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잇따라 진상하는 응제시(應製詩)다. 설날에 신하들에게 잣나무 잎을 내려 주시었는데, 잎의 푸름은 봄기운을 맞이하여 점점 더 푸르고, 가지의 차가움은 한해를 지내는 기색이 오히려 차가우니, 이는 잣나무의 절개와 지조가 얼음과 눈을 견딜 수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잣 잎의 수명을 보전하여 만년의 기쁨을 늘 받들기를 원하다는 것은 임금을 축원하는 말이다.
* 武平一(무평일) : 본명은 甄(견)이다. 무후가 권력을 잡았을 때, 그에게 관직에 들어가라고 조서를 내렸으나, 무평일은 시비에 휘말릴까 봐 겁을 먹고 계속 가지 못하고, 숭산에 은거하여 부도법을 닦았다. 중종이 복위된 후, 무평일은 모친상을 입었지만 여전히 기거사인(居居舍人)으로 임명되었고, 중종 경룡 2년(708년)에 수문관 직학사를 겸임하였으며, 박학통고(博學通古)로 중종의 사랑을 받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험공사인 외랑(外郞)을 지냈다. 무평일은 무씨 일족이 궁정 안팎의 싸움에 휘말리는 것을 매우 걱정하여, 경룡 2년에 그는 자신의 집(즉, 무가)의 권총(權寵)을 손상시키지 말라는 서신을 올렸지만, 중종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경룡 3년 9월, 태평·안락 두 공주가 파당을 세우고, 더욱 혼란에 직면하여 중종은 그에게 책략을 물었고, 무평일은 "깊이 가르침하여 간험(姦險)을 척출하는 것이 좋다"라고 간언 하였다. "자비를 억제하고 엄중히 다스리며, 금지령을 나타내며, 악을 쌓는 명령이 없다"라고 그의 충절을 기려 그에게 하사하였으나, 여전히 그의 말대로 행하지 않았다. 당 현종 즉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무평일은 소주로 좌천되어 군에 입대하였고, 이후 금단령을 지냈다. 비록 좌천되었지만, 무평일은 "이미 유배되어 명성을 잃지 않았다"라고 당시 왕완, 조영, 저광희 등 시인들이 오지를 여행하며 시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