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식이 장안으로 들어가는 길에 구름사이 아침 해가 홀연히 동쪽 하늘에 떠오르는 것을 보니, 새벽 경치를 재촉하여, 새벽의 상쾌한 때에 차고 시원한 기운과 푸르고 아득한 경치를 구경할 만한 것이다. 스스로 탄식하는 풍광이 세월을 재촉하여 흐름과 같으니, 덧없는 인생이 얼마인가? 이제 정벌하러 가는 길을 멈추어 평화를 이룰 것을 점칠 수 있고, 장안으로 돌아감이 모든 꽃이 다투어 필 때 있을 것이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이는 기쁜 뜻을 말한 것이다
* 崔湜(최식 ; 671년 – 713년) : 자는 청란(澄澜), 정주 안희(定州 安喜, 현재 허베이 딩현定縣) 사람. 당나라 재상, 중서시랑 최인사(崔仁師)의 손자이다. 호부상서 최읍의 아들. 최식은 박릉 최씨 안평방 출신으로, 진사에 급제하여 《삼교주영(三教珠英》 편찬에 참여했으며, 무삼사, 상관완얼(上官婉儿)에 차례로 의존하여 고공원외랑(考功员外郎)에서 중서시랑, 동평장사로 옮겼다. 이후 수뢰로 강주 사마(司馬)로 좌천되었다가 곧 상서좌승(尙書左丞)으로 복권되었다. 당 중종이 승하한 후, 최식은 위황후에게 의지하여 이부시랑으로 전임되었다. 당륭의 쿠데타 후, 그는 다시 태평공주에게 의지하여 동중서 문하 3품으로 승진하고 중서령에 들어갔다. 개원 원년(713년)에 당 현종이 태평공주를 제거하자 최식은 영남으로 귀양갔다가 사약을 받았다. 당시 나이 마흔세 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