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대회가 끝난 날의 저녁에는 이른 저녁 식사를 하고 평양의 대동강 능라도(綾羅島)에 있는 5.1 경기장에서 열리는 <아리랑> 공연을 보기로 했다. 5.1 경기장은 노동절을 기념한 노동자경기장인데, 수용인원이 15만 명가량 되는 매머드급 경기장이라고 한다. 이 경기장에서 2005년 광복절부터 그들의 노동당 창당일인 10월 10일을 지나 17일까지 매일(일요일 제외) 1시간 20분씩 공연인원 7만여 명이 동원되는 매머드급 매스게임과 카드섹션을 하는 것이다. 2002년 김일성 생일에 맞추어 기획된 것인데, 지금은 연중행사로 공연을 한다. 그냥 저녁 먹고 맥주나 한 잔 하고 쉬려고 하는데, 북측의 안내와 강권(强勸)에 못 이겨 보러 가기로 했다. 처음 공연이 무료인 줄 알았는데, 요금이 상상보다 비쌌다. 특석이 300유로, 1등석이 150유로, 2등석이 100유로, 보통석이 50유로였다. 너무 비싼 것 같아서 2등석인 100유로짜리로 예약했다. 경기장에 가서 보니까 특등석은 로열박스에 있는데 탁자와 안락의자가 배치되어 있고 음료를 제공하고 있었다. 1등석과 2등석은 특석을 중심으로 주변에 배치를 했는데, 1등석과 2등석의 차이는 없어 보였다. 자리 위치가 관람석 제일 중앙이라서 공연을 전체적으로 보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2등석과 보통석 사이에는 왕래하지 못하게 경계줄을 세워서 구분하여 놓았고, 보통석에는 북한 주민들이 가득 참석하고 있었다.
<연꽃 또는 UFO 모습의 능라도 경기장>
<아리랑 공연 시작전, 보이는 글씨가 카드섹션 모습>
<아리랑 공연 모습 : 일출 모습 등이 동영상 모양으로 연출됨 >
상상 외로 많은 인파가 몰려왔다. 평양 시내에서 능라도로 들어가는 길이 관광버스로 긴 줄을 이루고, 경기장의 주차장도 버스들로 만원이다. 외국인들도 가끔 있지만 북측 주민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안내원의 말로는 북한 주민은 평생에 한 번은 이 공연을 보아야 한다고 했다. 실제로 북측 인민의 15% 정도는 이 공연을 본다고 하는데, 지방에서 버스나 기차를 타고 단체로 와서 이 공연을 본단다. 보고 나서 여관이나 친척집에 자고 가거나 가까운 지역 사람들은 밤에 다시 내려간단다. 경기장은 우리의 잠실 주 경기장 보다 두 배는 커 보였다. 하긴 그들이 우리의 88 올림픽을 보고 경쟁심에서 15만 명(2014년에 재건축하여 114,000명으로 축소됨)을 수용하는 8층 높이의 거대한 16개의 철근 콘크리트 아치를 세워 건설한 것이란다. 전체적으로 보면 대동강에 피어 있는 연꽃 모양을 형상화한 것처럼 보이는데, 보기에 따라서 미확인 비행물체인 UFO처럼 보이기도 한다. 타원형의 경기장 관람석 중 긴 쪽의 한편을 거의 카드섹션 학생들이 차지하고, 나머지 부분만 관람석이다. 이곳에서 북측이 자랑하는 <아리랑>을 공연하는데 공연에 동원되는 인원이 7만 명이란다. 카드섹션에 동원된 학생이 5만 명, 운동장에서 공연하는 사람이 2만 명이라니 정말 세계 최대의 공연 행사일 것이다.
<북한의 한복 입은 공연장 안내원>
<북한 측 사람에게 카메라를 맡겼더니 손이 흔들려서...>
<평양 개선문 모습>
<그들의 수령 찬양이 공연 내내 이어진다.>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자, 우리의 좌석이 있는 중앙 스탠드의 맞은편에 5만 명의 카드섹션 인원들이 바늘 틈 없이 붙어 앉아서 카드 섹션의 예행연습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운동장의 바닥에도 공연 마스게임이나 다른 공연을 준비하는 모습이 보였다. 안내원의 설명에 따르면, 공연의 주 테마는 해방 전에 어려웠던 시기에 아리랑을 부르면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거나 만주로, 일본으로 끌려가는 고난을 당하다가 김일성의 민족 해방 투쟁에 힘입어 광복이 되고, 그의 탁월한 영도력으로 나라와 경제가 발전하며, 모든 인민들이 행복해지는 그런 것을 그린 것이다. 그러면서 사회 각 분야의 발전상과 위대한 지도자의 영도력을 춤과 마스게임, 카드섹션, 음악, 특수 조명, 특수효과 등을 총 동원해서 표현하는 것이다.
공연은 본장(本章) 4개와 서장(序章), 종장(終章) 등의 13개 경(景)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구슬픈 아리랑 가락이 흐르면서 일제 말기 식민생활의 핍박에서 고향을 뜨는 줄거리로 시작한다. 그러다가 그들의 위대한 수령인 김일성의 항일운동, 해방, 외세 침입, 경제 및 과학 발전, 나아가서 통일조국 달성.... 등등 위대한 수령의 품에서 행복하다는 투다. 그들은 “대집단체조와 예술 공연 아리랑은 조선의 명곡들과 아름답고 우아한 민족무용, 매력 있는 집단체조와 교예, 황홀한 배경 미술 등이 동원된 종합적 대예술작품으로 동서고금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현대적 대걸작이자 21세기 대표 본보기 작품”이라고 선전했다. 우리들이 보기엔 너무 기계적이고 도식적인 맛이 강하고 예술성은 훨씬 떨어진다고 보였다. 연습을 위해 수개월간 고생한 학생들의 땀과 눈물의 결실이라 생각하니 가슴 아픈 광경이었다. 어린 학생들이 매일 오후 4시 이후부터는 물도 제대로 못 마시고 공연이 끝날 때까지 견뎌야 하는 것이다. 바닥의 무대 공연자들은 들락날락하면서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으나, 카드섹션 학생들은 공연이 끝날 때까지 화장실 이용이 불가란다. 정말 비인간적인 학대성 공연이라고 본다.
<죽은 수령 김일성의 모습 재현>
<우리의 통일벼 같은 종자혁명 선전>
카드섹션은 정말 거의 예술에 가까웠다. 카드섹션이 글자나 모양만 만드는 게 아니고, 스토리를 구성하는 동영상을 구현하였다. 거기에 또 레이저 조명을 쏘아서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운동장의 각종 공연이나 마스게임도 카드섹션과 조화를 이루어 거대한 뮤지컬을 보는 것 같았고, 공중 곡예와 기예 또한 수준급이었다. 공연은 모두 3막(幕) 또는 장(章)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장막(章幕) 마다 3~4개의 경(景)으로 이어지는 스토리였다. 북측의 최고 공훈예술가들이 참여하여 만든 것이란다. 8시 30분에 공연이 시작되어 10시까지 이어졌다. 우리 일행 중 특석 입장권을 구매한 사람들은 특별석에 과자와 음료수가 제공되었다. 그들이 나누어 주는 것으로 같이 간식을 들며 공연을 보았다. 북한 주민들도 나름 차려입고 공연을 즐기고 있었다. 그들과 스스럼없이 대화도 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조국이 하나라는 뜻을 말하지만....>
우리 측과 북측 사람들의 상호 대화도 통제하지 않고, 사진 촬영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특별석 출입구로 나오는데, 경기장 출입문에서 당시 MBC 최문순(나중에 강원도 지사 역임) 사장을 만났다. 서로 얼굴을 마주치고 깜짝 놀라서 어인 일이냐고, 세상이 참으로 좁다고 한 마디씩 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경쟁사 사장을 아무도 예견치 못할 평양에서, 그것도 능라도 아리랑 공연장에서 조우할 줄이야. 서울 가서 자기를 여기서 보았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제는 말해도 될 것 같다. 한꺼번에 수많은 인파들이 능라도로 모이는 관계로 경기장을 드나들 때 매우 혼잡하고 막혔다. 평양 체류 5일 만에 교통 체증이 생기는 걸 처음 보았다. 호텔로 돌아와서 평양에서의 마지막 밤을 그냥 보낼 수가 없어서 방송 중계팀들을 전부 모아서 호텔 바(Bar)에서 평양 맥주와 북측이 자랑하는 해구신으로 만든 “령정”이라는 45도짜리 술로 폭탄을 만들어 마시며 그간의 노고를 위로했다. 북측의 아태위와 민화위 관계자들도 불러서 같이 술 한잔하면서 다음에 서울에 오면 남측 술로 폭탄을 나누자고 했다. 그들도 아쉬워하고 우리도 아쉬워하면서 보낸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