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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운사 May 08. 2023

16> 題柳少年山水圖(제류소년산수도)

漢詩 工夫(한시 공부)

題柳少年山水圖(제류소년산수도) / 소년 산수도에 제하다

- 權近(권근) -


墨池龍起雨濛濛

●○○●●○◎

(묵지룡기우몽몽) /  먹물 못에 용이 일어나니 비가 부슬부슬하고


石走江翻鬼泣空

●●○○●●◎

(석주강번귀읍공) / 돌이 구르고 강이 뒤집혀 귀신이 허공에서 운다.


一陣好風天地霽

●●●○○●●

(일진호풍천지제) / 한 줄기 좋은 바람 불어와 천지가 활짝 개이니


分明元化在胸中

○○○●●○◎

(분명원화재흉중) / 분명히 천지의 조화가 가슴속에 있었구나.



이 시는 양촌(陽村) 권근(權近)이 자기의 문인인 유방선(柳方善 : 1388년 ~ 1443년)의 그림 그리는 것을 보고 지은 칠언절구(七言絶句)이다. 기구(起句)의 2번 자인 지(池)가 평성(平聲)이라서 평기식(平起式)으로, 압운(押韻)은 ◎표시된 몽(濛), 공(空), 중(中)이고, 동운목(東韻目)이다. 평기식(平起式)의 정격(正格)을 비교적 잘 지켰고, 이사부동(二四不同)·이륙대(二六對)·오칠부동(五七不同)도 정확하다. 기구(起句) 1번 자 흑(黑)은 측성(仄聲)으로, 전구(轉句) 3번 자 호(好)는 측성(仄聲)으로, 결구(結句) 3번 자 원(元)은 평성(平聲)으로 변화를 주었다.


시어(詩語)를 보면, 묵지(墨池)는 벼루에 갈아 놓은 먹물을 연못에 비유한 것이다. 용기(龍起)는 용이 일어나는 것인데 붓놀림을 의미한다. 몽몽(濛濛)은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모양이나 먼지나 안개가 자욱한 모양을 나타낸다. 석주(石走)는 돌이 구른다는 뜻이다. 강번(江翻)은 강물이 뒤집히는 즉 파도를 치는 모양이다. 원화(元化)는 으뜸의 조화 즉 변화하는 모양이다. 시인은 제자의 그림 그리는 모습을 보면서 혹은 상상하면서 시상(詩想)의 멋을 한껏 꾸며본 것이리라. 화폭 속에 담긴 그림은 먹물의 못에서 용의 붓이 일어나 비가 부슬부슬 뿌리는데, 강변에 돌이 구르고 강물은 뒤집히고 하늘에선 귀신이 우는듯하다는 최대의 찬사를 보냈다. 한 줄기 시원한 바람에 천지가 말끔하게 개더니만 이는 분명 화가의 흉중(胸中)에 큰 조화가 있으리라는 시상을 모두 쏟아냈다. 소년이 붓을 그어 갈 때마다 종이에서는 웅장하면서도 생동감 있는 장면이 나타나고, 시인은 이를 보면서 소년의 큰 포부를 칭찬한 내용으로 담았겠다.

이 시는 동문선(東文選)에는 칠언절구로 실여있는데,  양촌집(陽村集)에는 칠언율시(七言律詩)는 아닌 듯한데, 다음의 칠언절구(七言絶句) 한 수가 덧붙어서 기록되어 있다.

靑山雨過白雲濃(청산우과백운농) / 푸른 산에 비 지나고 흰 구름이 짙어지니

草樹皆霑閏物功(초수개점윤물공) / 풀과 나무들 모두 젖어 모든 게 넉넉하네.

頃刻解成眞態出(경각해성진태출) / 금방 이루어 놓은 것이 참모습을 표출하니

信知人可代天工(신지인가대천공) / 하늘의 기술 대신한 사람의 능력을 정말로 알겠네.


★ 권근(權近 : 1352년 ~ 1409년) : 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권진(權晉), 자는 가원(可遠)·사숙(思叔), 호는 양촌(陽村)·소오자(小烏子). 권보(權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검교시중(檢校侍中) 권고(權皐), 아버지는 검교정승 권희(權僖)이다. 1368년(공민왕 17) 성균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급제해 춘추관검열·성균관직강·예문관응교 등을 역임했다. 고려 우왕 때 정몽주(鄭夢周)·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배원친명(排元親明: 원나라를 배척하고 명나라와 화친함)을 주장했으며,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성균관대사성·지신사(知申事) 등을 거쳐, 1388년 창왕 때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이은(李垠) 등을 뽑았다. 이듬해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로서 문하평리(門下評理) 윤승순(尹承順)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앞서 이숭인(李崇仁)이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서 부정한 재물을 모았다고 탄핵되어 쫓겨난 일이 있었는데, 그를 이어 명나라에 다녀온 권근이 상서(上書)하여 이숭인의 무죄를 주장하였다는 죄로 우봉(牛峯)에 유배되었다. 그 뒤 영해(寧海)·흥해(興海) 등을 전전하여 유배되던 중, 1390년(공양왕 2) 윤이(尹彝)·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한때 청주 옥에 구금되기도 했다. 뒤에 다시 익주(益州)에 유배되었다가 석방되어 충주에 우거(寓居)하던 중 조선왕조의 개국을 맞았다.


1393년(태조 2) 왕의 특별한 부름을 받고 계룡산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새 왕조의 창업을 칭송하는 노래를 지어 올리고, 왕명으로 정릉(定陵: 태조의 아버지 환조(桓祖)의 능침)의 비문을 지었다. 그런데 이 글들은 모두 후세 사람들로부터 유문(諛文)·곡필(曲筆)이었다는 평을 면하지 못했다. 그 뒤 새 왕조에 출사(出仕)하여 예문관대학사(藝文館大學士)·중추원사 등을 지냈다. 1396년 이른바 표전문제(表箋問題: 명나라에 보낸 외교문서 속에 표현된 내용으로 인한 문제가 발생함)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외교적 사명을 완수하였을 뿐 아니라, 유삼오(劉三吾)·허관(許觀) 등 명나라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경사(經史)를 강론했다. 그리고 명나라 태조의 명을 받아 응제시(應製詩) 24편을 지어 중국에까지 문명을 크게 떨쳤다.


귀국한 뒤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으로 화산군(花山君)에 봉군 되고, 정종 때는 정당문학(政堂文學)·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대사헌 등을 역임하면서 사병제도(私兵制度)의 혁파를 건의, 단행하게 했다. 1401년(태종 1)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으로 길창군(吉昌君)에 봉군 되고 찬성사(贊成事)에 올랐다. 1402년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신효(申曉) 등을 뽑았고, 1407년에는 최초의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독권관(讀卷官)이 되어 변계량(卞季良) 등 10인을 뽑았다. 한편, 왕명을 받아 경서의 구결(口訣)을 저정(著定: 저술하여 정리함)하고, 하륜(河崙) 등과 『동국사략(東國史略)』을 편찬하였다. 또한, 유학제조(儒學提調)를 겸임해 유생 교육에 힘쓰고, 권학사목(勸學事目)을 올려 당시의 여러 가지 문교시책을 개정, 보완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성리학자이면서도 사장(詞章)을 중시해 경학과 문학을 아울러 연마했다. 이색(李穡)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 문하에서 정몽주·김구용(金九容)·박상충(朴尙衷)·이숭인(李崇仁)·정도전 등 당대 석학들과 교유하면서 성리학 연구에 정진해 고려 말의 학풍을 일신하고, 이를 새 왕조의 유학계에 계승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학문적 업적은 주로 『입학도설(入學圖說)』과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으로 대표된다. 『입학도설』은 훗날 이황(李滉) 등 여러 학자에게 크게 영향을 미쳤고, 『오경천견록』 가운데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은 태종이 관비로 편찬을 도와, 주자(鑄字)로 간행하게 하고 경연(經筵)에서 이를 진강(進講)하게까지 했다. 이밖에 정도전의 척불문자(斥佛文字)인 『불씨잡변(佛氏雜辨)』 등에 주석을 더하기도 했다. 저서에는 시문집으로 『양촌집(陽村集)』 40권을 남겼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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