 동방(東邦) 총독(總督)의 직위에 임명하여 어느 정도 자치권을 주게 된다.

그러자 당근 팔미라에는 자유를 꿈꾸는 독립심이 생겨나는데, 로마제국의 대리인으로 팔미라를 통치하고 있었던 오다에나투스는 그중에서도 탁월(卓越)한 독립군의 리더였다. 오다에나투스는 매일 성 밖 사막에서 독립군을 몰래 양성시키고 있었는데, 어느 날 낙타를 기똥차게 모는 사람을 발견하고 다가가 보니 남자가 아니고 헐 여자였다. 그것도 너무나 아름답고 매혹적(魅惑的)인 여인 제노비아였다. 둘은 첫 만남에서 뿅 하고 사랑을 느꼈고 곧바로 결혼을 하게 된다. 물론 오다에나투스는 첫 결혼이 아니고 제노비아와 두 번째 결혼이다. 전처와의 사이에 하이란 1세라는 아들도 있었다. 첫 부인을 상처(喪妻)하고 옆구리가 허전하였는데 웬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 온 것이다. 오다에나투스도 팔미라의 1등 신랑감인데, 그가 집시부족 촌닭과 결혼한다는 분홍빛 소문이 돌자, 팔미라의 쭉빵 귀족 걸들이 부러움 반 시샘 반으로 구경 왔다가 제노비아를 보고 그만 꼬랑지를 내리고 뒷걸음쳤단다. 그 길로 성형외과에 줄을 섰다는 유언비어-뉴스의 보도가 연일 톱 기사였다나 뭐라나.

그녀는 남편을 도와 독립군 양성에 열정을 바쳤는데, 지모와 지혜, 전략 또한 대단해서 휘하(麾下) 장군들도 고개를 숙였다. 귀족 부인들이 삼삼오오로 떼 지어 카바레, 호스트바, 마사지 크리닉, 에스테딕 다닐 때 그녀는 여전사로 독립군과 함께 야영(野營)하며 군사작전에 참여하였다. 그녀가 남편 대신 독자적인 지휘권을 가지고 페르시아 군을 대파(大破)하자 시리아 사막 인근의 나라들이 줄지어 팔미라에 편입을 요청하여 그 지역 인근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강국으로 부상하였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나 할까. 팔미라의 국운(國運)이 상승일로(上昇一路)에 있을 때 남편이 조카인 마에오니우스(Maeonius)에게 암살당하게 된다. 전처(前妻)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 하이란 1세도 같이 살해당한다. 마에오니우스의 궁정(宮廷) 쿠데타를 제압한 제노비아가 팔미라를 실질적으로 통치하게 된다. 자신과 오데나투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바발라투스(Vaballathus)를 팔미라의 왕으로 앉히고, 그에게 로마 황제 칭호를 붙여주기까지 했다. 물론, 팔미라의 실권은 제노비아 자신이 쥐고 있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제노비아의 음모라고도 하지만, 어쨌든 이를 계기로 제노비아는 스스로 절대군주가 되어 "동방의 여왕"이라는 칭호(稱號)를 얻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정권을 잡으면 초기에 뭔가 폼 나는 업적을 남기고 싶어 한다. 평소 활달한 성격과 신체조건으로 싸움이 하고 싶어 좀이 쑤셨던 제노비아는 그 제물로 이집트를 점찍고 병사 7만 명을 투입해 단 한 번의 싸움으로 이집트를 수중에 넣고 총독을 살해한다. 자기의 얼굴과 이름을 새겨 넣은 주화(鑄貨)를 발행하기도 한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기축통화국(基軸通貨國)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그리고는 하얀 낙타 등에 올라타 보랏빛 외투를 휘날리며 선두 지휘하는 그녀에게 시리아, 팔레스티나, 아나톨리아 등의 국가들이 무릎을 꿇고, 그녀를 최고 군주로 받아들였다. 물론 직접적인 군사 지휘는 그녀가 아니라 자브다스(Zabdas)라는 장군이 맡아서 했다. 하지만 유능한 인물을 적재적소(適材適所)에 배치하는 것도 통치자의 능력이니까. 기원후 270년, 로마제국은 자기네 영토의 상당 부분을 그녀에게 빼앗겼는데, 아랍의 조그마한 도시의 한 여성이 이만큼 넓은 영토를 전쟁승리로 차지한 예는 전무후무(前無後無)하다. 이 시대가 로마제국이 삼등분된 삼국지(三國志) 소설처럼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지나친 야심(野心)은 팔미라의 몰락(沒落)을 가져오는 비극의 원인이 되었다. 서기 272년 그녀가 아들에게 로마황제의 칭호를 수여하고 자기도 여황제로 공동 황제를 자칭(自稱)하자 가뜩이나 심기 불편한 로마 제국이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다. 로마는 극심한 군사 정쟁(政爭)을 치르고 군인 출신인 아우렐리아누스가 황제가 되었다. 그는 1차적으로 이집트를 점령한 다음 소아시아와 시리아로 원정대(遠征隊)를 파견하였다. 그녀는 팔미라를 정복하러 온 헤라클리아누스의 로마군을 몇 번이나 격파(擊破)하고, 유럽으로 쫓아 보냈을 정도로 군사적 능력도 걸출(傑出)했다. 하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로마제국은 거대하고 군대 또한 대규모였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친히 군대를 이끌고 팔미라로 진군(進軍)해서 팔미라를 포위한다. 수세에 몰린 제노비아는 극적(劇的)으로 포위망을 뚫고 팔미라를 빠져나와 페르시아에게 원군(援軍)을 요청하려 유프라테스강을 건너려는 순간  뒤쫓아 온 로마 기병대(騎兵隊)에 붙잡히고 만다. 당시에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팔미라를 관대(寬待)하게 대했으며, 태양의 신전을 비롯한 막대한 노획물(鹵獲物)을 거두어 갔지만 제노비아를 죽이지 않고 포로로 끌고 갔다. 그리고 몇 달 후에 팔미라 사람들이 로마의 수비대를 학살(虐殺)했다는 소식을 듣자 황제는 다시 군사를 돌려 팔미라에 보복(報復)을 가했다. 로마인들은 팔미라 주민들을 한 사람 남김없이 죽이거나 노예로 끌고 가고, 궁전(宮殿), 사원(寺院), 성벽(城壁), 원주(圓柱), 회랑(回廊) 등을 부수어 버렸다고 한다. 당시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도시 팔미라는 이렇게 스러졌다. 제노바아의 최후에 대해서는 설(說)이 분분(紛紛)하다. 팔미라가 모조리 파괴됐다는 충격에 단식 끝에 숨졌다고도 하며, 로마황제가 개선행진(凱旋行進) 할 때 그녀를 전차(戰車) 뒤에 묶어 끌고 다니며 조리돌림을 했다고도 하고, 로마의 용서를 받고 로마 귀족의 부인으로서 만인의 우러름 속에 로마의 근교 티볼리에서 천명(天命)을 다했다고도 한다.

로마의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팔미라의 여왕 제노비아를 패배시킨 후에 로마로 돌아가서 태양 신전(神殿)을 지었다. 그 신전 안에 팔미라에서 가져온 태양 신상(神像)을 들여놓았다. 영국에서 발행되는 역사잡지 <History Today> 지(誌)는 팔미라와 제노비아에 대한 역사를 논하면서 이렇게 기술했다. “아우렐리아누스가 취한 모든 조처 중에 가장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아마 기원 274년에 동지(冬至)인 12월 25일을 연례(年例) 태양축제일(太陽祝祭日)으로 정한 일일 것이다.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교국이 되자, 오래전부터 그 축제를 즐겨 온 사람들이 이 새로운 종교를 보다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탄생일을 그 날짜로 바꾸었다.” 오늘날 사람들이 예수 탄생일(誕生日)이라고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것이 결국 제노비아 여제(女帝)로 부타 기원(紀元)되었다니 참으로 제노비아의 영향력이 크다는 생각이 든다. 믿거나 말거나의 설화(說話)도 있다. 2차 세계대전 전(前) 시리아는 프랑스 통치령으로써, 프랑스 외인부대가 주둔(駐屯)하고 있었는데 부대원들의 말에 따르면 시리아인들은 날이 저물면 결코 팔미라 폐허(廢墟) 근처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긴 외투를 걸치고 낙타 등에 올라탄 제노비아의 망령(亡靈)이 어슬렁거리다 길가는 사람을 만나면 검은 눈동자로 뚫어질 듯 바라보면서 로마군을 물리쳐 달라고 간청(懇請)한다는 전설이 있기 때문이란다.

16만 평에 달하는 거대한 유적(遺蹟)이 세계사에서 자취를 감춘 것은 11세기였다. 이 지역을 강타(强打)한 지진으로 완전히 매몰(埋沒)돼 버린 것이다. 1930년 프랑스 탐사가에 의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팔미라는 아직 발굴 중이며 어디까지 얼마나 발굴해야 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돌기둥으로 이어지는 옛 도로를 따라 걷다 보면 역사를 로마시대로 돌려놓은 듯한 착각에 빠진다. 계획도시 같은 장방형(長方形) 길에는 극장, 신전, 시장, 목욕탕 등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다. 로마시대의 석조(石造) 원형극장은 현대의 오페라 극장과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정교(精巧)하고 공명(共鳴)이 잘 되도록 설계됐다. 또 회합장소였던 아고라는 당시 토론문화가 얼마나 발달됐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시기별로 묘지문화가 달리하여 묻었는가 하면 석조관 무덤, 공동묘지, 탑으로 된 무덤 등 다양하다. 어찌 되었든 팔미라는 솔로몬이 노래한 대로 ‘잠시 있다 사라지는 안개 같은 인생’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유적의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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