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코에서 돌아와 아비뇽(Avignon에서 숙박했다. 아비뇽은 로마 가톨릭교황청으로서는 우리의 일제 36년처럼 뼈아픈 역사이다. 역사적으로 유수(幽囚), 영어로 Captivity 또는 Exile이라는 사건은 바빌론 유수가 처음인 걸로 배웠다. 기원전 597년 유다왕국이 바빌로니아 제국에 패하여 치드키야 왕을 비롯한 백성들이 바빌론에 포로로 60년간 잡혀있던 사건이다. 그들은 이런 경험에서 단결의 힘을 길렀고, 경전을 정리하여 구약성서의 기초를 다졌다. 아비뇽 유수도 마찬가지로 절대 권력을 누리던 교황권이 프랑스 필리프 4세의 왕권에 무너져 약 70여 년간 이곳에서 머물렀던 것이다. 1077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가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무릎 꿇었던 카노사의 굴욕의 반전이 벌어진 것이다. 1308년 교황 클레멘스 5세부터 7명의 교황이 아비뇽에서 재임했다. 프랑스의 관할하에 있던 교황청이 프랑스에 적대적인 다른 국가들의 반발과 여론에 의해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1377년에 로마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라 프랑스계열의 추기경들이 반란을 일으켜 다른 교황 클레멘스 7세를 옹립하여 아비뇽에서 교황 행세를 하면서 로마 교황과 전쟁까지 한 것이다. 영화 <두 교황>과 비슷하지만 다른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 사건은 더 발전하여 피사에서 제3의 교황을 선임하여 <세 교황> 시대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조선 말기 우리나라에도 이와 비슷하지만 성격이 약간 다른 사건인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있었다. 고종(高宗)이 을미사변(乙未事變 :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안전을 위하 러시안 공사관으로 피난 것이다. 자기 나라 안에 있는 남의 나라 영토에 망명한 것이다. 역설적으로 고종은 그곳에서 대한제국을 설립하게 된다.
<아비뇽 요새>
<아비뇽 교황청 유적>
<아비뇽 교황청 유적>
<아비뇽 유적>
<교황궁은 요새로 이루어진 궁으로 15,000평방미터의 넓이로 건설되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어떠하든 간에 아비뇽은 말없이 그 성채가 굳건하게 유지되어 오고 있고 와인 또한 그 명맥을 잘 유지하고 있다. ‘교황의 새로운 성’이라는 뜻의 샤토네프 뒤 파프(Châteauneuf-du-Pape)는 프랑스 남부 아비뇽 인근에서 교황을 위한 와인을 생산하던 지역이다. 교황 클레멘스 5세가 아비뇽으로 교황청을 옮기면서 샤토네프 뒤 파프는 교황청 전용 와인 산지가 됐고, 그의 뒤를 이은 교황 요한 22세가 그곳에 여름 별장을 지으면서 와인 생산이 본격화 됐다. 이후 마을은 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번창했고, 샤토네프 뒤 파프도 품질이 날로 향상되어 지금은 명실상부 남부 론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와인으로 자리를 잡았다. 교황의 지시로 유럽 각지에서 다양한 포도를 가져오긴 했지만 그곳의 테루아에 적응한 품종은 많지 않았다. 이곳은 포도 밭이 돌 자갈로 덮혀있다. 돌들은 낮의 태양열기를 받아 달궈져서 밤에 포도 뿌리에 온기를 제공해서 좋은 포도가 나온다. 이런 척박한 땅에서 결국 살아남은 품종과 남부 론의 토착 품종을 섞어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고, 이 전통이 자리 잡아 지금은 원산지 표시 보호 와인 기준(AOC)에 따라 샤토네프 뒤 파프는 최대 13가지까지 품종을 섞어 와인을 만들고 있다. 이렇게 여러 품종을 블렌딩 하는 능력은 이후 양조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섬세함과 우아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샤토네프 뒤 파프의 탄생을 가져왔다. 최고가 와인인 로마네 꽁티는 자갈이 섞인 밭에서 나오지만 이 와인은 돌 자갈이 덮인 밭에서 나온다. 술 좋아하는 금삿갓이라 술 이야기가 나오면 신이 난다.
아비뇽을 끼고 흐르는 론강에는 마치 폭격을 맞아 끊어진 것 같은 아비뇽의 다리가 남아있다. 이 다리는 건설하는데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다리 건설은 중세의 기술력으로는 어렵고도 비용이 많이 드는 모험이었다. 로마는 길을 뚫고 다리를 놓는데 엄청 열심이었던 나라다. 그래도 당시 거의 대부분 다리는 나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항상 화재의 위험이 뒤따랐다. 최초의 중세 석조 다리는 론강 위의 아비뇽에 세워진 퐁 생 베네제(Pont Saint Bénezet)였다. 당시 목동이었던 베네제(Bénezet)는 어느 날 하늘의 계시를 받아 론강에 다리를 놓으려고 했다. 그는 친구와 후원자로 구성된 일종의 교단인 소위 '다리형제회'를 조직했다. 이 조직은 기부금, 유증, 유언장 처분액 등을 받았고 공사를 이웃사랑의 과업으로 승화시켰다. 1178년부터 1185년까지 공사가 진행되었던 아비뇽의 생 베네제 다리는 뛰어난 건축물이었다. 돌로 만든 22개 아치와 폭 4m, 길이 900m의 다리가 론강 위에 놓이게 되었다. 아쉽게도 베네제는 다리가 완성되기 하루 전에 죽었단다. 넓은 기둥들 때문에 아치가 더욱 좁아 보이는 효과가 있다. 멋진 석조 다리는 기록적인 시간 내에 완성된 것이다. 하늘도 무심하지, 15세기에 홍수로 인해서 다리가 파괴되고 현재는 일부만 남아 있는데, 17세기부터 이어오던 보수 작업을 멈추고 지금의 남은 형태만으로 관광자원으로 잘 활용하고 있다. 프랑스의 어린이들이 즐겨 부르는 동요인 <아비뇽의 다리 위에서>가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원래의 제목은 ‘다리 아래서’ 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