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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운사 Jun 12. 2023

18> 題路傍松(제로방송) / 길가의 소나무를 읊다.

漢詩 工夫(한시 공부)

題路傍松(제로방송) / 길가의 소나무를 읊다.

- 金淨(김정) -


海風吹去悲聲壯

해풍취거비성장

●○○●○○●

바닷바람 불어 가니 슬픈 소리 거세지고


山月高來瘦影疎

산월고래수영소

○●○○●●◎

산에 달 높이 떠오니 여윈 그림자 성기네.


賴有直根泉下到

뇌유직근천하도

●●●○○●●

곧은 뿌리 샘 아래로 닿아 있음에 힘입어


雪霜標格未全除

설상표격미전제

●○○●●○◎

눈과 서리도 높은 품격을 전부 없애지 못했네.

이 시는 칠언절구(七言絶句)이고 기구(起句)의 2번 풍(風) 자가 평성(平聲)이라서 평기식(平起式)이다. 이사부동(二四不同), 이륙대(二六對), 오칠부동(五七不同)이 잘 지켜졌고, 압운(押韻)은 ◎표시된 승구(承句)의 소(疎)와 결구(結句)의 제(除)로 어(魚) 운목(韻目)이다. 기구(起句)의 마지막 자에 장(壯)을 사용하여 압운을 따르지 않았다. 기구(起句)의 5번 자인 비(悲) 자가 평성(平聲)이라서 오칠부동을 맞추려고 측성(仄聲)으로 했다. 기구(起句)의 1번, 3번 자도 평측(平仄)을 바꾸어 사용하고, 승구(承句)의 1번과 전구(轉句)의 3번, 결구(結句)의 1번 자의 평측(平仄)도 혼용함으로써 변화를 주었다. 시어(詩語)를 살펴보면, 瘦影(수영)은 솔잎이 뾰족한 모양이나 가지를 잘린 앙상한 모양을 그림자로 묘사했다. 標格(표격)은 본받을만한 높은 품격을 이른다. 全除(전제)는 온전히 모두 제거하다는 뜻이다. 어떤 판본에 따라서 기구(起句)의 마지막 자가 장(壯)이 아니라 원(遠)으로 되어 있는 것도 있다.

이 시의 작가 김정(金淨)은 사림파(士林派)의 학자로 승승장구하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극형을 당하게 될 위기에 정광필(鄭光弼)의 옹호로 금산(錦山)에 유배된다. 그러다가 다시 제주로 이배(移配)가 되는데, 진도를 거쳐 제주로 가는 도중 해남에 이르러 길가에 서있는 소나무 그늘에서 쉬면서 이 시를 지었다고 한다. 題路傍松(제로방송) 즉 길가의 소나무를 보고 지은 시는 모두 3 수인데 이 시가 그중 한 수 있다. 예로부터 소나무는 충절의 상징이니 길가의 소나무에 자신의 처지를 비유하여 지은 절창의 시이다. 유배 길에 지필묵이 없어서 소나무 껍질을 벗거셔 거기에 시를 썼다는 고사가 있다. 참고 삼아 나머지 두 수를 적어 본다.

欲庇炎程暍死民(욕자염정갈사민) / 폭염 길 더위 먹어 죽는 백성을 덮어주려고

遠辭岩壑屈長身(원사암학굴장신) / 먼 바위골짜기를 사양하고 긴 몸을 굽혔구나.

村斧日尋商火煮(촌부일심상화자) / 마을 도끼는 매일 찾아오고, 장사꾼은 불 지르니

知功如政亦無人(지공여정역무인) / 진시황처럼 그 공로 알아주는 사람 아무도 없네.

길가의 소나무 그늘은 필요한 사람에게 요긴한데, 멋모르는 촌부와 부상들은 뗄 감으로만 여긴다. 다만 진시황만이 길가 소나무의 공로를 치하했다. 진시황의 성이 영(嬴)이고 이름이 정(政)이다. 태산에서 봉선(封禪)을 마치고 내려올 때 폭풍우를 만나 길가 소나무 아래로 피신하여 안전하게 하산하였다. 그래서 이 다섯 소나무를 오대부(五大夫)로 봉한 고사가 있다. 자신이 나라와 백성을 위해 좋은 일을 할 소나무인데 나쁜 정적들은 자기를 쓰러뜨리려는 심정을 읊은 것이다.

枝條摧折葉鬖髿(지조최절엽삼사) / 가지는 꺾이고 부러져, 잎은 헝클어져 늘어졌네,

斤斧餘身欲臥沙(근부여신욕와사) / 도끼는 남은 몸을 모래 위에 눕히려 하네.

望絶棟樑嗟己矣(망절동량차기이) / 동량의 바람은 끊어져 자신을 한탄하겠지만

査牙堪作海仙槎(사아감작해선사) / 굽고 남은 가지는 바다신선의 뗏목 되길 견뎌야지.

길가의 소나무도 온갖 모진 풍파에 부러지고 꺾어지듯이 자신도 온갖 모함에 연루되어 돌아올 기약 없는 유배길이다. 나라의 기둥과 석가래 즉 동량지재는 못되어도 뗏목이라도 되어야 할 텐데, 김정은 바다를 건너가서는 다시 돌아오지 못할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그는 또한 진도의 벽파진에서 바다를 건널 때 넘실거리는 푸른 파도에 목숨을 걸고 건너가야 하는 심정을 입으로 노래한 <도벽파구호(渡碧波口號)>도 지었다. 그리고 일 년이 조금 지나서 사약을 받았다.

★ 김정(金淨, 1486~1521) :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이자 문인화가이다. 자는 원충(元冲)이고, 호는 충암(冲菴)·고봉(孤峯)이며, 시호는 처음에는 문정(文貞)이었다가 후에 문간(文簡)으로 고쳐졌다. 본관은 경주(慶州)로서, 호조정랑(戶曹正郞)을 지낸 효정(孝貞)의 아들이다. 충북 보은 출신이다. 1504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507년에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전적에 임명되었다. 이어 홍문관수찬·병조좌랑을 거쳐 정언(正言)에 전임되고, 다시 홍문관교리 · 이조정랑 등을 거쳐 순창군수(淳昌郡守)에 제수되었다가 보은에 유배되었다. 1516년에 풀려나와 응교(應敎)·전한(典翰) 등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가, 사예(司藝)·부제학·동부승지·좌승지·이조참판·도승지·대사헌 등을 거쳐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519년 기묘사화 때 극형에 처해지게 되었으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등의 옹호로 금산(錦山)에 유배되었다가 진도(珍島)를 거쳐 다시 제주도에 안치(安置)되었다. 그 뒤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되어 사사(賜死)되었다. 보은의 상현서원(象賢書院), 청주(淸州)의 신항서원(莘巷書院), 제주의 귤림서원(橘林書院), 금산(錦山)의 성곡서원(星谷書院) 등에 제향 되었다. 시문은 물론 그림을 잘했는데, 특히 화조를 잘 그려 조선 중기에 유행한 소경수묵사의(小景水墨寫意) 화풍의 전통을 형성했다. 제자로는 김봉상(金鳳祥)·김고(金顧)·최여주(崔汝舟) 외에 조카인 천부(天夫)·천우(天宇) 등이 있다. 저서로는 『충암집』·『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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