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쪽 : 김생선생의 영정 그림. 오른쪽 : 충주 전국 한시 백일장 응모 시고지(詩稿紙) 사진>
이 시는 2025년 5월 30일 시행된 <제18회 충주 전국 한시 지상 백일장>에 출품한 금삿갓의 작품인데, 칠언배율시(七言排律詩)이다. 이번의 시제(詩題)는 <讚金生田遊巖山家序(찬김생전유암산가서)>로 신라 시대 우리나라 최고의 명필(名筆)인 김생(金生) 선생이 쓴 <전유암산가서(田遊巖山家序)>를 찬(讚)하는 것이다. 배율시는 12구절로 구성되어 있고, 1~2와 11~12구절은 제외한 나머지 8구절은 대구(對句)를 이루어야 한다. 압운(押韻)은 선통(先通)으로 ◎표시를 한 전(傳)·연(連)·선(宣)·전(田)·연(延)·선(先)이고 첫 구에는 압운이 없다. 첫 구에 압운이 없으면 마지막 자(字)는 반드시 측성(仄聲)을 써야 한다. 금삿갓은 이번 대회에서 운 좋게도 참방(參榜) 10인에 입상했다. 장원(壯元) 1, 차상(次上) 1, 차하(次下) 1인 다음이 참방이다. 옛날 과거로 따지면 장원과 차상하 3명은 갑과(甲科)이고 참방 10명은 을과(乙科)이다. 지난해 이 대회에서 입선 20명에 들었는데, 입선은 병과(丙科)에 해당한다. 그래서 과거시험은 총 33명을 선발한다. 오늘날 한시 백일장도 33명을 선발한다.
<전유암산가서(田遊巖山家序)>는 신라 시대의 명필 김생(711~791?)의 유일한 양각본(陽刻本) 서첩(書帖)이다. 총 315자로 가로 13.5cm, 세로 25cm로 책표지를 포함하여 모두 8폭(幅)으로 되어 있다. 표지에는 서첩명인 <전유암산가서(田遊巖山家序)>, 말미에는 <보덕사 김생 서>로 되어 있다. 가로와 세로 모두 1.8cm 크기의 소행초서(小行草書)로 앞쪽에는 산가서(山家序) 5 엽(葉)이 있고, 뒤쪽에는 오언율시(五言律詩) 1수(首)가 붙어있다. <전유암산가서(田遊巖山家序)>는 전유암의 유유자적(悠悠自適)한 산중(山中) 삶의 노래와 이를 후손에게 전하기 위해 김생 자신이 지은 오언율시를 담고 있다. 서예 역사에서 중국에 왕희지(王羲之)가 있다면 한국에는 김생(金生)이 있다. 왕희지가 이전 시대의 전예(篆隷)를 토대로 위진(魏晉) 이래의 글씨 법을 세웠다면, 김생은 왕법(王法)과 당법(唐法)을 아울러 우리나라 서예의 법을 세운 것이다. 그는 한국 서예의 조종(祖宗)이다.
<금삿갓 시작품과 휘호자 약력>
<전유암산가서 서첩>
이인로(李仁老)는 “김생은 용필(用筆)이 신과 같아 초서(草書)도 아닌 듯 행서(行書)도 아닌 듯 매우 신기로우니 멀리 57종의 제가체세(諸家體勢)로부터 나왔다. 도리어 위진(魏晉) 사람들이 발돋움하여 바라볼 수 없을 정도이다.”라고 평했다. 서거정(徐居正)은 “우리나라 서가(書家)를 논하면서 김생이 제일이며, 학사 요극일(姚克一)과 스님 탄연(坦然)·영업(靈業)이 그다음인데, 모두 왕희지를 법으로 삼았다.”라고 했다. 이광사(李匡師)는 “우리나라 필법은 신라 김생을 종(宗)으로 여기지만 오늘날 그의 진적(眞籍)으로 전하는 예가 거의 없다. 그러나 탑본(塔本) 역시 기위(奇偉)하고 법이 있어 고려시대 이후의 사람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라고 평했다. 고려 사신 홍관(洪灌)이 진봉사(進奉使)를 따라 송(宋)에 갔다. 그때 한림대조(翰林待詔) 양구(楊球)와 이혁(李革)이 황제의 조칙을 받들고 (고려 사신의) 숙소에 와서 그림 족자에 글씨를 썼다. 홍관이 김생의 글씨를 내보이자 송에서는 왕희지에 비할 만큼 천하의 명필이라고 극찬하였다. 그 후부터 중국 사신은 김생의 필적을 보배로 알고 구해 갔다 하며 해동서성(海東書聖)으로 불렸다. 김생사지(金生寺址)는 『수산집』의 김생사중수기(金生寺重修記)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통하여 북진애(北津崖)-예성(蘂城)의 북쪽나루- 즉 현 충주의 김생사에서 두타행(頭陀行)을 닦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