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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訪松石園址(방송석원지) / 송석원 터를 찾아서

금삿갓의 漢詩自吟(250601)

by 금삿갓

訪松石園址(방송석원지) / 송석원 터를 찾아서

- 금삿갓 芸史(운사) 금동수(금동수) 拙句(졸구)


松石何爲僅址明

송석하위근지명

○●○○●●◎

송석원이 어찌하여 터만 겨우 밝아


水聲不聽谷曇晴

수성불청곡담청

●○●●●○◎

물소리 안 들리고 골은 흐렸다 개네.


淸筵只有檀園畵

청연지유단원화

○○●●○○●

맑은 연회는 오직 단원의 그림에만 있고


可惜無綿古士情

가석무면고사정

●●○○●●◎

옛 선비의 뜻 이어지지 않아 가석하구나.

<송성원 터>
<김홍도의 송석원시사야연도 : 미산 마성린이 화제를 썼는데, 경염지야운월몽롱 필단조화경인혼몽 이다.>
<이인문의 송석원시사아회도 : 너럭바위에 시인들 모습 뒤로 송석원을 가리키는 글씨가 보인다.>

우리 옥류시사(玉流詩社) 회원들이 지난해는 소풍으로 옥류정(玉流亭)에 갔었는데, 올해는 서촌(西村) 기슭의 옥류동(玉流洞)과 송석원(松石園) 터, 수성동(水聲洞) 계곡을 방문했다. 이 옥류동에서 조선 말기 중인 계급의 인사들이 왕희지의 난정시사(蘭亭詩社)를 본떠서 시사(詩社)를 결성하여 매우 흥행한 역사가 있다. 송석원시사 주요 인물은 주창자인 천수경(千壽慶)을 비롯하여 장혼(張混)·김낙서(金洛書)·왕태(王太)·조수삼(趙秀三)·차좌일(車佐一)·박윤묵(朴允默) 등이 있다. 그들은 매일같이 천수경의 거처인 송석원에 모여 시문으로 즐겼다. 사대부계층에 비하여 열등한 위치에 있는 자신들의 신분적·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불만과 자포자기적 심사를 읊은 시를 많이 남기고 있다.

<추사의 송석원 글씨가 희미하게 보이고, 옆에 윤덕영이 벽수산장을 짓고 서예가 윤용구가 세로로 벽수사장을 썼다. >
<31살 추사의 예서체 송석원 각자. 정축 정화 소봉래서라고 낙관함. 소봉래는 추사의 젊을 때 호임.>
<옥류동 각자>
<옥류동 각자 앞에서 옥류시사 회원>

송석원시사의 활동 중, 백전(白戰)은 전국적 규모의 시회이다. 백전은 백지 종잇장으로 싸운다는 뜻으로, 여기에 참석하지 않으면 중인 시인 대접을 받지 못할 정도였다. 이는 1년에 두 차례씩 개최되었다. 남북 두 패로 나누어 서로 다른 운자(韻字)를 사용함으로써 공정을 기하였던 큰 모임이었다. 송석원시사는 위항인들이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자기 권익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채택한 문학적 모임의 성격이다. 이 점은 그들의 시사결성 취지에서도 확인된다. 송석원시사의 취지문인 「서옥계사수계첩후(書玉溪社修禊帖後)」에서 장혼은 같은 중인계층이면서 비슷한 나이에 서로 가까이 거처하는 친한 사람들끼리 시사를 결성하고 문학적 교유를 표방함을 밝혔다. 이 시사는 당대 위항문인들의 집결체였다.

<겸재 정선이 그린 수성동 >
<수성동의 돌다리 앞에서 옥류시사 회원 : 계곡에 물이 없어서 물소리가 들리지 않네>

그리고 1797년에 『풍요속선』을 간행하여, 『소대풍요』에 이어 위항인들이 정사년마다 그들의 시선집을 간행하는 전통을 수립하는 데 큰 구실을 하였다. 위항문학은 이 송석원시사의 융성함과 그 구성원의 활발한 작품활동으로 인하여 이 시기에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으며, 1818년(순조 18)까지 활동하였다. 송석원시사 동인들의 시회를 가졌고 이를 시회첩으로 만들었는데 그것이 《옥계청유첩玉溪淸遊帖》이다. 시회첩에는 송석원 시사 동인인 김의현(金義鉉)이 당시 화가 이인문(李寅文)과 김홍도(金弘道)에게 부탁하여 그린 작품이 있다. 이인문은 낮에 일찍이 인왕산 계곡 바위에 모인 장면〈송석원시회도〉을 그렸고, 늦은 오후에 도착한 김홍도는 한밤중에 김운림(金雲林)의 집 마당에 둘러앉은 장면 〈송석원시사야연도〉을 그렸다. 이 그림에 미산(眉山) 마성린(馬聖麟)이 화제(畵題)를 썼는데, 경염지야운월몽롱(복더위 밤에 운월은 몽롱하고) 필단조화경인혼몽(붓끝의 조화는 사람을 놀래어 혼몽하게 하네) 라고 했다. 세월이 흘렀지만 이름이 옥류시사인데, 이런 유서 깊은 곳을 찾지 않을 수 있을까.

<수성동 계곡의 정자에서 금삿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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