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시곗바늘을 뒤로 돌려서 1760년대 카리브해의 서인도 제도(諸島) 중 하나인 마르티니크(Martinque)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섬은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로 모든 실권은 프랑스에서 파견된 프랑스 귀족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곳에 아름다운 두 처녀가 있었으니, 이들이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한 처녀는 1763년에 태어났고, 다른 처녀는 1768년에 태어났다. 태어날 적에는 두 집안 모두 좋은 가문으로 거대한 사탕수수 농장을 경영하는 부유한 집안이었다. 말하자면 식민지의 최고 고위층 상류 사회 멤버였지. 전설(傳說)에 따르면 다섯 살 차이인 이들은 친자매처럼 서로의 집을 오가며 자매보다 친하게 지냈단다. 어느 날 언니가 동생네 집으로 놀러 갔는데, 동생과 같이 소풍 겸해서 사탕수수 농장으로 나가게 되었다. 둘은 들뜬 어린 소녀의 가슴을 안고 깔깔거리면서 사탕수수 밭길을 걸으면서 놀고 있었다. 밭에는 아프리카에서 잡혀온 흑인 노예들이 구슬땀을 흘리면서 일하고 있었다. 가끔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들의 맨살 등짝으로 집사(執事)들의 호된 가죽 채찍이 시뻘건 줄을 남기면 내리쳐지곤 했다. 어린 마음에 그런 광경을 본 농장주 딸들은 가련한 마음이었다.
마침 그때 한 늙고 병들어 보이는 흑인여인이 몇 차례 매질을 당하는 걸 보자 너무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이에 그들은 관리인을 보고 그만하라고 외치면서 그 늙은 흑인 노예를 잠시 쉬도록 보호해 주었다. 눈물을 흘리면서 고마워하는 그녀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조금 나누어 주었다. 그들의 고마움에 그녀는 눈물을 가득 담은 눈길을 보내면 고귀한 아가씨들이 마음씨도 곱다면서, 자기는 아프리카에서 추장의 딸이었는데 사람의 미래를 어느 정도 볼 수 있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은 이 호기심 많은 아가씨들이 그럼 자기들의 미래를 좀 알려 달라고 졸랐다. 그 흑인은 점술(占術)을 사용하지 않은지 오래되어서 잘 맞출지는 모르지만 한번 해보겠다고 했다. 열심히 아프리카 토속어 주문(呪文)을 술라술라 외우더니 먼저 언니부터 얼굴과 손금을 들여다보더니 그녀의 운명을 좔좔좔 말하기 시작한다. “에고고, 곧 집안이 망하겠군요. 하지만 낙담(落膽) 하지 마세요. 그런대로 좋은 혼처가 나타나서 신분이 더 높게 될 겁니다. 아이고 결혼을 두 번할 팔자네요. 첫 남편이 죽고 아이들도 있지만 곧 귀한 사람을 만나서 귀한 자리에 오를 것 같군요. 국모(國母)님이 될 운명입니다.” 깜짝 놀란 처녀는 이 할머니가 잘 대해 줬더니 실성(失性)을 했나 하며 반신반의(半信半疑) 했다.
그 노예는 두 번째 처녀의 운명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초년 운이 좋지만 얼마 못 가서 바다에서 큰 횡액(橫厄)을 당해요. 우리처럼 잡힌 몸이 되어 어디론가 먼 나라로 팔려갈 팔자군요. 하지만 물 설고 말 설은 곳이라고 해서 못 살 곳은 아니랍니다. 거기서 우여곡절(迂餘曲折) 고생 끝에 크게 성공하여 거기서 국모(國母)가 될 운이군요. 두 아가씨 모두 너무 귀한 팔자인 줄 몰라 뵈었습니다.” 둘 다 이 흑인 노예의 점 풀이에 두 눈이 휘둥그레지는 건 당연했다. 프랑스 본토에서 살고 있는 것도 아니고 수만리 떨어진 식민지 섬에서 살고 있는데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점괘였다. 하지만 끝이 나쁘지 않다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았다. 아니 내심 어느 날 어디에서 백마를 타고 올 왕자님을 기다리는 자세가 되고 말았다.
이 전설의 내용을 눈치챘을지는 모르지만, 이야기의 첫 번째 소녀는 저 유명한 나폴레옹의 의 부인 조세핀이다. 잘 아려져 있다시피 조세핀의 본명은 마리 조제프 로즈 타셰 드 라 파제리이다. 그녀의 친정인 파제리 가문은 마르티니크에서 사탕수수 농장을 경영하는 부유한 집안이었지만 강력한 허리케인으로 인해 사업이 망해 빈궁(貧窮)한 처지로 전락했다. 그녀의 고모가 프랑스 본토의 부자 귀족의 정부(情婦)가 되는 대가로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살게 되었다. 그리고 고모의 도움으로 본토로 와서 고모의 귀족 출신 내연남의 막내아들 알렉상드르 드 보아르네와 결혼하였고, 그 후는 역사의 내용과 전설의 점괘(占卦)가 같다. 이 보아르네 가문과 두 번째 처녀의 집안이 약간 먼 친척간이라서 그 집안으로 시집간 조세핀과 두 번째 처녀가 사촌간이라 일반적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 사촌 정도가 아니고 이웃사촌에 가깝고, 혼인 관계에 의한 먼 친척이었겠지만 어릴 때 같이 자란 고향 동네 언니 동생의 친분이 아니었을까 보인다.
아무튼 오늘의 주인공인 두 번째 소녀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좀 생소(生疏)한 이름일지 모른다. 정사(正史)와 전설이 혼재되어서 어느 것이 정확한지 아직도 심한 논쟁과 고증의 과정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바로 에메 뒤 빅 데 데 리베리(Aimée du Buc de Rivery)이다. 보통 줄여서 에메 뒤 빅이라고 부른다. 에메 뒤 빅은 1768년 12월 4일 카리브해의 마르티니크 섬의 남서쪽 지점 로열에서 부유한 프랑스 농장주 앙리 뒤 뷕 데 리베리(1748~1808)와 마리 안 아르부셋 보퐁(1739~1811)의 딸로 태어났다. 조세핀이 고모의 부름을 받아 프랑스 본국으로 들어가자, 에메(줄여서 에메라고 부른다)도 프랑스 본토의 수녀원 학교로 공부하기 위해 보내진다. 그녀의 나이 20살쯤인 1788년 그녀는 고향 집으로 돌아가려고 배를 탔는데, 점괘에서 말한 데로 대서양을 횡단하던 중에 바르바리 해적선에게 통째로 납치가 된다. 바르바리 해적선은 일명 오스만 해적으로 지중해와 서아프리카의 대서양 등지에서 노략질을 했다. 상선이든 여객선이든 무조건 나포(拿捕)하여 오스만제국 즉 지금의 터키(튀르키예)에 노예로 팔던 집단이다. 흑인·백인·황인을 가리지 않고 종교도 불문으로 잡아서 넘겼다. 당시 해적선에 잡힌 남자들은 노예나 거세(去勢)되어 왕궁의 환관으로 팔렸다. 여자들은 용모에 따라 등급을 매겨 후진 여자들은 싸구려 사창가나 가정의 노예로, 쭉쭉빵빵 여자들은 하렘의 후궁으로 팔려 나갔다.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라듯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자는 예쁜 게 계급이다.
운 좋게도 에메는 나름대로 미스 프랑스급 미모를 갖추었고, 파리 최고의 교육기관인 수녀원부설 학교에서 많은 공부를 해서 최고의 재원(才媛)이었을 것이다. 여객선을 나포해서 노획물을 점검하던 해적 선장은 에메를 보고 침을 바가지로 질질 흘리며 껄떡거렸다. 그래도 당시 해적들도 힘으로 물건을 취하지만 노획물을 팔아야 하는 입장이라서 말하자면 직업의 반은 해적이고 반은 상인이었다. 상인들의 상도의(商道義) 중 제일 덕목이 무엇인지 아시는가? 바로 자기 상품에 손을 대지 않는 것이다. 가장 최고 품질의 상품을 최고의 고객에게 온전히 판매하는 것이 그들의 최고의 덕목이랄까. 어쨌든 최고의 상품 즉 중국 역사에서 말하는 최고의 상품이 바로 기화(奇貨)인 최고의 미녀이다. 중국 최초이자 최고의 장사꾼 여불위(呂不韋)가 금은보화 보다 더 귀한 물건을 팔면 나라를 살 수 있다는 아버지의 충고를 들었다. 따라서 진시황(秦始皇)을 배속에 임신한 미녀 조희(趙姬)를 진(秦) 나라 왕자 영자초(嬴子楚)에게 팔지 않았던가.
이 해적 선장 놈도 침을 흘렸지만 문득 ‘아니지, 이 여자를 술탄에게 헌상(獻上)하면 좋은 수가 있겠지.’라고 생각했다. 그 길로 배를 몰아 콘스탄티노플로 간다.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은 튀르키예 사람들에게 점령된 이래 500년에 걸쳐 오스만 제국의 수도인 이스탄불이다. 그 당시에도 2천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쨍쨍하게 이름 날렸던 도시인 그곳을 지배하던 황제는 술탄 압둘 하미드 1세였다. 중세의 이슬람 문화도 서양 문화가 무시하지 못할 만큼 각 분야에서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을 때라 그들이 유럽 알기를 발바닥의 때만큼도 안 여길 그런 수준이었다. 그런 만큼 술탄의 권위나 사치 또한 상상을 초월했다. 술탄의 하렘(Harem)에는 적게는 수백 명 많게는 수천 명의 여자 노예들이 우글우글 대면서 오직 술탄 한 사람만 바라보고 있었다.
하렘의 어원은 아랍어에서 ‘금지된 것’을 의미하는 ‘하람(ح’م)'이다. 하람은 원래 쿠란 혹은 샤리아에서 금지하는 모든 것을 가리키지만, 좁은 의미로는 각 가정에서 손님이나 외부인이 들어갈 수 없는 여인들의 방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규방(閨房) 내지는 안방이다. 전통적으로 아랍, 튀르키예 지역의 전통가옥에는 남성들의 구역인 셀람륵(Selamlık)과 여성들의 구역인 하람륵(Haramlık)이 존재하는데, 궁전에도 예외가 없었다. 이것이 지금처럼 일부다처제의 상황이나 환경을 가리키는 말로 변질된 것은 오스만 제국의 하렘 제도에 무지한 유럽인들에게 잘못 인식된 것이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양에서의 뉘앙스는 ‘깊숙한 것’, ‘신성한 것’, ‘손 닿을 수 없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그래서 일단 하렘에 들어간 여인들은 죽을 때까지 빠져나올 수 없으며 그곳에 있는 동안에는 오로지 술탄 한 사람의 눈에 들기 위해 날이면 날마다 몸매 다듬고 성 기교를 익히는 걸로 세월 보낸다 생각한다. 숱하게 많은 미녀들 중에서 술탄의 손길이 닿는 여자는 극소수여서 그야말로 은총을 받는 건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건 당연하다.
하렘에서도 조선판 여인천하가 존재하듯이 당연히 아랍판 여인천하가 득세한다. 현직 술탄의 어머니를 정점(頂点)으로 하여 본부인, 첩, 아들을 낳은 여인, 딸을 낳은 여인, 승은(承恩)을 입은 여인, 손목 한번 못 잡혀 본 여인 등등 당시의 하렘에서도 여인들 간의 피 튀기는 파워 게임이 있었다. 프랑스의 부유한 귀족 집안 예쁜 딸내미가 어쩌다가 재수 옴 붙어 해적에게 납치되어 이런 곳에 끌려와 씨받이를 해야 하다니 억장이 무너진다. 씨받이라도 하면 최고의 영예이겠지만 술탄의 눈에 들지 못하면 한평생 하늘 한번 못 보고 처녀로 늙어 죽어야 할 팔자가 절망스럽다. 그러나 그동안 잊고 지냈던 어릴 때 사탕수수 농장의 노예가 말한 점괘가 문득 떠올려진 것이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이렇게 절망감이나 눈물 콧물로 밤낮을 지새우던 생활을 과감히 청산하고 적극적으로 대시하기로 마음을 먹은 거다. 석가모니도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즉 모든 것이 마음먹기 달렸다고 하지 않았는가. 작심을 한 에메는 우선 이름부터 과감하게 그들의 스타일로 개명(改名)하고 모태(母胎) 신앙이었던 천주교에서 이슬람교로 회까닥 개종(改宗)까지 해서 철저히 현지화에 성공한 것이다. 개명한 그녀의 이름은 나크시딜(Nakshidil)이다.
하렘이 슐탄의 모후 1인을 정점으로 힘의 균형을 유지하지만, 내부적으로는 다양한 형태의 분파들이 서로 암투와 연합을 하면서 권력 쟁탈전을 격심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의 궁중 비화(祕話) 정도는 비교도 안 된다. 다만 아랍의 관습상 하렘 내부의 이야기가 밖으로 나가거나 기록화되는 것을 엄격히 금했기 때문에 공식적인 기록이 없을 뿐이다. 에메 즉 나크시달은 하렘 내의 여러 분파들을 놓고 심사숙고한 끝에 가장 다루기 유리하면서도 슐탄과 접선하기 좋은 패거리에 신입으로 가입을 하게 됐다. 물론 신입의 신고식은 호되게 치렀음을 물어보지 않아도 뻔하다. 말도 안 통하는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말을 빨리 배워야 하고, 자기는 그래도 프랑스 명문인데 그들과 다른 뭔가 독특한 교양과 향기를 나타내고자 했다. 그래서 자기 주변 하렘 여인들에게 열심히 불어(佛語)를 가르치고, 프랑스의 예절과 문화 특히 프랑스 왕궁의 각종 문화를 시도 때도 없이 전파시켰다. 그것이 주효(奏效)를 한 것이다. 당시 오스만 제국도 국제적인 제국이고, 수도 콘스탄티노풀도 국제도시였다. 술탄 압둘 하미드 1세 또한 유럽으로 진출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며, 프랑스는 그 당시 나폴레옹이 강장 왕성하게 이탈리아를 정복하고 그 영토 확장의 야욕이 사방으로 넘쳐나는 시절이었다. 그런 시점에 하렘 안에 젊고 예쁜 프랑스 처녀가 있으니 당연히 술탄의 눈에 필(Feel)이 확 꽂히게 된 것이다.
그녀는 술탄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고, 그에게 프랑스 사상을 소개하며, 오스만 제국의 대신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쳤다. 처음으로, 상설 대사가 콘스탄티노플에서 파리로 파견되기도 했다. 전설은 그녀가 술탄이 프랑스식 개혁을 하도록 영향을 미쳤다고 전한다. 낮에는 이렇게 하고, 밤에는 술탄의 품에 안겨 침실로 직행하는 행운의 동아줄을 잡은 것이다. 아랍은 고래(古來)로 대근인(大根人)이라는 소문도 존재하고, 그들은 맨날 사막의 뜨거운 모래에 그것을 단련하여 물건의 성능이 세계 최고라는 전설이 민간에 떠돈다. 그래서 에메는 밤마다 천상과 지옥을 몇 번씩 왔다 갔다 했다는데, 믿거나 말거나 이다. 역시 흑인 점쟁이의 점술이 무척 용했나 보다. 우리나라 귀 얇은 사모님들이 도시락 싸들고 마르티니크로 점 보러 줄 서서 갈까 봐 걱정이네. 나크시딜(에메)은 한 술 더 떠서 일 년이 지나자 왕고추 달린 술탄의 왕자를 생산하는 대박을 터뜨리게 된다. 이제 에메 즉 나크시딜도 큰 소리 뻥뻥 치고 콧대 세우며 아랍판 여인천하의 주연배우로 오스만 국영 TV의 9시 뉴스와 이스탄불일보의 1면을 대문짝만 하게 장식하기 일쑤이다. 명실 공히 술탄의 아내가 되어 정식 명칭이 ‘나크시딜 슐탄’으로 되어 모든 정권을 잡게 된다. 해적선에 잡혀서 하렘의 노예로 팔려온 이국 땅의 여자가 막강 오스만 제국의 국모(國母)가 된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게 순조롭지는 않다. 아들을 낳은 그 후 1789년에 남편 압둘 하미드 1세가 죽어 버린 것이다.
슐탄의 정식 부인이 되었지만 아들 마흐무트 2세는 아직 유아인데 남편이 없으니 왕위를 계승할 기회조차 상실한 것처럼 보였다. 또한 나머지 처첩(妻妾)들이나 아들의 형제나 삼촌·사촌형제들이라고 두 손 놓고 멍하니 가만히 있겠는가? 중국이나 우리나라 정치판에서 요즘 유행하는 이합집산(離合集散), 합종연횡(合從連橫) 전략은 어디에서나 어느 때에나 있게 마련이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고, 적의 적은 우리의 동지이며, 적과의 동침도 불사(不辭)하며, 안 되면 다시 헤쳐 모이는 것이다. 하렘의 여인들도 그대로 본받아 이리저리 연합전선을 구축해서 에메를 공격하게 된다. 궁중 내의 반란이 일어나고, 반대파 군사들에게 몰려 목숨이 경각(頃刻)에 달린 상황이 몰아친다. 마친 모난 돌이 정 맞고, 굴어 들어온 돌을 쫓아내기 위해 있던 돌들이 합세를 한 것이다. 다급한 에메는 프랑스로 파견한 대사(大使)를 동원하는 등 모든 연락책을 총 동원하여 고향 사촌언니 조세핀에게 초급(超急) SOS를 때린다. 그녀와 어려울 때 함께하던 우애가 남달랐던 조세핀은 나폴레옹을 들들들 참깨 볶듯 볶아 당시 이탈리아 정복을 위해 파견되어 튀르키예 근처에 있던 프랑스 군대를 즉시 파병하기에 이른다. 궁지에 몰리던 에메는 그 덕에 정변을 잠재우고 한숨을 돌리게 된다.
아무튼 남편이 죽고 난 후 19년간의 이러한 어려운 역경을 딛고 드디어 그녀의 아들 마흐무트 2세가 1808년에 술탄으로 즉위했다. 그녀는 나크시딜 술탄 발리드(Nakshidil Sultan Valide) 즉 술탄의 모후 나크시딜로 불렸다. 그녀는 아들 마흐무트에게도 프랑스식 교육을 많이 해서 유럽 문화에 익숙했다. 그는 프랑스식 신문을 시작하고, 모후 나크시딜이 토카프 궁전을 그 당시 프랑스에서 인기 있었던 로코코 양식으로 장식하도록 허용했다. 또한 그녀가 외교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마흐무트는 재임기간 중 대담한 국가 프로젝트를 훌륭하게 진행했다. 그래서 그를 일컬어 “표트르 대제의 재래(再來)”라고도 찬양했다. 표트르대제는 당시 유럽의 여러 나라로부터 변방의 원시인 취급을 받던 러시아를 일약 유럽의 당당한 주요 일원으로 끌어올린 황제이다. 러시아는 늘 부동항(不凍港)을 갖는 것이 소원이었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남방 정책을 쓰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두고 전쟁이 불가피했다. 마흐무트 2세의 아버지 압둘 하미드 1세 때부터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은 전쟁 중이었다. 영토 확장에 광신도적인 나폴레옹도 이집트의 정벌과 스페인을 포함한 이베리아 반도의 점령이 트라팔가르 해전의 참패로 물거품으로 돌아가자 의기소침해 있었다.
그래도 호시탐탐(虎視眈眈) 동쪽의 넓은 땅덩어리를 노리고 있었다. 그래서 1812년 드디어 64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침공하게 된 것이다. 그는 1798년부터 이집트 원정기간 동안 열심히 바람을 피우던 왕비 조세핀의 엉덩이를 걷어차 쫓아내면서 1810년에 이혼을 한 것이다. 말하자면 에메가 술탄의 모후로서 정권을 잡은 2년 후에 사촌언니 조세핀은 나폴레옹 황제에게 소박을 맞는다. 아기를 못 낳는다는 게 이혼의 주된 이유였지만, 조세핀의 바람기에 나폴레옹이 신물이 났기 때문이다. 사촌언니를 끔찍이나 좋아했던 에메는 언니의 소박 소식에 격분한 나머지 친정이면서 조국인 프랑스와 거리를 두게 된다. 이것은 프랑스로서는 치명적 손실이었다. 왜냐면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공격할 때 튀르키예로서는 아직도 러시아와 전부터 해오던 전쟁이 마무리된 것이 아니었고 약간 소강상태였다. 그러니 의당 튀르키예는 프랑스와 연합해서 숙적인 러시아를 쳐야 했는데 오히려 러시아와 덜컥 휴전협정을 맺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났던 거다. 결과적으로 나폴레옹은 이 전투에서 개박살 나서 무려 57만 명의 군인을 잃고 처절하게 퇴각하고 그 자신도 인생의 종말을 맞게 된다. 역사에 만약이 없다고들 하지만 만약에 이때 튀르키예가 프랑스와 연합해서 러시아의 옆구리와 뒤통수를 공격했다면, 아니 최소한 그간의 전쟁에 대한 휴전협정이라도 하지 않았다면 유럽의 지도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나폴레옹으로서는 바람난 마누라를 내치고 오스트리아의 젊은 왕녀를 마누라로 데려오는 기분 좋은 일이었지만 역사적으로는 엄청난 변혁의 단초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러시아와의 휴전 협정의 이면에는 바로 에메 뒤 빅이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나폴레옹이 한 짓에 분노하여 프랑스의 숙적이었던 영국과도 손을 잡고,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길에 오르자 본인의 해박한 지식과 언변으로 아들을 설득하여 러시아와 전쟁을 그만하자고 휴전을 해버린 거다. 그렇다면 왜 그녀가 그렇게 분노했을까? 그것은 바로 자신과 어렸을 때 친자매처럼 지냈던 조세핀이 자기가 관련된 오스만 제국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엄청나게 도와준 것에 대하여 늘 조세핀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세핀을 나폴레옹이 강제로 발로 내 차 버리니 분노하여 나폴레옹에게 처절한 복수를 안긴 것이다. 오스트리아 왕녀와 정략결혼을 하기 위해 조세핀을 이혼녀의 신세로 전락시킨 나폴레옹을 에메는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한여름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을 남자들은 재삼재사 명심하길 바란다. 에메는 1817년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이스탄불 파티흐 모스크의 나키시딜 술탄 묘지에 안장되었다. 파티흐 모스크는 비잔틴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했던 메흐메트 2세(II. Mehmet, 재위 1444~1481)의 명으로 건립된 것이다. 파티흐(Fatih)는 ‘정복’이라는 뜻으로 그의 별명이다. 그는 그리스 정교회 교회(Hagioi Apostoloi)가 있었던 자리에 이슬람 모스크를 비롯한 부속 건물을 짓도록 명했고, 이는 승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곳에 여러 술탄들의 영묘가 있다. 나크시딜 술탄의 묘지에는 이런 묘비가 남아 있다. “아름다운 사람, 외국 귀족의 피를 받은 모후 폐하. 동양의 문을 새로운 빛으로 펼친 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