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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운사 May 10. 2023

(23) 못다 이룬 사랑 – 아벨라르와 엘로이즈

★ 18禁 역사 읽기 ★ (230508)

장자크 루소(J. J. Rousseau : 1712~1778)는 18세기 독창적인 사상가로서 너무나 다채로운 면모(面貌)를 가진 천재다. 그의 모든 저작물은 한결 같이 동시대의 문제작이 되고 후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불평등의 원인과 사회적 모순(矛盾)을 날카롭게 짚어내며 사회학의 방법을 모색했다. 『사회계약론』을 통해 ‘인민주권’이라는 민주주의의 대의(大義)를 천명(闡明)하면서 프랑스혁명 사상의 단초(端初)를 만들었다. 『에밀』을 통해 교육 이념을 제시하여 교육철학에 한 획(劃을) 그었고, 『고백록』을 통해 자기 성찰적(省察的), 정신분석적 자서전이라는 새로운 문학 장르를 창시(創始)했다. 그래서 현대의 누구나 루소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루소가 말한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잘 알지만 그가 열정적인 식물학자라는 사실을 아는가? 그가 유명한 음악가로서  『마을의 점쟁이』라는 오페라를 작곡하여 엄청난 성공을 하자, 루이 15세 국왕을 알현하여 연금(年金)을 받을 뻔했는데, 스스로 포기하였고, 개신교 찬송가도 많이 작곡한 사실을 아는가? 소설가로서 교육적 소설 『에밀』은 많이 아는데, 『신 엘로이즈(Julie ou la Nouvelle Heloise)』라는 70판을 출판한 초(超) 베스트셀러 연애소설을 쓴 사실은 더욱 잘 알지 못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평민(平民)인 생 프뢰와 귀족 출신인 쥘리는 그들의 사랑이 사회 질서와 충돌하면서, 사회적 미덕(美德)으로부터 벗어날 것인가 아니면 관습의 틀에 갇힐 것인가 고민한다. 둘의 관계를 눈치채고 애태우던 쥘리 어머니는 그녀의 사랑 때문에 죽은 셈이 된다. 따라서 그들은 미덕을 추구하는 사랑을 위해서 헤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아픈 이야기의 모티브가 바로 이 글의 주인공 아벨라르(Pierre Abelard, 1079~1142)와 엘로이즈(Heloise, 1101~1164)이다.

프랑스에는 “사랑은 괴로운 것(L’amour est une chose etrange)”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에 짙은 공감(共感)을 느끼는 것은 사랑을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랑이 매우 달콤한 것이지만 거기에 따르는 아픔과 고통은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70년대 통기타와 청바지, 포크송 문화의 여걸 양희은을 일약(一躍) 유명하게 만든, 지금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란 노래가 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나 “꿈속의 사랑” 중 서양에는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커플이 “로미오와 줄리엣”, “단테와 베아트리체”일 거다. 물론 이들은 실존인물이 아니고, 대문호 셰익스피어와 단테 아저씨가 만들어 낸 가공(架空)의 인물들이지만. 동양에는 중국 남송시대의 시인 육유(陸游)와 그의 사랑 당완(唐琓)이 있다. 그런데 오늘의 주인공은 실제 12세기 중세를 뜨겁게 달궜고, 지금까지도 각종 문학에 등장하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실존했던 주인공이다. 아벨라르는 1079년 프랑스 서부의 도시 낭트 인근 브르타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는 철학자가 되려고 상속권을 동생에게 양보했다. 당대 프랑스 보편 논쟁의 양축을 형성했던 유명론(唯名論)과 실재론(實在論) 사이에서 아벨라르는 당시 실재론 진영을 대표했던 기욤(Guillaume de Champeaux)과 친분을 쌓은 뒤, 1102년 파리로 입성하여 교육자로서의 명성을 쌓아가기 시작한다. 아벨라르는 스승인 기욤으로부터 논리학과 수사학을 공부하고 철학적 기초를 확실히 세워서 자신만의 입장인 개념론(槪念論)을 주장하며, 실재론과 유명론의 이분법적 논리에서 벗어나서 스승을 압도하게 된 것이다.

엘로이즈는 1101년에 태어나서 아벨라르가 재직하던 학교의 모기관인 노트르담성당의 참사회원(Canon)인 퓔베르의 조카딸이었다. 퓔베르는 그녀를 친딸처럼 양육하고 교육을 시켰다. 그녀를 뉴욕타임스가 "나의 밀레니엄의 전형(典型) 4인"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밀레니엄을 마감하면서, 영혼을 걸어 세상의 지혜를 알고자 했던 파우스트, 자의식(自意識)의 시대를 앞서 예견한 소설가 제인 오스틴, 불확정성 원리를 발견한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와 함께 12세기 프랑스에 살았던 그녀를 밀레니엄 전형으로 뽑았다. "중세의 가장 총명한 여성"이라는 칭송을 받는 그녀는 17살의 어린 나이임에도 고대 언어에 아주 능통할 뿐 아니라 철학, 의학 등을 비롯한 학문에 정통하고, 미모도 아주 뛰어난 말하자면 메릴린 먼로의 몸에 퀴리부인의 뇌를 장착한 여인이었나 보다. 아무튼 이들의 사랑 이야기는 루소의 연애소설을 비롯하여 최근의 명작으로 매리온 미드의 ‘하늘을 훔친 사랑’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에 의해 문학, 그림, 음악으로 재탄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계기는 그녀의 삼촌인 퓔베르의 소개 때문이다. 평소 엘로이즈의 총명함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해 오던 퓔베르가 어느 날 K-콘텐츠 <동갑내기 과외하기> 영화를 봤는지 아니면 실비아 크리스털의 <개인교수>를 감명 깊게 보고 나서 교육에 대한 생각을 바꾼 것이다. 아무리 프랑스 공교육이 좋다고 하지만 전교조 선생들 믿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될 거라고 작심한다. 그래서 3천 명이 넘는 제자를 거느린 파리 학원가의 1타 강사인 아벨라르를 특별 초빙(招聘)해서 그녀의 족집게 입주(入住) 과외 교수로 임명장을 수여한다. 실제로 아벨라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재림(再臨)이라는 칭호를 받을 만큼 어마어마한 명성이 있었고, 이에 힘입어 파리대학이 중세 최고의 대학으로 우뚝 서게 되었던 것이다. 이 정도니까 이들의 첫 만남은 설명이고 자시고 할 게 없었다. 가장 싱숭생숭한 물오를 나이인 17살 소녀의 아름다움과 BTS 뺨치는 오빠부대를 몰고 다니는 당대의 최고 인기 강사의 만남이다. 이런 빅 이벤트인 첫 만남에서 둘이 적당히 자기 소개하면서 맹숭맹숭했다면 말이 될까? 아벨라르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미성년자 성 약취(略取) 욕망에 대한 커밍아웃을 거리낌 없이 밝혔다. “나는 그때 꽤 이름이 알려진 학자였고, 젊었고, 미남이었기 때문에 내가 사랑한다면 어떤 여인도 나를 거절 못하리란 확신이 있었다. 따라서 엘로이즈를 얻는 일은 아주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담(餘談)이지만, 아벨라르에 의해 파리성당학교가 최고의 파리대학이 되고, 교수 중 일부가 영국으로 건너가 옥스퍼드대, 케임브리지대가 이루어졌다. 아벨라르는 전 유럽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게 했다. 전거(典據)가 다소 의심스럽긴 하지만 그 당시 유포되었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는 어찌나 강의를 잘했던지, 그의 신학적 입장이 문제가 되어 프랑스 ‘땅(Land)’에서 강의하는 것을 금지하자 나무 위로 올라가 강의를 했는데, 그의 강의를 듣고자 학생들이 그 나무 아래로 떼 지어 몰려들었다고 한다. 또 프랑스 ‘공중(空中)’에서 강의하는 것마저 금지하자, 센 강에 배를 띄워 그 위에서 강의를 하자 학생들이 강둑으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이다.

그녀의 삼촌은 가정교사 아벨라르를 얼마나 신임했는지 “밤낮없이 가르치고 말 안 들으면 벌을 줘도 좋다.”라고 말했다. 이는 밤낮으로 그녀의 모든 것을 마음대로 허용한다는 말이나 다름없는 거 아닌가? 계속해서 아벨라르의 자서전을 몰래 들춰보자. “책을 펼쳐 놓고 학문에 관한 대화보다는 사랑에 관한 대화가 더욱 많았으며, 설명보다는 달콤한 키스가 더욱 많았네. 내 손은 책 보다 그녀의 가슴으로 가는 일이 많았지. 사랑은 두 사람의 눈이 교과서의 문자 위를 더듬게 하지 않고 서로의 눈망울 속에 머물게 했다. 되도록 의심받지 않기 위해 때로 나는 그녀에게 매를 들었지. 분노(憤怒)의 매가 아니라 사랑의 매, 미움의 매가 아니라 애정의 매였네. 이 매질은 어떤 향료보다도 달콤했네. 결국 우리들은 사랑의 모든 형태에 탐닉했으며 사랑이 베풀어 줄 수 있는 모든 희열을 맛보았던 걸세. 이러한 기쁨들이 새로우면 새로울수록 우리는 더욱 열정적으로 거기에 빠져들었고, 그래서 쉽게 포화 상태에 도달하지도 않았네.” 정말 뜨거운 사랑이었다. 사랑의 온도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1980년대 프랑스 영화 <베티블루 37.2>를 보라. 이 영화는 당시 꽤나 감각적(感覺的)인 영화인데, 37.2라는 숫자는 여자가 오르가슴에 이르렀을 때의 신체 온도를 말한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는 과외 기간 내내 매일 37.2도를 유지했단다. 동시대의 에로틱영화인 <나인 하프 위크>의 영화 제목은 남녀의 불같은 애정이 지속되는 기간을 뜻한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 전라(全裸)의 여주인공 엘리자베스의 눈을 가리고 감각을 극대화하면서, 37.2도를 낮추려는지 차가운 얼음 조각을 가슴에서 배꼽 아래까지 천천히 혀로 굴려가는 장면이 있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애정은 명주실 꾸러미처럼 길고도 긴 사랑이었다. 우리나라의 질펀하기 짝이 없는 육담(肉談) 중에 “봄 ♀는 쇠 저(箸)를 녹이고, 가을 ♂는 가마솥을 뚫는다.”는 말이 있는데,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는 봄·가을뿐만 아니라 춘하추동 펄펄 끓어 녹이고 펑펑 뚫었다.

그러니 자연히 파리 시내는 두 사람의 몰래한 사랑 이야기와 몰카 동영상 소문으로 시끌벅적해졌는데, 오직 한 사람 그녀의 삼촌만이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연일 인터넷과 SNS, You-tube 등에 이들의 동영상이 조회수의 상위에 랭크가 되자 퓔베르도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더구나 조카 엘로이즈가 덜컥 임신까지 해버린 것이다. 그러자 그는 아벨라르의 하인들에게 돈을 풀어서 자기편으로 규합을 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두 연놈들의 애정행각을 파파라치로 촬영토록 하였다. 증거 자료를 확보해서 본 그는 배신감에 눈이 뒤집힌 퓔베르는 그 길로 사시미파 하인들을 풀어 아벨라르의 중요 부위를 댕기덩 잘라 버리고야 만다. 졸지(猝地)에 국보 1호를 잃게 된 아벨라르도 재빨리 반격에 나서서 하인들 중 한 놈을 붙잡아 그놈 거시기를 써거덕 잘라낸다. 함무라비 법전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소시지에는 소시지로 대응한 것이다. 두 사람은 바닥에 뒹구는 소시지 중 큰 것이 서로 자기 거라고 벅벅 우기다가 골든타임을 놓쳐 결국에는 봉합수술도 하지 못한 채 불구(不具)가 되고, 파리일보에 대문짝만 하게 보도가 된다. 이 사건으로 그들은 파리를 떠나 아벨라르는 생드니 수도원의 수도사가 되었고, 엘로이즈는 아르장퇴유에 있는 수녀원에 들어갔다. 이후 서로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채 안타까운 사랑의 전설을 남긴 채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어쨌든 그들은 만난 지 1년 동안 숨 가쁜 일들이 있었다. 엘로이즈는 아들 아스트롤라베를 출산했고, 둘은 비밀리에 결혼도 한다. 조카딸에 대한 강한 집착과 배신감, 아벨라르가 엘로이즈를 버리려 한다고 오해한 퓔베르는 드디어 아벨라르를 거세(去勢) 한 것이다. 퓔베르는 아벨라르의 하인을 매수하고, 악당 4명을 고용해 그를 거세토록 한 것이다. 당시 파리의 여성들은 마치 자기 남편을 잃은 것처럼 슬퍼했다고 전한다. 질녀(姪女)에 대한 이러한 퓔베르의 집착에 대해 어떤 학자들은 퓔베르가 엘로이즈의 친부였거나 엘로이즈를 여성으로서 사랑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생드니 수도원에서 극한의 고통 속에서 살던 아벨라르는 1132년 위안 삼아 <내 고통 이야기(Historia Calamitaum)>를 썼고, 이 책이 두 사람 사이의 잠들었던 사랑을 다시 크게 흔들어 놓았다. 그의 책을 읽은 엘로이즈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는 이제까지 절망에 차 있던 가운데에도 자신의 내면에는 여전히 뜨거운 사랑이 숨 쉬고 있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두 사람은 지난날에 서로가 서로를 원망했고, 회한(悔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사랑의 감미(甘味) 로운 기억을 떨쳐 버릴 수는 없어 고통에 절규(絶叫)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들의 사랑이 훗날 그토록 유명하게 평가받은 이유는 위에서 말한 그런 떠들썩한 사랑의 소동 때문이 아니고 수도원 생활을 하면서 주고받은 두 사람의 편지 내용 때문이다. 그중의 몇몇 에로틱한 구절을 소개해 보자. 엘로이즈가 보낸 첫 번째 편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내 주인 혹은 차라리 아버지, 내 남편 혹은 차라리 오빠인 아벨라르에게. 그의 여종 혹은 차라리 딸, 그의 아내 혹은 차라리 여동생인 엘로이즈가.” 또 “당신에게는 제가 당신의 아내라는 호칭이 명예롭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저는 언제까지나 당신의 정부(情婦)라는 이름으로 남는 쪽이 즐겁고, 당신이 기분 나빠 않으시다면 차라리 당신의 창부(娼婦)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싶어요.” 더 야한 것은 “미사를 올릴 때조차도, 기도가 더욱 순결해야만 할 때도, 당신과의 음란한 장면이 내 영혼 안으로 들어와 내 생각은 그 장면들을 쫓아다녀요. 나는 기도가 아니라 음란한 생각을 하게 돼요.”, “사람들은 나를 정숙(貞淑)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얼마나 위선적인지 모를 것입니다. 나를 수녀로 만든 것은 당신의 명령이었지 결코 하나님의 사랑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황제가 제게 결혼의 영예를 바치며 온 세상을 다 주겠다 약속한다 해도, 저는 그의 황후라 불리기보다 당신의 창부로 불리는 게 더 감미롭고 가치 있습니다.” 엘로이즈는 아벨라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동안 왜 연락이 없었는지를 물으며 “당신이 내게 집착하게 만든 것은 애정이 아니라 욕정(欲情), 사랑이 아니라 성욕(性慾)의 불꽃이었어요”라고 몰아세운다. 아벨라르는 엘로이즈의 추궁(追窮)에 변명하지 않는다. 자신이 엘로이즈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 엘로이즈는 욕정의 대상이었을 뿐이었기에 둘의 관계는 죄라고 정리해 버린다. 왜 그랬을까. 아벨라르는 엘로이즈가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고 수도생활에 전념하기를 바란 것 같다.

이들의 왕복서신은 이런 에로틱한 내용 못지않게 영적(靈的)인 사랑의 표현과 학문에 관한 내용이 많이 포함돼 있다. 따라서 중세 수도생활에 대한 중요한 문헌(文獻)의 하나로 13세기 이래 널리 읽히고 있다. 그들이 주고받은 편지는 파리 사람들에게 밸런타인데이 선물로도 인기가 있었다. 사랑과 종교에 대해 중세 최고의 남녀 지식인 둘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려주는 귀중한 문헌이기 때문이다. 왕래한 편지의 전반부는 사랑, 후반부는 성경, 수도자 생활, 윤리적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들의 사랑은 죽음에 이르러서도 변하지 않아 1142년 아벨라르가 죽자, 엘로이즈는 그 시체를 인수하여 매장한 뒤 그녀는 22년간이나 그 무덤을 돌보다가 63세에 죽었다. 당시 사람들이 두 사람의 무덤을 합장(合葬)하려고 관을 열었을 때 아벨라르의 유해(遺骸)가 엘로이즈를 안기 위해 팔을 벌렸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둘의 사랑에 감동한 황후 조제핀 보나파르트(1763~1814)의 명(命)으로 1817년 둘은 파리 20구에 있는 페르 라셰즈 묘지에 이장(移葬)됐다. 둘의 무덤은 연인들의 성지(聖地)다. 합장(合葬)되어 천국에서나마 그들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이루게 해 주었다. 비문(碑文)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됐다. “그들이 살아있을 때 그들의 영혼은 하나로 결합했으며, 그들이 헤어져 있을 때는 가장 다정하고 가장 영적인 편지로 보존됐던 사랑이 그들의 육신을 이 무덤 안에 재결합했다.” 이 공동묘지에는 오스카 와일드, 에디뜨 삐아프, 쇼팽, 모딜리아니, 이브 몽땅, 기욤 아폴리네르, 로시니 등이 묻혀 있고, 파리 교외의 동부에 있어서 동부묘지라고도 하며 가장 규모가 크다. 매년 3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찾는 관광지이고, 루이 14세의 고해 사제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투어 프로그램도 있다.

그들은 죽어서 무덤에 묻혔지만 그들의 사랑과 생각은 후세의 문학이나 철학에 남아, 그들의 이루어지지 않았던 사랑은 아직까지도 이루어지기 위해 서로를 갈구하고 있을 것이다. 후세 불란서 시인 프랑스와 비용(Francois Villon : 1431~1463)의 시 “옛 미녀를 노래하는 발라드”를 보면 아래와 같이 노래하고 있다.

내게 말하라, 어느 나라 들판에 로마의 미녀 플로라는 있는가?

(플로라는 폼페이우스가 좋아했던 창녀)

아르키피아데스와 또한 타이스는 그 아름다움에서 한 핏줄의 자매니라.

(아르키피아데스는 소포클레스가 사랑했던 아르키파인 듯, 타이스는 아테네의 유명한 창녀)

강물의 언저리나 연못가에서 부르면 대답하는 메아리 에코

(에코는 그리스 신화에서 나무의 요정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것 세상에 없느니, 오오 옛 미인들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 어디 있는가, 지성 높은 엘로이즈

그녀 탓에 아벨라르는 남성을 잃고 생드니에서 수도승이 되었나니

사랑 탓에 당해야 했던 괴로움이어라.

지금 어디 있는가, 뷔리당을 자루에 집어넣고 센 강에다 던지라고 명령한 여왕님은

(뷔리당은 철학자 및 과학자로 백년전쟁 당시에 프랑스 장 2세 왕의 왕비와 불륜으로 격노한 왕으로부터 자루에 넣어서 센 강에 던져져 죽었다. 뷔리당의 당나귀 이론이 유명하다.)

오오 옛 미인들은 어디에 있는가.

인어 같은 목소리로 기막히게 노래하던 백합 같은 흰 얼굴의 블랑슈 태후

(블랑슈는 카스티야 왕국의 딸로 프랑스 루이 9세 왕의 모후로 섭정을 했다.)

발이 큰 베르트 공주, 비에트리스 그리고 알리스, 멘느 고을 다스리던 아랑뷔르지스

(베르트 공주는 샤를 마뉴 대제의 모후로서 헝가리 공국의 딸이며 한쪽 다리가 굵었다. 비에트리스는 시칠리아왕 샤를 당주의 왕비인데 베아트리체로도 불린다. 알리스는 루이 7세 왕의 세 번째 왕비로 아델르로도 불린다. 아랑뷔르지스는 멘느 지방의 백작 부인이다.)

루앙에서 영국인이 화형에 처한 로렌의 위엄 있는 잔느

(잔느는 백년전쟁에 참전한 성녀 잔 다르크)

이 여인들은 지금 어디 계신가, 성모님은 아시는가?

오오 옛 미인들은 어디 있는가.

노래하는 그대여, 내가 말한 미인들이 어디로 갔는지 묻지 말라.

가락 없이 후렴만 되풀이하자

오오 옛 미인들은 어디 있는가?


참고로 NYT가 선정한 밀레니엄 전형(典型) 4인에 대하여 좀 더 알고 싶으면 다음을 보라.


◆ 궁극의 연인 '엘로이즈'

1100년(1101년, 혹은 1098년 설도 있다) 생.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피에르 아벨라르와 사제 관계로 만나 사랑에 빠졌고 그의 아이까지 낳았다. 그녀를 나의 시대의 한 전형으로 보는 것은 여성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던 시대에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 뻔뻔스러울 정도의 지성 때문도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삶을 파멸시킨 열정의 쾌락을 저주하지도 잊지도 않은 그녀만의 강렬한 자의식 때문이다. 이미 아이까지 낳은 그들의 관계가 발각됐을 때도 엘로이즈는 특유의 자의식(自意識)을 버리지 않았다.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결혼을 하는 것은 의도가 불순한 일이라며 아벨라르의 제의를 거절한 것이다(일설에는 비밀결혼을 올린 것으로 돼 있다). 이후 엘로이즈는 수녀로 일생을 마쳤으며, 두 사람은 죽은 뒤에야 나란히 묻힐 수 있었다.


◆ 자신의 영혼을 건 '파우스트'

그는 세상의 모든 비밀과 지혜를 알고자 했다. 그래서 자신의 영혼을 걸고 악마와 거래했다. 파우스트의 이야기는 7세기부터 나오는데, 그에 대한 해석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조금씩 바뀌어 왔다. 마침내 파우스트는 지식인들의 궁극적인 책임성을 상징하는 우화(寓話)로 해석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파우스트는 누구인가? 라듐을 발견하기 위해 방사능에 목숨까지 빼앗겨 가며 연구에 매진했던 마리 퀴리, 미얀마의 군부독재에 항거해 민주주의의 희망으로 남아 있는 아웅산 수지 여사, 이슬람교도들의 표적이 되어 지금도 은둔생활을 해야 하는 샐먼 루시디. 특히 루시디는 저물어가는 밀레니엄의 가장 상징적인 파우스트인지도 모른다.


◆ 멋진 예술가 '제인 오스틴'

제인 오스틴(1775~1817)의 첫 이미지는 머리에 쓴 보닛과 무표정한 얼굴, 흘겨보는 듯한 눈 같은 것들이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그녀의 외형적인 삶은 퍽 고단한 것이었다. 그녀의 사랑은 불행했고, 대인관계도 썩 좋지 못했으며 다른 작가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 우울증에도 시달렸다. 오늘날 그녀를 빛나게 하는 것은, 여러 소설들로 남은 그녀의 내면의 드라마들이다. 그녀의 소설들은, 이제는 더없이 친숙해진 주제인 세계와 개인의 관계를 주로 다룬다. 텅 빈 듯한 그녀의 눈 뒤에는 그처럼 현대적인 감각이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소설 속에서 펼쳐 보이는 각 등장인물들의 시시콜콜한 사생활과 미묘한 감정의 스펙트럼은 1970년대를 거쳐 극한에까지 다다른 자의식의 시대를 앞서 예견한 것처럼 보인다.


◆ 급진적인 사상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하이젠베르크(1901~1976)는 1927년 세상을 뒤흔든 불확정성의 원리를 발표했다. 이는 어떤 물체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정확히 측정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법칙. 전자와 같은 원자구성 입자의 속도를 측정하려고 하면 입자들이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튀어나와서, 이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이 무의미해진다는 것이다. 그의 원리가 중요한 것은 자유의지와 결정론에 관한 함축(含蓄) 때문도, 우리는 이 세상을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시사(示唆) 때문도 아니다. 우리가 세상을 알 수 없는 것은, 알려고 하는 바로 그 노력이 세상을 끊임없이 바꾸기 때문이라는 함축 때문이다. 그로부터 하이젠베르크는 자아(自我)에 대한 생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인간 자신은 본질적으로 그가 놓인 환경으로부터 소외된 존재인데, 그 소외를 극복하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그가 발견한 모든 것을 필연적으로 변질(變質)시키거나 타락시켜 버린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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