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애물단지란 말을 가끔 쓴다. 애물단지의 뜻과 유래는 무엇일까? 원래 애물단지란 어린 나이로 부모 보다 먼저 죽은 자식을 나타내는 말이다. 성인이 죽으면 관(棺)에다 안치하여 상례(喪禮)에 따라 장사를 치르지만, 낳은 지 얼마 안 되거나 어린아이가 죽으면 성인용 관을 사용하여 장례를 치르기도 그렇고, 너무 가슴 아픈 일을 남에게 널리 알리기도 곤란해서 적당히 단지에 담아서 매장을 하곤 했다. 단지가 시신을 담는 관의 역할인 것이다. 정식 절차에 따라 장례를 치르고 무덤의 봉분(封墳)과 비석 등도 만들고 싶은 부모의 심정이지만 대충 단지에 담아 봉분도 없이 그냥 땅에 묻고 마치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지내자니 얼마나 애가 타고 가슴이 아프겠는가. 그래서 의미가 조금씩 변하여 몹시 애를 태우거나 성가시게 구는 물건이나 사람을 말한다. 모든 농사 중에 자식농사만큼 어려운 게 없다고들 한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이라고 해서 다를 거 하나 없다. 거지나 황제도 자식 이기는 부모 없는 것이다.
당나라의 건국에 아버지를 도와 지대한 공헌을 하고, 본인이 즉위해서는 정관(貞觀)의 치(治)라는 눈부신 정치를 했던 걸출(傑出)한 황제 당태종(唐太宗)도 예외는 아니다. 당태종은 담력(膽力)도 세고 정치도 잘하여 당나라를 건국하는데 엄청 기여했는데, 밤무대에서의 힘과 정치도 잘했는가 보다. 그는 수천 명의 궁녀가 있었겠지만 자주 애정을 쏟아준 여인이 기록상으로 정비(正妃) 문덕황후(文德皇后)를 포함하여 26명에 달한다. 그는 이 여자들로부터 14남 21녀를 낳는다. 물론 26명 중 18명의 여인은 승은을 자주 입었지만 아쉽게도 후세를 생산하지 못했다. 태종은 21명의 직접 낳은 딸내미와 의붓딸 1명과 양녀(養女) 2명 등 총 24명의 딸내미를 두었다. 그는 그중에 17번째 딸내미인 고양공주(高陽公主)를 제일 아끼고 사랑했나 보다. 고양공주는 일명 합포공주(合浦公主)라고도 불렀는데, 생모를 일찍 여의어 기록상 생모가 누구인지 불명확하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정비인 장손(長孫) 황후 즉 문덕황후의 손에 양육되었다. 그랬으니까 공주 자신은 마치 정비의 소생으로 착각하고 살았을 것이다. 더구나 딸 바보인 태종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으니 그 행실이 자못 안 봐도 비디오다. 말하자면 이거 순 애물단지다. 워낙에 오냐오냐하면서 키운 탓에, 콧대만 높고 교만하기 짝이 없다. 예의와 법도를 지키고 조신(操身)하게 신부 수업을 받아서 명문 귀족의 맏며느리로 시집을 가는 것이 엘리트 코스인데, 아예 싹수가 노랗다.
머리는 빨간 물을 들이고, 더 심하게 나가서 클레오파트라가 했다는 방식을 벤치마킹하여 머리에 진흙을 발라 꼬불꼬불하게 파마까지 했단다. 당시 장안의 전속 미용사는 고양공주 덕에 돈 좀 만졌겠다. 최고급 당나라 실크에다가 서역에서 수입한 염료로 물을 들여 당시 패션의 본고장 로마에 내놔도 먹힐 화려 사치한 잠자리 날개 같은 옷을 입고 장안의 뒷골목을 활보했단다. 장안 뒷골목 부비부비 클럽의 죽순이로 노는 것도 맨날 드나들다 보니 물리게 됐다. 클럽 주인이 물 관리를 잘하지 않아서 그물이 그물이었다. 좀 더 색 다르고 쌈빡한 물 좋은 곳을 찾아보라고 수행(隨行) 시녀를 닦달했다. 아무리 딸 바보라지만 당나라 정보기관과 치안기관 정보담당 부서에서 매일 올라오는 고양공주의 동정 보고를 보자니 억장이 무너지는 태종이다. 호위무사를 붙여서 우범지대 홍등가나 옐로 존에는 못 들어가도록 방어망을 쳤으나, 변장술에 준하는 화장술에 능한 공주의 변신에 맨날 그녀를 놓쳐서 공주 호위대는 단체 기합 받기가 일과였다. 보다 못한 태종이 고양공주를 출가시키기로 마음을 먹었다. 일단 시집을 보내면 남편이 관리하고, 시집의 법도에 따라 어느 정도 통제가 되리라 생각한 거다. 그래서 딸내미의 혼처를 고르고 골랐다.
그래서 간택이 된 것이 태종 본인의 심복이고 학문과 경륜이 뛰어나서 진왕(秦王 : 후에 태종이 되는 이세민) 18 학사의 한 사람으로 불리는 방현령(房玄齡) 즉 방교(房喬)의 아들이다. 방현령은 626년에 현무문의 변을 모의해 결국 당 고조의 황태자 이건성을 제거하고, 주군 이세민을 황제 태종으로 올리는데 공헌했다. 당태종 즉위 후 소위 정관의 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중서령(中書令)이 되었다. 629년에 좌복야(左僕射)에 임명되어 최고의 권력 핵심이 되었다. 아들이 셋으로 방유직(房遺直), 방유애(房遺愛), 방유칙(房乳則)이 있었다. 둘째 아들인 방유애가 고양공주의 부마(駙馬)로 간택된 것이다. 방유애는 아버지와 달리 책상물림으로 허우대만 멀쩡할 뿐 세상 돌아가는 것은 전혀 문외한인 어벙한 친구이다. 홍콩의 세계적인 배우 성룡(星龍)이 스스로 주장하기를 자기가 방현령의 후손이라고 했다. 참고로 성룡의 본명은 방사룡(房仕龍)이다. 아버지 방현령이 워낙 고위직이고, 청렴한 학자여서 아들들에게 본인이 고위 관직에 있는 동안은 충사(出仕)할 생각을 말라고 했는지 공주의 남편이 될 방유애 이 친구는 결혼할 때까지 글만 읽는 서생이었다. 결혼하고도 출사를 못하고 그냥 마누라 궁둥이만 쳐다보면서 하루하루를 빈둥거리고 지냈다. 일설에 의하면, 당나라와 같은 북방계통의 임금들 대개가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호색의 결함이 크다고 한다. 더구나 궁중에는 공적 연회나 사사로운 모임에 쓰이는 노래와 춤을 전문으로 하는 가기(歌妓)가 있고, 하다못해 지방 관청에도 관기(官妓)가 있었다. 그러니 장군(將軍)이나 대신, 귀족, 고관들의 사저(私邸)와 별저(別邸)에는 손님 접대를 겸한 가기(歌妓)란 것을 두는 것이 제도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부인들은 더욱 질투의 감정을 불태우게 되었고, 명문가일수록 공처가가 많은 실정이었다. 특히 방현령의 경우는 남달리 부인에게 머리를 쳐들 수 없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 역사의 기록에 보면 방현령의 부인은 성이 노씨(盧氏)였는데, 방현령이 아직 젊고 가난했을 때 심한 병으로 곧 죽게 되어 있었다. 현령이 아내를 불러 이렇게 유언을 했다. “나는 아무래도 죽을 것 같소. 당신은 젊은 여자로 혼자 살 수 없을 테니, 내가 죽거든 부디 좋은 사람을 만나 잘 사시오.” 그러자 노씨는 그 자리에서 한쪽 눈을 빼어 시집갈 생각이 전혀 없음을 그에게 보였다. 방현령은 그녀의 간호로 병을 치료한 그 뒤로 평생 그녀를 존경하며 살았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평생 여자 앞에서 머리를 쳐들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는 하겠지만, 이런 가정환경 속에서 자랐으니 방현령의 아들 방유애(遺愛)가 빌빌거리면서 마누라인 고양공주에게 꼼짝 못 한 것은 당연하다. 더욱이 황제의 딸인 슈퍼 갑의 입장이니 말할 필요가 없다. 심지어 당나라의 고안장공주(高安長公主)는 일명 선성공주(宣城公主) 인데, 남편 왕욱(王勖)이 밖에 첩을 두자 첩을 붙들어다가 코와 귀를 자르고, 사타구니 가죽을 떼어내어 얼굴에 붙인 다음 머리를 깎고 관청으로 보내 재판을 받게 했단다. 그리고 그 광경을 관리들이 구경하게 했다니 별 볼일 없는 남편은 밤이나 낮이나 공주 마누라 앞에서 오금이 저려 아무 짓도 못했을 것 같다. 남편이 첩을 두는 것은 보지 못하면서 자기는 딴 남자를 멋대로 골라잡았던 모양이었다.
아무튼 고리타분한 시댁에 시집와서 맨날 고리타분한 생활을 하던 공주는 좀이 쑤시고, 갑갑해서 살맛이 없다. 그래서 아버지 태종을 들들 볶아 합포(合浦 : 광동성 해강현)라는 곳을 봉지(封地)로 받는다. 그래서 합포공주라고도 불린다. 개인 영지이니까 그녀 마음대로이다. 그녀는 거기서 사냥도 하고, 냇가나 숲 속에서 일광욕도 하면서 그런대로 지내고 있었다. 워낙 애마부인(愛馬婦人)이었던 그녀는 어느 날 말을 타고 자기 봉지(封地)의 산속 깊숙이 들어가서 사냥을 하다가 조그마한 절에 들어가 쉬게 되었다. 그곳에서 젊고 얼굴이 아주 희멀건 미남인 승려를 만나게 된다. 그 승려가 바로 변기(辨機)이다. 화장실의 변기(便器)가 아니라 스님 변기이다. 첫눈에 마음에 들어 참을 수가 없었는지 “마침내는 장막을 초암(草庵)에 둘러치고 그를 어지럽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 변기가 있던 허름한 절 근처에 임시 침소를 만들고 억지로 그를 음탕한 무대로 끌어들인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의 도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니 공주가 연애를 위해 왕래하기도 불편하고, 더구나 번듯한 호텔이나 러브텔도 없는 시골이라서 금수저인 공주가 즐기기엔 많이 곤란했다. 그러던 중에 그 유명한 소설 서유기(西遊記)의 주인공 삼장법사(三藏法師)의 롤모델인 현장법사(玄奘法師)가 인도에 다녀와서 각종 불경과 서적을 출판하려고 했다. 태종을 현장법사의 보고를 듣고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를 간행하라고 지시했다. 이것을 안 고양공주가 협장법사의 조수로 변기를 추천하여 그는 일약 시골 땡초중에서 장안의 거대한 가람의 고승인 현장법사의 조수로 상경하게 되었다.
그러니 자연 고양공주도 거리가 가까워 그와 만남이 수월하고, 한방에 출세를 시켰으니 변기도 그녀에게 고분고분 잘하였을 것이다.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총 12권은 현장법사의 구술을 받아서 변기가 정리하여 간행한 것이다. 명나라 때의 저명한 화가이자 문인인 당인(唐寅)이라는 사람이 쓴 소설 <승니얼해(僧尼孼海)>가 있다. 이 소설은 그 전과 당시 승려 계층의 방탕하고 퇴폐적인 실상을 적나라하게 고발한 것이다. 특히 조정을 어지럽힌 승려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여기서 묘사된 고양공주와 변기의 음행을 몇 가지만 살펴보자. 변기의 여의봉에 대하여 묘사한 것이다. “그의 물건은 매우 단단하고 굵었으며, 길이는 두 주먹을 쥐고도 반 주먹이나 되었다.” 또 “공주와 놀 때마다 그것의 전부를 다 넣지 않았는데도 공주는 벌써 온몸이 경련을 일으키며, 유쾌한 기분을 감당하기 힘들었다.”라고 했다. 소설은 군데군데 노골적(露骨的)인 성애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어느 날 밤, 공주는 두 사람의 시녀를 좌우에 거느리고 나타났다. 두 시녀들이 또한 기막히게 매혹적이고도 아름다운 처녀들이었다. 변기는 두 시녀를 보는 순간 갑자기 욕심이 치밀어 올라 당장 끌어안고 관계를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공주가 있으므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공주에게 “이 두 시녀에게 등불을 들려 옆에서 모시고 서 있도록 했으면 싶습니다만”라고 하자, “변 스님께서 하라는 대로 해라!” 그렇게 명령을 한 공주는 벌써 참다못해 침대에서 벌렁 뒤로 누워 버렸다.
그것을 본 변기는 깔 것을 공주의 허리 밑에 펼쳤다. 그리고 시녀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물건을 손에 쥐고 옥문(玉門)의 문턱에 머리만을 문지르고 비비고 할 뿐, 깊이 들여보내지 않으며 짐짓 공주를 몸이 달게 만들었다. 공주는 점점 마음이 급해 왔다. 잡힐 듯 먹힐 듯하면서 좀처럼 목으로 넘어가지 않는 심정이었다. 몸이 달고 마음이 급해진 공주는 변기를 밀어붙이며 벌떡 일어나 그를 밑에 깔고 말 타듯 했다. 얼른 변기의 물건을 그녀의 방문턱으로 밀어 넣더니 두 손으로 침대를 의지하고 몸을 들었다가 아래로 콱 눌렀다. 변기의 엄청난 물건이 뿌리까지 다 들어가고 보이지 않았다. 계집과 사나이가 마주 흔들며 밀고 당기자 사랑의 샘물이 밖으로 넘쳐흘렀다. 잠시 후 변기는 공주가 지칠까 봐 겁이 나서 그녀를 슬그머니 끌어안으며 옆으로 몸을 뒤집어 그녀를 밑으로 가게 하고, 있는 힘을 다해 밀고 당기기를 수백 번이나 했다. 차차 가락이 빨라지며 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확확 치밀어 오르자 공주는 변기의 목을 틀어 안고 두 발로 그의 허리를 죄여 붙였다. 절정에 이르자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숨 가쁘게 외쳤다. “정말…… 난, 정말…… 이번은 정말 죽을 것만 같아. 그러나 죽어도 좋으니 더 계속 몇 백 번이고 몇 백 번이고……” 그녀는 절벽 위를 걸어가듯 몸을 바르르 떨다가는, 금시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오르는 것만 같아 온몸에 맥이 쑥 빠져 버렸다.
공주를 위해 크게 회롱하기를 한바탕 한 다음 곧 전쟁을 끝낸다. 그러나 이 흐드러진 애정 행각의 현장을 등불을 들고 지켜보고 있던 두 시녀는 눈을 깜박이며 입을 틀어막고, 얼굴을 가리고 옆으로 돌아서고 말았다. 그러나 옆으로 몸을 틀고 서 있던 것이 그녀들에게 뜻하지 않은 꼬투리가 되었다. 변기는 시녀의 손을 잡아끌며 호색한의 본성을 드러냈다. “그런 꼴을 하고 공주님에게 모욕을 줄 참인가?”라고 하며 억지로 시비를 걸어오는 것이었다. 말의 뜻인즉 공주의 귀하신 몸이 하고 계신 일을 자랑스럽게 구경하지 않고, 백안시(白眼視) 하듯이 얼굴을 돌렸다는 것이다. 변기의 이 말에 공주도 화를 버럭 냈다. 그리고는 비단 수건으로 변기의 육봉(肉棒)을 닦아 내게 하고, 두 시녀아이를 불러 입으로 이를 빨게 했다고 했다. 어쨌든 두 시녀는, 목숨이 아까운 한 무슨 짓이고 공주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시녀들은 변기의 앞으로 나아가 공손히 무릎을 꿇고 육봉을 잡고 빨아 보려고 했으나 입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다만 한 차례 입술로 겉만 핥고 있을 뿐이었다. 그 광경을 보자 공주는 웃으며 시녀들에게 물었다. “너희들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겠니?” 두 시녀들이 대답을 못하고 묵묵히 있자 공주는 변기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남들이 장난치는 것을 보는 것이 재미있어. 내 말을 알아들었지요? 어디 두 아이를 상대로 시험 삼아 장난을 해 보아요. 조금만 구경을 할 테니.” 안 봐도 딱 서양 에로 비디오다. 그렇잖아도 시녀들을 손대고 싶어 좀이 쑤시던 판이라, 변기는 공주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시녀 하나를 끌어당겨 침대로 올렸다. 그녀의 속바지 끈을 쥐어뜯어 옷을 벗긴 다음 두 다리를 들고 그의 육봉을 들여보냈다. 백 가지 꾀를 다 써서 겨우 머리를 적실 수 있었으나 여자는 이를 악물고 아픔을 못 견뎌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다른 시녀가 그만 기겁을 하고 놀라며 들고 있던 등불을 내던지고 밖으로 도망쳐 달아나 버렸다. 공주는 그런 광경을 보자 손뼉을 치고 크게 웃으며 몹시 유쾌해했다고 한다. 변기의 대물과 기교에 심취한 공주는 어느 날 변기에게 금보신침(金寶神枕)을 선물하며 “황제에게 받은 소중한 물건이니 절대 다른 사람 눈에 뜨지 않게 하고 밤에 잘 때 나를 보듯이 베고 자라”고 당부한다. 이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이다. 요즘 어떤 땡초 중이 절에 불공을 드리러 온 귀부인과 놀아난다는 소문이 났다. 그 소문은 정보 당국에 접수되고, 황실 비서실에서 은밀한 내사 끝에 드디어 변기를 덮치게 된다. 압수 수색을 하던 형사들이 변기의 방 속 깊숙한 곳에 황실에서나 쓰는 금보신침(金寶神枕)이 발견된 것이다. 당나라 검찰청 특수수사부장의 신문(訊問)과 모진 심문 끝에 변기는 고양공주와 거시기를 겁나게 했노라고 자백하고 만다. 보고를 받은 태종은 울화통이 치밀어 당장 변기를 죽이라고 명령하고, 공주에게는 당분간 근신하라고만 할 뿐 뭐라 말을 못 한다. 그래서 변기는 요참형(腰斬刑) 즉 작두로 허리가 잘려 죽는 벌을 받고 죽었다. 요참형이 얼마나 처절한지 독자들은 잘 모를 것 같아서 부연 설명하면 참수형(斬首刑) 즉 목을 자르는 형벌과 비슷하다. 하지만 고통은 그야말로 수천 배에 달한다. 참수형은 머리가 몸으로부터 분리되면 모든 고통과 생명이 끝나지만, 요참형은 허리 아래만 잘려 나가고, 상체가 살아있기 때문에 극심한 고통이 가해지는 것이다. 엄연히 상체는 살아있기 때문이다. 출혈에 의해서 모든 혈액이 소진될 때까지 고통을 당하는 참혹한 형벌이다.
사랑하는 변기가 이런 형벌로 죽게 되자, 고양공주는 아버지 태종을 무척 미워했다고 한다. 태종이 죽고 오빠인 고종이 즉위한다. 변기의 사건으로 고양공주는 아버지 태종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단다. 세월이 조금 흐르자 공주의 음심이 다시 슬슬 고개를 쳐든다. 고양공주는 “아, 옛날이여!”라면서 변기와 놀던 그 절의 예쁘장하던 동승(童僧)을 기억해 내고는 그들을 만나러 그 절로 드나든다. 그들의 이름은 지욱(智勖)과 혜홍(惠弘)인데, 지욱은 점술에 능했고 혜홍은 마술에 능하고 귀신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공주는 이들을 궁으로 불러들여 더블데이트를 즐기며 점도치고 님도 보고, 마술도 부리고 뽕도 따고 일석이조(一石二鳥)가 아니라 사조(四鳥) 정도로 즐기게 된다. 이들과 쓰리썸도 부족하였던지 공주는 어느 날 밤에 장안 거리를 헤매다가 이황(李晃)이라는 도사(道士)와 한방에 눈이 맞아 버린다. 우리나라의 성리학자 퇴계선생과 이름이 비슷하지만 아예 본질적으로 그 성품이 천양지차이다. 이놈은 아주 질이 나쁜 카사노바형 도사이다. 곤륜산에서 도교의 술법에 따라 방중술과 양생술을 익혔는지, 공주는 이놈의 기교에 거의 넋을 잃다시피 해서 아예 궁궐에 이황의 숙소를 마련해 주고는 틈만 나면 몸을 불태운다. 궁궐엔 소문이 쫘악 퍼지고 대신들은 연신 상소를 올린다. 보고를 받은 오빠 고종도 크게 대로하여 큰 벌을 내릴 작정을 한다.
이 소식을 들은 공주는 고종의 마누라 중 최고의 교활녀(狡猾女) 무미랑(嫵媚娘) 즉 나중에 측천무후가 될 그녀를 꼬드기고, 몇몇 반감을 가진 신하들을 규합하여 반란을 획책한다. 여자라고 황제가 못 되란 법은 없지 않은가. 고양공주가 무측천에게 이런 논리를 들이대며 같이 하자고 했을 때 무측천이 여자가 너무 오버한다고 듣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밀고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무측천이 자기가 낳은 딸을 질식사시키고 정비(正妃)가 한 짓으로 꾸며 덮어씌워 폐비를 당하게 할 때 고양공주가 유력하게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후에 무측천은 자신이 황제에 올랐으니 고양공주의 간 큰 행동을 보고 배웠으리라 보인다. 아무튼 이 반역은 이황, 지욱, 혜홍 등과 함께 꾸며 고종에게 독약이 든 음식을 먹여 암살할 계획이었다. 허지만 이 계획은 방유애의 친형 방유직에게 발각이 나서 땡초중 놈들은 모조리 잡혀 주살당한다. 공주는 오빠인 고종에게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고종은 고양공주에게 아량을 베풀어서 몰래 도망가게 해 주지만, 황후인 무미랑에게 숲에서 딱 걸려서 나무에 목이 매달아 져서 죽음을 맞이한다. 마치 자실 한 것처럼 처리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