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30일 ‘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 발의한 설훈 더불어민주당 의원 측이 동 법률안을 철회했다. 법안은 설훈 의원을 비롯해 더불어민주당 68명, 무소속 3명, 열린민주당과 정의당 각 1명 등 총 73명의 의원이 지난 26일 공동 발의했다. 철회한 이유는 서울·부산시장 보궐 선거를 앞둔 민심의 이반(離叛), 문대통령의 지지율 하락, 부동산 정책 실패와 LH공사 사태, 김상조 정책실장의 경질(更迭) 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동 법안을 발의한 취지(趣旨)는 유신(維新) 반대 투쟁, 6월 민주항쟁 등 국민의 기본권 신장에 기여한 민주유공자에 대하여 예우(禮遇)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민주화운동과 관련해 희생하거나 공헌한 사람과 그 유족 또는 가족에게 교육·취업·의료·대출을 국가가 지원하며,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민주화 운동 관련 각종 기념·추모사업·시설물·교양시설 등을 실시 또는 설치할 수 있도록 했다. 더 세부적으로 민주화 운동 유공자 자녀 등에게 중·고교·대학 수업료, 직업 훈련·취업시험 가점, 의료비용 등을 지원하고, 20년 분할 상환이 가능한 주택 구입·임차 대부(貸付)도 지원하도록 했다. 국가유공자나 순국선열, 애국지사의 유족에게만 제공됐던 혜택을 민주화 운동 부상자·사망자·행방불명자를 넘어 민주화 운동을 이유로 ‘유죄 판결·해직·퇴학 처분’을 받은 이른바 ‘민주화 운동 희생자’를 추가해 지원 대상을 확대했다. 현대판 공신 책록(策錄)에 다름 아니라고 보인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의 공신 책록은 신라 때 시작하여 고려 시대부터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 공신은 배향공신(配享功臣)과 훈봉공신(勳封功臣)의 두 가지로 구분된다. 왕이 죽어서 종묘에 위패(位牌)를 모실 때 공로가 많은 신하의 위패도 같이 모시는 경우 이를 배향공신이라고 한다. 나머지는 훈봉공신이다. 훈봉(勳封)은 조정(朝庭)의 논의를 거쳐 정공신(正功臣)과 부차적인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구분하고 이를 다시 각 3~4개 등급으로 정한다. 원종공신은 정공신보다 공이 작은 사람이나 정공신의 자제에게 부여했다. 고려 태조 때에 공신당(功臣堂)을 만들어 개국공신들의 초상화를 벽에 그렸기 때문에 벽상공신(壁上功臣)이라고 불렀다. 일반적으로 고려 때의 공신 전체를 삼한공신(三韓功臣) 또는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부르기도 하고, 좁게는 고려 개국 공신만 지칭하기도 한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공신의 책록이 빈번하여 종묘에 배향(配享)된 공신만 94명에 이른다. 훈봉공신은 각 왕별로 1~5회씩 책록 했다. 대체로 태평성대를 이룬 왕의 치세에는 공신의 책록이 없고 외환(外患)의 위기나 정변·반란 등의 발생 시에 자주 활용되었다. 조선의 27대 왕 중에 15명의 왕들이 공신을 책록 하였고, 나머지 12명은 공신 책록을 하지 않았다. 조선 왕조 기간 동안 총 28번 책록 했는데, 선조와 인조가 각각 5번, 광해군이 4번, 세조와 중종이 각각 2번씩 책록 했다. 선조 때의 호성공신(扈聖功臣 : 임진란 때 의주 피란 수행)과 선무공신(宣武功臣 : 임진란 전공), 광해군 때의 위성공신[衛聖功臣 : 광해군의 분조(分朝) 유공] 만이 일본의 침략 전쟁과 관련된 공신에 해당한다. 나머지 대부분의 공신은 정변이나 반대편을 제거하기 위한 옥사(獄事), 반란 진압 등 권력 내부의 문제 해결에 해당된 것이다. 비록 패전한 전쟁이지만 외세의 침입인 정묘(丁卯)·병자호란(丙子胡亂)에 대항하여 공을 세우거나 전사한 사람들에 대한 공신 책록은 없었다. 이를 보면 그 당시의 관점에선 공신이지만 역사의 긴 호흡으로 보았을 때 제대로 된 공신 즉 국가 유공자인지는 의문이 많다.
공신들에게는 공신의 등급에 따라 영작(榮爵)과 토지·노비 등을 지급하고 자손들에게도 음직(蔭職)을 주었다. 심지어 범법행위를 하여도 공신이나 공신의 자손들에게는 형벌을 면제해주거나 감면하는 특혜를 주었다. 더욱 기막힌 것은 정변이나 옥사(獄事)·모반 관련 사건으로 몰락한 가문의 처첩과 딸 등 부녀자들과 가산(家産)도 모두 공신들이 차지했다. 실제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탈취하기 위하여 김종서·황보인·안평대군 등을 학살한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켰을 때 공을 세운 정난공신(靖難功臣)과 본인이 즉위할 때 공을 세운 좌익공신(佐翼功臣)들에게 막대한 포상을 하였다. 쿠데타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하여 당시 반대편 이외 대부분의 문무백관인 2,202명을 공신으로 책록 하였다. 집안의 노비와 시녀, 내시 등에게도 포상을 하여 남발(濫發)의 전형이었다.
계유정난에 참살당한 안평대군(安平大君)과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정분(鄭笨)·조극관(趙克寬)·허후(許詡) 등의 전지(田地)를 빼앗아 1등 공신 영의정(領議政)에게는 1백50 결(結 : 현재 기준 약 45만 평), 그 나머지에게는 각각 50 결, 2등 공신에게는 각각 30 결, 3등 공신에게는 각각 15 결씩 나누어 주고, 그들의 집들은 다음과 같이 처리하였다.
난신(亂臣)으로 몰려 처형된 집안의 부녀자들의 운명은 관노(官奴)로 전락되거나 공신들의 첩이나 노비로 포상을 하였는데 대체로 다음과 같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하지 않는다는 전설이 된 수양대군의 정변으로 단종을 보위하던 수많은 충신들이 도륙(屠戮)을 당했다. 남자들은 모두 형장(刑場)의 이슬로 사라지고, 전 재산과 여자들은 위의 표에 나타난 것처럼 공신들에게 포상되었다. 임신한 여성은 출산하기를 기다려 남아(男兒) 면 죽이고, 여아(女兒) 면 관노로 넘겼다. 사육신인 하위지(河緯地)의 동생 하소지(河紹池)는 필자(筆者) 집안의 사위였다. 당시 처가살이하는 관습이 있어서 그의 아들 하원(河源)은 아명이 귀동(龜童)인데 필자의 집안에서 낳고 자랐다. 당시 집(雙松亭 正寢은 봉화에 있고 別堂인 亭子만 영남대 교정으로 移建)이 경북 봉화의 산골이라서 간신히 목숨을 건져서 하위지(河緯地) 집안의 대(代)를 이을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당시의 처결이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얼토당토않은 것이다. 따라서 공신이나 국가유공자의 기준이나 선발은 시대가 변해도 공정하고 타당해야 하며 또 다른 특혜의 시비가 없어야 한다.
이 법안이 다수의 힘으로 통과되면 민주화 운동으로 인한 사망, 상이(傷痍) 등이 아닌 ‘유죄 판결·해직·퇴학 처분’을 받은 언저리 세력들까지 대를 이어서 특혜를 받을 수 있다. 속칭 386·586 정치세대들은 운동 경력을 발판·훈장으로 국회의원이나 고위 공직을 맡은 것이 사실이다. 그들이 스스로에게 보훈(報勳)하는 입법을 낯 두껍게 발의하는 행태가 개탄스럽다.
국가의 발전은 민주화 운동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경제발전 즉 산업화(産業化)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민주화 운동도 한낱 쓰레기통에 버려진 장미꽃에 지나지 않는다. 동남아와 아프리카 저개발 국가의 민주화 운동이 어떤 상태인지 웅변으로 말하지 않는가? 국가 발전의 양축(兩軸)은 민주화와 산업화이다. 산업화의 역군(役軍)들에게도 그 영광을 주어야 할 것이다. 이 나라를 이 만큼 먹고살게 하고, 민주주의를 꽃피우게 한 자양분은 경제력이니까.
설훈 의원 등 공동발의자 73명 중 이 법에 따라 수혜를 받는 의원이 27명이나 된다. 전체 의원들과 고위공직자까지 확대하면 수혜자가 훨씬 늘어날 것이다. 이걸 누가 셀프(Self) 특권법이 아니라고 할까? 더불어민주당 계열의 의원들이 이런 특권법을 발의한 것은 처음이 아니다. 최초로 ‘민주화운동 유공자 예우·지원법’이 2000년 국회에 발의되었고, 2004년 9월에 열린우리당 이호웅 의원이 ‘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하고, 같은 당 정봉주 의원도 따로 발의했다. 2012년 9월에는 민주당 문병호 의원, 2017년 11월에는 더불어민주당 김병관 의원이 대표 발의했다. 지난해 9월에도 우원식 의원 등 20명이 발의했다. 이들은 틈만 나면 이런 특권법을 발의해 놓고 여론의 추이(推移)를 보아 통과시키려고 노린다. 우리 국민들과 여론이 감시역할(Watchdog)을 충실히 하여야 할 이유이다.
광해군(光海君) 때 권신(權臣)들이 뺏은 토지는 다시 인조반정(仁祖反正) 공신(功臣)들의 손에 넘어갔고, 정치는 마찬가지라서 이를 비난하는 상시가(傷時歌)라는 노래가 시중에 유행했다. 야! 너희 공신들아(嗟爾勳臣 : 차이훈신), 잘난 척 마라(毋庸自誇 : 무용자과), 그 집에 바꿔 살고(爰處其室 : 원처기실), 이에 그 땅 차지하고(乃占其田 : 내점기전), 그들의 말을 타며(且乘其馬 : 차승기마), 또다시 그 일을 저지르니(又行其事 : 우행기사), 너희와 그들이(爾與其人 : 이여기인), 어찌 다른지 돌아봐라(顧何異哉 : 고하이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