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맞아 쟁기질을 하는데 보슬비가 내리는 시골의 풍경을 읊은 칠언절구(七言絶句)이다. 평기식(平起式)으로 압운(押韻)은 ◎표시된 家(가), 斜(사), 花(화) 자로 麻(마) 운목(韻目)이다. 이사부동(二四不同), 이륙대(二六對)가 잘 지켜진 상태이고, 기구(起句)는 1번 자와 3번 자, 승구(承句)의 1번 자, 전구(轉句)의 1번 자와 3번 자의 평측(平仄)이 변용(變容)된 작법(作法)이고 , 결구(結句)는 정격(正格)이다. 犁(려)는 犂(려)와 같은 자이다. 쟁기나 밭 갈기, 검은색을 뜻할 때는 ‘려’로 읽고, 얼룩소나 검버섯 핀 노인을 뜻할 때는 ‘리’로 읽으며, 전율하듯이 떠는 모양은 ‘류’로 읽는다. 독음(讀音)이 세 가지라서 주의해야 한다. 微雨(미우)는 보슬보슬 내리는 비로 세우(細雨) 보다 더 가는 비로 생각하면 되겠다. 跨(과)는 타가나 걸터앉는 것이다. 蓑(사)는 도롱이로 짚으로 엮은 비옷이다. 陂塘(피당)은 연못이나 저수지를 뜻하는데 인공적으로 둑을 쌓아 물을 막아 가둔 곳을 말한다. 陂(피, 파) 자는 연못, 방죽, 기울어짐, 간사함을 뜻할 때는 ‘피’로 읽고, 산비탈이나 편파적인 것을 뜻할 때는 ‘파’로 읽는다. 여기서는 당연히 ‘피’로 읽음이 타당하다.
전가(田家)라는 제목의 시는 많은 사람들이 즐겨 지었다. 고문진보(古文眞寶)에 실린 유종원의 고시(古詩) 3수(首)가 유명하고, 송나라의 매요신(梅堯臣)도 지었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제호(霽湖) 양경우(梁慶遇), 혜환재(惠寰齋) 이용휴(李用休) 등이 지은 것이 있고, 그 외에도 용재(慵齋) 성현(成俔)은 월령가(月令歌) 스타일로 12수(首)를 지었다.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의 전가(田家)를 비교해서 보자. 어려운 농촌의 경제 상황이 여실히 드러난다.
田家無宿糧(전가무숙량) / 농가에는 묵은 식량이 하나도 없어서
日日摘新麥(일일적신맥) / 날마다 새로운 보리를 베어 먹나니.
摘多麥已盡(적다맥이진) / 벤 보리가 많아서 이미 보리가 다했는데
東隣猶未穫(동린유미확) / 동쪽 이웃 고을엔 아직 수확하기 전이라네.
★ 이색(李穡, 1328~1396) : 고려말의 문신·학자이다. 호는 목은(牧隱)이고, 자는 영숙(潁叔)이다. 이곡(李穀)의 아들이다. 고려말을 대표하는 유학자 중 한 사람으로서, 당시 사상계의 흐름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이색의 학문적 성장에는 그 자신의 재능과 함께 이제현(李齊賢)의 문인이었던 아버지 이곡이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다는 가문의 배경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일찍이 14세에 불과하던 1341년 성균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면서 이름이 알려졌다. 20세에 아버지를 뵙기 위해 원나라에 들어갔다가, 다음 해 1348년에 원나라 조정 관리의 아들이라는 자격으로 국자감의 생원으로 뽑혀 3년간 수학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이색은 신유학에 본격적으로 접하게 되었다. 1353년 향시와 정동행성의 향시에 1등으로 합격하였고,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가서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그 후 원(元)과 고려를 오가며 벼슬을 하다가, 1356년 29세에 완전히 귀국하였다. 이색은 공민왕 재위 기간에 정치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보이며, 이는 대체로 공민왕의 개혁정치에 부응하려는 신진 사대부의 입장을 반영했다. 저서로 『목은집(牧隱集)』이 있으며, 『목은시고』(牧隱詩藁) 35권과 『목은문고』(牧隱文藁) 20권의 합본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