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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운사 May 16. 2023

17> 竹枝曲(죽지곡) / 대나무 가지의 노래

漢詩 工夫(한시 공부)

竹枝曲(죽지곡) / 대나무 가지의 노래

- 兪好仁(유호인) -



城南城北鬧鷄豚

성남성북뇨계돈

○○○●●○○

닭과 돼지 소리 시끄러운 성의 남과 북쪽에서


賽罷田神穀雨昏

새파전신곡우혼

●●○○●●◎

토지 신에게 고사 끝내니 곡우 날이 저물었네.


太守遊春勤勸課

태수유춘근권과

●●○○○●●

태수는 봄놀이 삼아 부지런히 농사일 권하다가


肩輿時入杏花村

견여시입행화촌

○○○●●○◎

가마 타고 때때로 주막 촌으로 들어가네.

이 시는 칠언절구(七言絶句)이고 기구(起句)의 2번 남(南) 자가 평성(平聲)이라서 평기식(平起式)이다. 이사부동(二四不同), 이륙대(二六對), 오칠부동(五七不同)이 잘 지켜졌고, 기구(起句)의 3번 성(城) 자와 결구(結句)의 3번 시(時) 자가 평성(平聲)으로 변화를 주었다. 시어(詩語)를 살펴보면, 鬧(뇨)는 시끄러운 것을 나타내며 소란한 것이다. 賽(새)는 굿이나 제사를 말하며, 다른 뜻은 주사위나 승부를 가리는 것을 나타낸다. 肩輿(견여)는 어깨로 매는 가마로 사인교(四人轎)가 일반적이다. 杏花村(행화촌)은 살구꽃이 만발한 마을이란 뜻이나, 두목(杜牧)의 시(詩) <청명(淸明)>에 “借問酒家何處有(차문주가하처유) / 술집이 어디 있는지 찾아 물어보니, 牧童搖指杏花村(목동요지행화촌) / 목동은 손을 들어 행화촌을 가리키네.”라고 읊은 이후로 시어(詩語)에서 행화촌은 술 파는 집 즉 주막집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속동문선(續東文選) 제10권 칠언절구(七言絕句) 편에는 함양남뢰죽지곡(咸陽蘫㵢竹枝曲)이란 제목으로 10수의 연작시가 실려 있다.

죽지곡(竹枝曲), 죽지사(竹枝詞) 또는 죽지가(竹枝歌)는 칠언절구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악부(樂府)의 일종이다. 죽지사의 유래를 보면 다음과 같다. 옛 중국의 순(舜) 임금이 남방을 순수(巡狩)하다가 창오야(蒼梧野)에서 세상을 떠나자, 요(堯) 임금의 두 딸이며 순임금의 부인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 대나무에 피눈물을 흘리며 서러워하다가 마침내 상수(湘水)에 빠져 죽었다. 그 후 사람들이 이들을 상수(湘水)의 신(神)으로 받들어 상군(湘君) 혹은 상부인(湘夫人)이라고 일컫고, 이 지역 대나무에 그들의 피눈물 흔적을 상징하는 무늬가 있다고 하여 소상반죽(瀟湘斑竹)이라고 하였다. 당시의 동정호(洞庭湖) 일대에 처량하고 원망 어린 노래가 생겨났다. 이 노래가 상부인(湘夫人)의 슬픔을 기리는 것이라 하여 죽지(竹枝)라고 명명했다. 이후 죽지는 파유(巴渝 : 巴州와 渝州) 지역 일대에 널리 전파되어 이 지역의 가장 대표적인 민가(民歌)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죽지사(竹枝詞)의 원형(原形)은 초(楚) 나라 시대에 체계(體系)를 이루기 시작, 회왕(懷王)·굴원(屈原)·항우(項羽) 등 역사적인 인물의 일대기(一代記)를 애잔한 곡조에 담았던 것이 시초(始初)로 여겨진다. 한편 중경(重慶)과 사천성(泗川省) 일대에서 풍속을 소재로 한 민가(民歌)도 초창기의 죽지사(竹枝詞) 형태로 유행했다고 전해진다.

당나라 유우석(劉禹錫)은 구전(口傳) 형태로 이어져 오던 죽지사(竹枝詞)를 수집(收集), 정리(整理)하고 거기에 중국 특유의 민족정서(民族情緖)를 융화(融和)시켜 새로운 칠언절구(七言絶句) 형식으로 재정비하여 문단에 부각되었다. 그는 50세이던 882년에 기주자사(夔州刺使)로 좌천되어 있을 때에 건평(建平) 지역 아녀자(兒女子)들이 돌아가며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고 이것을 채집하여 죽지사라는 새로운 노래가사를 지었다. 그는 작자의 순수서정이 아니라 건평이란 특정지역의 민가와 민풍(民風)을 근거로 산수풍속(山水風俗)과 남녀 간 사랑을 묘사(描寫)한 죽지사 구수(竹枝詞 九首)를 지었다. 그리고 두 수의 죽지사를 더 지었는데, 그중 첫 번째 죽지사가 SBS 드라마 <달의 연인 – 보보경심려(步步惊心麗)>에 나와서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楊柳青青江水平(양류청청강수평) / 버드나무는 푸르게 우거지고 강물은 잔잔한데

聞郎江上唱歌聲(문랑강상창가성) / 강가에서 부르는 님의 노랫소리 들려오네.

東邊日出西邊雨(동변일출서변우) / 동쪽에는 해 뜨는데 서쪽에는 비가 내리니

道是無晴却有晴(도시무청각유청) / 길은 흐린 듯하면서도 오히려 맑게 느껴지네.

위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한자 갤 청(晴) 자가 뜻 정(情) 자와 중국어 발음이 ‘칭’으로 같다. 따라서 듣기에 따라 맑은 날씨와 비 내리는 흐린 날씨를 대조시킨 마지막 구절이 마음이 있고 없는 무정(無情)과 유정(有情)을 나타내는 중의적(重意的) 표현으로 생각해도 될 것이다.

우리나라의 죽지사는 고려 말부터 부분적으로 실험되었다. 이제현(李齊賢 : 1287~ 1367)과 민사평(閔思平 : 1295~1359)이 유우석의 「죽지사」를 근거로 「소악부」를 지었다. 그 후 별로 주목받지 못하다가 성종(成宗) 이후 사림파(士林派) 인물들이 등장하여 지방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이면서 다시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김종직(金宗直 : 1431~1492)이 밀양 지역을 대상으로 하여 「응천죽지곡(凝川竹枝曲)」 9수 연작시를 짓고, 김종직의 제자 유호인(兪好仁)이 함양 지역을 대상으로 하여 「함양남뢰죽지곡(咸陽灆雷竹枝曲)」 10수, 또 다른 제자 김맹성의 경북 성주 「가천죽지곡」 9수를 지었다. 성현(成俔 : 1439~1504)이 「죽지사」 10수를 지어 『허백당풍아록(虛白堂風雅錄)』에 수록하였다. 허난설헌(許蘭雪軒)을 비롯한 여러 문인들의 작품 속에서도 이런 종류의 작품이 간헐적으로 발견된다. 조선 후기에 와서 주로 소외된 지식인과 위항시인들이 죽지사 작품을 다수 창작함으로써 문학사의 주목할 만한 현상으로 부각되었다. 서얼 출신 신유한(申維翰)은 통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에 보고 들은 풍물을 회고하여 「일동죽지사(日東竹枝詞)」 34수를 지었다. 역관 출신인 조수삼(趙秀三)은 『방여승략(方輿勝略)』을 보고 82개국의 풍물을 작품화하여 「외이죽지사(外夷竹枝詞)」 133수를 지었다. 김해에서 24년 간의 유배생활을 한 이학규(李學逵)는 김해의 풍물과 토속을 읊은 「금관죽지사(金官竹枝詞)」 30수를 지었다. 개화파의 인물인 이유원(李裕元)은 청나라 때의 『직공도(職貢圖)』를 보고 30개국의 풍물을 작품화하여 「이역죽지사(異域竹枝詞)」 30수를 지었다. 한말의 서리 출신인 최영년(崔永年 : 1859~1935)은 사화(史話)와 민간 풍물(風物)을 비롯하여 음식과 식재료, 술 등 소재를 다양하게 작품화하여 560수에 달하는 장편의 「해동죽지사(海東竹枝詞)」를 지었다. 이는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지 11년이 지난 1921년 집필이 완성됐다. 이 시기의 한국에서는 다양한 문화가 뒤섞이는 거대한 문화적 혼융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따라서 근대 이후 변화되기 직전 우리 고유의 풍속, 문화가 기록되어 있어, 외래문화와 뒤섞이기 전의 한국 전통 식문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갖고 있다.

★ 유호인(兪好仁, 1445~1494) :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극기(克己), 호는 임계(林溪)·뇌계(㵢溪). 유음(兪蔭)의 아들이며,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조선 전기의 문인으로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시 ·문 ·서에 뛰어나 당대 3절(絶)이라 불리었고 성종으로부터 지극한 총애를 받았으며 당시 4대 학파 중 사림파에 속하였다. 홍문관교리로 있다가 1488년 의성현령으로 나갔다. 1490년 『유호인시고(兪好仁詩藁)』를 편찬하여 왕으로부터 표리(表裏)를 하사 받았다. 1494년 장령을 거쳐 합천군수로 재직 중 병사하였다. 장수의 창계서원(蒼溪書院),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에 제향 되었다. 『뇌계집(㵢溪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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