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는 발해(渤海)의 문신 왕효렴(王孝廉)이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돌아오기 전에 지은 시이다. 문화적으로 고려의 문학 작품은 많은데, 발해의 문학 작품은 국내에 현존하는 게 드물고, 이 시를 포함하여 발해인들의 시는 일본 문헌에 남아있다. 814년에 파견된 정사(正使) 왕효렴(王孝廉 : 5수)과 부사 고경수(高景秀) 및 녹사(錄事) 석인정(釋仁政) 등이 남긴 시 9수가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등에 총 12수가 전한다. 당시의 일본 측의 칙사(勅使)는 성상금계(城上金繼)와 자야정왕(滋野貞王)이었다. 왕효렴은 이듬해 귀국하다가 병으로 사망하여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왕이 정3위(正三位)의 벼슬을 추증하였다. 출운주(出雲州)는 일본의 시마네현 동부에 있는 도시인 이즈모(出雲)이다. 당시 사신들이 이곳으로 입출항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는 칠언절구(七言絶句)로 평기식(平起式)이다. 압운(押韻)은 정(情), 정(亭)이고 청목(靑目)이다. 근체시(近體詩)의 평측(平仄)을 비교적 잘 준수한 것으로 보아 그 시대 발해에도 당(唐) 나라의 문학이 많이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왕효렴(王孝廉) : 발해 제8대 왕 희왕 때의 태수이다. 814년 부사 고경수(高景秀)와 함께 사신이 되어 정왕의 죽음을 알리기 위하여 일본에 파견되었다. 9월 이즈모(出雲 : 현 시마네현島根縣 동부)에 도착한 데 이어 12월에는 일본의 서울 교토(경도 京都)에 들어가 발해왕이 보낸 국서를 전하였다. 이듬해 정월 일본왕이 베푼 잔치에 참가하여 일본왕으로부터 종3위의 관직을 받았다. 6월 일본왕의 국서를 지니고 귀국하던 중 풍랑을 만나 일본 에치젠(越前 : 현 후쿠이현福井縣의 북부)에 표착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일본왕이 특별히 큰 배를 타고 가도록 배려하였으나 도중에 병으로 죽었다. 이를 안타까이 여긴 일본왕은 그에게 정3위의 벼슬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