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는 오언절구(五言絶句)로 구체시(舊體詩)에 해당한다. 을지문덕이 활동하던 시기는 아직 당나라의 근체시(近體詩)가 제대로 정립되기 전이다. 근체시(近體詩)는 구체시(舊體詩)에 비해 압운(押韻)과 평측(平仄)이 엄격하게 지켜지는 형식인데, 이 시는 오언절구(五言絶句) 고유의 평측(平仄)도 없고, 압운도 측성(仄聲)인 상성(上聲)으로 되어 있다. 위 시에 표기된 ○는 평성(平聲)이고, ●은 측성(仄聲)이다. 기승전결(起承轉結)의 4구 중 승구(承句)의 마지막 자(字) 리(理)와 결구(結句)의 마지막 자(字) 지(止) 자(字)가 운(韻)이며 지(紙) 자(字) 운목(韻目)에 속한다. 절구시(絶句詩)의 대부분 평성(平聲) 압운(押韻)을 하는데, 이 시의 경우 상성(上聲) 압운(押韻)을 한 것이 특색이다.
★ 을지문덕(乙支文德) : 고구려 영양왕(嬰陽王) 23(612)년 때 수나라와의 살수대첩을 성공한 장수. 생년과 몰년 모두 미상이며, 심지어는 관직(官職)까지도 불분명하다. 612년 수나라의 양제(煬帝)는 113만의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육군은 40개의 부대로 편성하였는데, 각 부대를 군(軍)이라고 하였다. 우중문(于仲文)과 우문술(宇文述) 등은 40개의 군 중에서 9군을 지휘하였다. 9군의 병력 수는 30만 5천 명이었다. 출발할 때 인마(人馬) 모두 100일 치의 식량을 지급받았다고 한다. 별도의 군수 보급 없이 압록강 서쪽까지 빠른 속도로 행군하도록 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무게를 못 이긴 병사들이 식량과 무거운 장비를 버리고 땅에 묻곤 했다. 우중문 진영을 찾아가 거짓 항복을 꾸며 말하면서 그들의 동태를 살피고,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도망하여 연신 거짓 패배로 우중문의 추격을 7월 24일에 살수(薩水)까지 유도하였다. 이 시기에 우중문에게 이 시를 보냈다고 한다. 살수에서 대승을 거두고 수나라 군대를 추격하여 섬멸하여 2,700여 명만 살아 돌아갔다. 당시 동아시아 최대의 국제전(國際戰)으로 중국의 주인이 수(隨)에서 당(唐)으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