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흐름이 길어 마치 나그네가 멀리 가는 것 같다. ‘담담’은 맛이 없는 것이고, ‘유유’는 다함이 없는 것이다. 강물로써 객의 심정을 일으켰다. 이때에 위승경이 장역지(張易之)의 당에 연좌되어 남쪽 영(嶺) 너머로 귀양 가니, 장강을 따라 지나가야 하는 까닭에 이 恨(한)자로 말한 것은 나그네의 정을 쫓아 오는 것이니, 꽃이 바람에 떨어지는 것이 마치 사람이 표류하는 것 같아, 꽃의 한이 또한 사람의 한인 까닭에 ‘서로 함께 한스러워한다.’라고 말했다. 꽃이 땅에 떨어지며 어찌 소리를 냈겠는가?
사람에 한이 있으나, 알리고 하소연할 수 없는 까닭에 떨어지는 꽃으로 일반화하였으니, 두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담담한 강물은 저와 같고, 유유한 나그네 심정도 이와 같아, 곤궁하고 비탄한 마음을 번민에 붙이는 까닭이다. 또 저 꽃이 떨어져 땅에 이르도록 소리가 없는 것이 나와 함께 알리고 하소연할 수 없는 처지이므로, 그 서러움을 함께 하였으니 형제가 분리되는 정경이 과연 어찌 같지 않겠는가.
* 韋承慶(위승경 ; 639-705) : 자는 연휴(延休), 정주양무(鄭州陽武, 지금의 허난성 위안양) 사람. 작가는 당(唐) 중종 신룡 원년(705)에 영남으로 유배되어 고요현위(高要縣尉)로 강등되었고, 멀리 도성 장안의 남쪽에 있었기 때문에 강등되어 남행을 칭하게 되었다. 고요현위(高要縣은 지금의 광둥성 자오칭시(肇庆市)에 속한다. 그의 동생 위사립(韋嗣立)도 장역지의 사건으로 인해 라오저우(饒州) 즉 현재 장시성 보양현(江西省 波阳县)의 자사(剌史)로 좌천되었다. 위승경과 그의 아버지 위사겸과 이복동생 위사립은 한 집안의 부자 세 명으로 모두 재상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