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말기 희종 때 예부시랑(禮部侍郎) 주도등(周道登)은 학문과 경술(經術)이 그리 높지 않았고, 임금에게 대답하는 주대(奏對)가 서툴러서 칭병(稱病)을 하고 사표를 제출했다. 조정에서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는 것도 싫었지만, 집에는 노모가 병석에 있고, 그녀의 병 수발을 위해 나이 어린 하녀 하나를 비싼 돈을 주고들인 것이다. 그녀는 당시 열서너 살의 양애(楊愛 : 나중에 유여시로 개명)였다. 양애는 나이에 비해 성숙하고 얼굴도 예쁘고 문학에 조예도 있었다. 주도등은 그런 하녀를 구하 것이 몹시 만족스러워서 한시라도 빨리 그녀를 손아귀에 넣고자 하는 갈망(渴望)이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자 그를 맞이하는 것이 양애였다. 갓 피어난 복사꽃 같은 얼굴에서 연꽃처럼 우아한 미소에 그는 세상에서 찌든 시름이 한꺼번에 씻기어 나아가는 듯했다. “대감어른 안녕히 다녀오셨습니까?” 꾀꼬리 노래 같은 목소리가 너무 사랑스러워 주도등은 체면이고 뭐고 간에 당장 품고 싶었다. “오냐 마님 수발드느라 네가 고생이 많구나. 내 너의 수고는 언제고 잊지 않는다. 내 너에게 주려고 도성(都城)에서 사가지고 온 책이 있느니라.” “예, 대감 어른. 소녀(小女)를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백골난망이옵니다.” “마님이 잠이 드신 후에 서재로 오너라.” 주도등은 서재에 와 있어도 마음이 양애에게 가 있어 책만 펴놓았지만 건성이다. 눈에 들어 올 리가 없다. 마음을 다스리려고 후원(後園)을 걸어도 온통 양애 얼굴뿐이다. 밤이 되려면 아직도 멀었다. 해가 떨어지고 노모가 잠이 들려면 대여섯 시간은 더 있어야 할 상황이다.
땅거미가 지고 뒷동산의 산새들도 잠이 들 무렵 똑똑하고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살며시 열리며 양애가 안개처럼 들어왔다. “대감 어른께서 어찌하여 소저를 찾으셨나요?” “그래, 네가 노마님을 하도 정성스레 모셔서 내가 상을 내리려 함이다. 주저하지 말고 그리 앉아라.” “아니옵니다. 그냥 이대로가 좋사옵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양애의 불룩하게 나온 앞가슴과 둥그스름한 엉덩이가 그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왕 들어왔으니 이 술이나 한잔 따르렴.” “예, 대감어른” “네가 책을 좋아한다기에 사마천(司馬遷)이 쓴 《사기(史記)》를 한 권 사 왔느니라. 네가 읽을 수 있겠느냐?” “예, 대감 어른께서 소저의 마음을 알아주셔서 너무 고맙사옵니다.” “그래, 그럼 너도 한 잔 하고 이야기 좀 해보자. 너는 그 유명한 명기인 서불(徐佛)이 있는 귀가원(歸家院)에도 잠시 있었다면서?” “예, 소저는 거기서 시·서·악(詩·書·樂) 들을 배웠으나, 아직 재능이 부족하옵니다.” 아버지와 막내딸 같은 분위기였으나 학문에서부터 세상 돌아가는 얘기까지 양애는 거칠 것이 없었다. 대감은 분위기가 무르익자 더 말을 나누지 않고 술상을 발길로 밀어 제치고 양애를 쓸어안았다. 탱탱하고 부드러운 몸매가 저항 없이 딸려왔다. “네가 몸이 보통이 아니로구나!” “무슨 말씀이온 지요? 저는 아직 남자는 모르옵니다. 처음이옵니다.” 주도등이 서두르자 어린 양애가 잠시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저는 대감 어른의 하녀이니 마음대로 할 수는 있으나, 제 정조(貞操)까지 탐하시기 전에 정식 첩으로 약조를 해주셔야 하옵니다.” 양애는 기녀보다 사대부의 부인으로 살면서 자기의 문학을 추구하는 꿈이 있었다. “알았다. 무슨 얘기인지” 양애는 주도등이 낮에 노마님이 잠이 들면 서재로 오라고 할 때 이미 사내의 속내를 알아채고 겉옷 바람으로 왔다. 박꽃같이 흰 살결이 술 몇 잔에 온몸이 복숭아꽃 빛깔로 물들었다. 양애는 능숙하지도 그렇다고 머뭇거리지도 않게 주도등을 영접했다.
늙은 주도등도 마누라 이외의 첩들뿐만 아니라 화류계에서 내로라하는 기녀들과 수도 없이 운우지정(雲雨之情)을 즐겼다. 그러나 양애같이 청초하고 풋풋함을 동시에 느끼기는 처음이다. “넌 어디서 이 좋은 기술을 배웠느냐?” “소녀는 서불언니에게 잠시 몸을 의탁하고 있을 때 양귀비가 당현종(唐玄宗)을 위해 귀아원(貴牙院)에서 배웠다던 교본을 빌려 보면서 기억하고 있지요. 무슨 잘못한 점이 있으신지요?” 양애의 손이 주도등의 사타구니로 왔다. “너 참 대단하구나.” 일합(一合)을 얼떨결에 해치우고 잠시 쉬었던 사내는 양애를 다시 힘껏 끌어안았다. 그는 모처럼 깊은 단잠에 빠졌다. 며칠이 지난 뒤 양애는 하녀 신분에서 일곱 번째 마님이 되었다. 그러나 신분이 하녀에서 첩으로 바뀌었을 뿐 그녀가 희망했던 학문을 하며 품위 있는 생활과는 거리가 너무 먼 신세다. 집안에서 처첩끼리의 질투에 시달리고, 그동안 꿈꾸던 미래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주도등의 집에서 나와 귀가원(貴家院)의 기녀로 돌아가기로 했다. 노마님의 극구 만류에도 불구하고 양애는 기녀의 길을 택했다.
양애(楊愛)는 명나라 말기 가흥(嘉興) 사람이다. 양애(楊愛:1618-1664년)는 어렸을 때의 성은 양(楊)씨이고, 이름은 애(愛), 운(雲), 운연(雲娟), 영련(影憐)등으로 불렸다. 후에 성을 유(柳)씨로 개명한 뒤, 첫 이름은 은(隱)(일설에는 은문隱雯), 자(字)는 미무(蘼蕪)이었는데, 이후 다시 또 이름을 시(是)로, 자(字)는 여시(如是)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불교 금강경(金剛經) 경전에 나오는 여시아문(如是我聞)이란 말에서 스스로를 아문거사(我聞居士)로 부르기도 했으며, 전겸익(錢謙益)과 결혼한 후에는 유씨가 하동(河東)의 군망(郡望)이라는 사실에서 하동군(河東君)이라 불렀다. 그녀에게는 20여 개에 이르는 이름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어릴 때의 불행과 이후 성장하면서 기루출신(妓樓出身)으로서의 인생역경이 일반인과는 달리 매우 많은 곡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집안은 가난했지만, 총명하기 그지없었다. 오강(吳江)의 성택진(盛澤鎭)에 있는 귀가원(貴家院)의 주인 양씨(楊氏)의 양녀가 되고, 그 집의 유명한 기생 서불(徐佛)의 제자가 된 후 그의 훈도를 받았다. <우산화지(虞山話誌)>에 “여러 서적을 널리 읽어서, 시문을 할 줄 알았고, 틈이 있을 때면 화훼(花卉)를 그렸는데, 빼어났다.”라는 기록이 있다.
유여시는 진회팔염(秦淮八艶)으로 일컬어지며 그중의 제일로 본다. 진회팔염은 진회하(秦淮河) 일대에서 활동했던 여덟 명의 미인 기생이었다. 이들은 기생으로서 얼굴도 예뻤고 시문이나 음악에 조예가 깊어서 한 남자랑 깊은 인연을 맺지만 아름다운 사랑은 결실을 거두지 못하고 늘 슬픈 사랑으로 끝났다. 또한 남자와의 사랑만 하는 게 아니라 명말청초(明末靑初)에 여류시인으로서 조국이 이민족인 청나라에 무너지는 상황에서 저항정신과 독립정신을 부추기는 등 남자 지사 이상의 역할 도 했다. 이들을 시대순으로 보면 마상란(馬湘蘭)·유여시(柳如是)·고미생(顧眉生)·변옥경(卞玉京)·진원원(陳圓圓)·동소완(董小宛)·구백문(寇白門)·이향군(李香君) 등이다. 양애는 주도등의 집을 나오면서 본인의 이름을 바꾸었다. 남송(南宋) 시대 제남(濟南) 사람인 신기질(辛棄疾)의 사(詞) <하신랑(賀新郞)>에서 “내가 청산을 보니 아름답기만 하구나, 청산이 날 봐도 이와 같을 것이다.(我見山多娬媚, 料靑山見我應如是)”라는 구절을 보고 이와 같다는 뜻의 여시(如是)를 그녀의 자(字)로 하고 이름은 유은(柳隱)으로 개명했다. 그녀는 일생동안 글을 많이 쓴다. 전해져 내려오는 시집으로 <무인초>, <유여시시>, <홍두촌장잡록>, <매화집구>, <동산수창집>등이 있다. 그 외에 31편의 문조청려(文藻淸麗)한 척독(尺牘, 서신)과 독특한 풍격의 서예, 회화작품이 남아 있다.
강소성(江蘇省)의 성도인 남경(南京)은 서안, 낙양, 북경, 개봉과 함께 중국의 5대 고도(古都)로 불리는 오래된 도시이다. 삼국시대에는 오(吳) 나라 손권(孫權)에 의하여 건업(建業)이라는 이름으로 수도가 되었으며, 그 후 동진(東晋)의 수도가 되었고, 이후 남조(南朝)의 왕조인 송(宋), 제(齊), 양(梁), 진(陳)의 수도로 이어지면서 번성하였는데, 따라서 위진남북조 여섯 왕조의 수도라는 뜻으로 육조고도(六朝古都)라고도 불린다. 그 후 남경은 1368년 주원장(朱元璋)이 명(明) 나라를 건국하면서 다시 수도가 되고, 이때부터 이름도 오늘날의 남경(南京)이 된다. 남경을 가로지르는 강은 진회하(秦淮河)인데, 남경은 대륙을 관통하는 장강(長江)이 도시의 3면을 에워싸고 흘러간다. 진회하는 남경을 동서로 가로질러 흐르는 장강의 지류로, 남경의 젖줄이다. 이곳을 옛부터 십리진회(十里秦淮)라고 불리며 역대 문인들도 극찬했던 절경이다. 명말청초(明末淸初)에는 수많은 유흥가가 들어서 있어 불야성(不夜城)을 이루던 곳이다. 1632년 그의 나이 15세를 전후하여 화려한 배를 한 척 구입하여 오월(吳越)을 떠돌아다니는 유기(遊妓) 생활을 하면서 송강(松江) 명사들과 긴밀한 교류를 가졌다. 유여시는 진계유(陳繼儒)의 75세 생신을 축하하기 위하여서 송강 여산(余山)에 있는 그의 산방(山房)인 만향당(晩香堂)으로 갔는데, 이곳에는 당시 유명하였던 명사재자(名士才子)로 진자룡(陳子龍), 송징여(宋徵輿), 이대문(李待問), 이문(李雯), 송징벽(宋徵璧) 등이 있었고, 미녀여류로 왕수미(王修美), 설림(雪林) 등이 있었다. 당시 이곳에 모인 이들 명사는 모두 기사(幾社)의 주요 인물이었다. 기사는 명말에 장부(張溥)가 복사(復社)를 창립한 것과 같은 시기에 진자룡이 창립한 문학사단이었다. 이들은 현실정치의 기초 위에서 존고복고(尊高復古)를 주장하였기 때문에 시정(時政)의 혼탁함이나 민생의 질고(疾苦)에 대한 폭로도 서슴지 않았다. 당시는 명대 말기로서 당쟁이 매우 격렬하였기 때문에 기사의 이념도 정치적 현실과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고무하면서 나라와 백성을 구해내는 영웅관을 형성해내고 있을 때였다.
유여시가 송징여와 진자룡을 처음 만난 곳은 바로 이 만향당(晩香堂)이었다. 바로 유여시 스스로 선택한 첫 남자의 이야기다. 그는 명문대족 출신으로 진자룡, 이문과 함께 운간삼재자(雲間三才子)의 한 사람으로 불려졌던 송징여이다. “발가벗고 수영을 해서 이 배로 오세요. 그래야 송징여(宋徵與) 선생의 저에 대한 사랑의 진실을 믿을 수 있지요.” 봄이라고는 하지만 겨울 기운이 산하에 아직은 그대로 남아있는 상태다. 유여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송징여는 옷을 훌훌 벗어 강가에 놓고 헤엄을 쳐 유여시의 배로 향했다. 유여시와 송징여는 강남지식인 그룹이 주도하는 각종 시회(詩會)와 문화행사에서 자주 만나 알던 사이로 송징여가 프러포즈를 하는 순간이었다. 유여시는 이곳에서 마음에 둔 남자가 자기보다 10살 정도 많은 진자룡(陳子龍)이었으나, 유부남이라서 마음을 닫고 있었는데 동갑내기인 총각 송징여가 대시를 해 온 것이다. 그들은 나이 한참 좋은 16세 동갑내기의 첫사랑으로 만났지만 일 년 만에 덧없이 깨어졌다. 그들의 만남이 쉽게 불붙듯이 사랑 또한 벚꽃이 떨어지듯 싱겁게 맥없이 끝이 났다. 유여시는 송징여의 뜻뜨미지근한 행동이 항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실 유여시는 화류계에서 뿐만이 아니라 남경의 지식인 그룹에서 기생이 아닌 여류문인으로 당당한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다. 시·서·화·악(詩書畵樂) 등에서 그녀보다 앞서가는 문화인은 드물었다. 따라서 유여시로 인해 귀가원이 도성에 소문이 파다해 한량(閑良)들이 문전성시다. 유여시의 소문은 황궁에까지 들어가 만력제(萬曆帝_의 생일연회에 불려 가기도 했다. 만력제는 유여시를 후궁으로 삼고 싶었지만 기생 출신이라 신하들의 반대가 심했다. 그래서 일 년에 한두 번씩 순행할 때 동행시켰다. 유여시의 몸값은 천정부지(天井不知)다. 그러나 송징여 집에서만은 정반대다. 이제 아들이 겨우 16살에 불과하고, 상대가 이혼녀도 모자라 기방(妓房)의 여자라서 송징여의 어머니 심씨 마음의 문을 끝내 열지 못했던 것이다. 유여시는 송징여와 가슴 찡하고 풋풋한 사랑을 일 년도 넘기지 못하고, 방안에 있던 칠현금(七絃琴)의 줄을 칼로 자른 후 귀가원으로 들어가 다시 기적(妓籍)에 올렸다.
다시는 사내에게 몸을 의탁하지 않고 사랑하는 이들이 자신에게 의탁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녀가 더욱 참을 수 없었던 것은 그와의 잠자리다. 송징여는 잠자리에 들면 발정(發情)한 토끼처럼 할딱이다가 문전만 더럽히고 금세 내려오길 어언 일 년의 세월이다. 그녀는 나이 든 주도등에게서 첩들이 여럿이 있었으나 사랑을 독차지했다. 남녀 간의 사랑이 무엇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인데 송징여는 그것을 모르고 서툴렀다. 그녀의 몸은 남자를 거치는 사이에 어느새 남자의 살이 닿지 않으면 잠을 못 이루는 체질이 되었다. 그녀 주위엔 꿀을 빨아먹으려는 벌들이 항상 우글댔으므로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쉬웠다. 유여시는 귀가원에 들어오고 마음의 평정을 되찾았다. 서불을 언니처럼 의지하고부터 그녀의 시서화의 실력은 나날이 더 좋아져 각종 연회자리에 고액의 출연료를 제시하며 초청이 쇄도(殺到)해 귀가원은 개업 이후 최고의 호황으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마음이 편하고 호사가(好事家)들의 입에 회자되자 유여시의 몸은 남자를 갈망하는 본능이 활화산처럼 터져 올라와 밤마다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던 차에 그녀의 그물에 열 살 연상의 진자룡이 걸려들었다. 그는 결혼한 몸이지만 용기 있게 송강 남루에 있는 친구 서무정(徐武靜)의 별장을 빌려 신접살림을 차렸다. “이 집이 우리가 당분간 살 집이오. 작고 불편한 것들이 많겠으나 참고 좋은 날을 기다립시다!” 진자룡(陳子龍)은 유여시의 허리를 감듯 안아 대문 안으로 들어서며 약간은 긴장된 표정으로 말했다. 집이 너무 작고 허술하기 때문이다. 사실 서로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유부남과 기녀의 신분으로 멀리서 서로의 체취를 느끼기를 2~3년이나 했다. 평생을 그렇게 그리워하면서 살 것 같았는데 그들의 운명이 어느 날 갑자기 내연(內緣)의 관계가 되었다.
두 사람만의 행복한 시간이기는 했지만, 언제까지나 집을 나와 이중생활을 할 수 없었던 진자룡은 유여시를 정식 첩으로 삼으려고 한다. 당시 강남 지식인 집단은 부패하고 무능한 명 말기 만력제 조정의 가장 맹렬한 비판세력이다. 진자룡도 이들과 함께 재야세력이라서 과거에서 번번이 낙방한다. 그의 실력으로 봐 떨어질 리가 없는데 비판 그룹 활동과 무관하지 않다. 등과(登科)도 못한 무관의 서생이 첩을 들이려니 집안의 반대가 만만하지 않다. 진자룡의 부인 장유인(張孺人)은 기생을 첩으로 들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난리가 났고, 진자룡의 모친까지 나서서 반대를 했다. 그러나 진자룡은 집안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송징여와는 달리 일을 관철시키기 위해 더 노력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진자룡의 부인이 사람들을 데리고 남루(南樓)의 신혼집에 찾아와 소동을 벌린다. 진자룡도 또한 시간이 갈수록 처음의 열정이 차츰 식어갔다. 잠자리마저 뜸해지자 그들은 부부보다 친구처럼 굳어져 갔다. 유여시는 생각 끝에 진자룡을 놓아주기로 결심했다. 아내라는 이름에 집착하다 두 사람 모두 만신창이가 될 것이 뻔해 스스로 물러서기로 마음을 굳혔다.
유여시가 밤늦게 까지 시국 토론을 하며 진탕 마시고 집으로 들어가니, 진자룡도 어디서 마셨는지 얼큰한 얼굴로 들어왔다. 진자룡은 평소와는 다른 유여시의 싸늘한 표정은 아랑곳 않고 슬금슬금 여인 곁으로 갔다. “다 내 잘못이요. 참는 길에 조금만 더 참읍시다.”하며 여자를 쓸어안으며 뒹굴기 시작했다. 둘의 몸에선 술냄새가 풍겼다. 그러나 여자는 순순히 사내를 받았다. “여보, 당신은 내가 정말 그렇게 좋아요?” 여인은 여느 때와는 다르게 적극적으로 사내를 영접하며 황홀경으로 앞서 달려갔다. 유여시는 자유자재로 진자룡을 가지고 놀았다. 감미롭게 엉덩이가 움직이면 사내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열락(悅樂)의 소리를 토해내곤 했다. 여인은 속으로 ‘오늘이 마지막이다’를 되뇌며 귀가원에서 배운 테크닉을 유감없이 실행에 옮겼다. 환경이 서로 안 맞아 헤어지더라도 기생이 아닌 한 여인으로서 최선을 다해 살을 섞었던 사내를 만족시켜 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첩실(妾室)로 들어가 본들 결과는 뻔한 일이었다. 결국 유여시가 먼저 포기를 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2년 만에 끝이 난다. 사실 기생이 양반집 안방마님의 꿈이 말이나 되는 것인가? 그러나 유여시는 그 꿈을 버리지 못하고 태풍 속의 수양버들가지에 매달린 매미 모양 끈질기게 집착했었다. 사내는 여자가 힘주어 연습한 괄약근(括約筋)으로 천상의 극치를 맛보고 모든 열정을 연꽃잎 사이로 뿜어 내고는 축 늘어져 누웠다. 사내는 여자의 표정을 살폈다. 오늘따라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 모양이다. 여자가 말했다. “내일 오전에 귀가원에서 동림당(東林堂)과 조정의 대표가 비밀회의를 하는데 당신도 참석하시겠어요? 지금 제가 나아가면 당분간 들어오지 못할 거예요.” 유여시는 밖으로 나가자 막 도착한 마차에 몸을 싣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 후 유여시를 보러 몇 번이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진자룡이 남루로 왔으나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사내가 여자를 보려면 집이 아닌 귀가원으로 가야 했다. 유여시의 마음은 이미 몇 달 전부터 강남 지식인 집단의 터주대감이며 동림당(東林黨)의 영수(領袖)인 전겸익(錢謙益)에게로 떠나 있었다. 나중에 명나라가 망하고 청군이 남하할 때, 진자룡 등은 적극적으로 반청복명(反靑復明)의 전선에 뛰어든다. 더 이상 아녀자와의 정을 돌볼 겨를이 없게 된다. 결국 전투과정에 진자룡은 희생당하고, 유여시는 비분강개(悲憤慷慨)해마지않는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누구라면 시집갈 마음이 생기겠는가?”라고 묻자, 유여시는 “저는 전학사(錢學士)만큼 학문적 재능을 가진 분이 아니면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전해져 전겸익의 귀에 들어가는데, 평판 높은 화제의 인물 유여시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된 전겸익은 매우 기뻐하며, “나도 유여시만 한 재능을 가진 여자가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다.”라고 답을 했다 한다. 당시 전겸익은 예순에 가까운 나이였는데, 농담으로 한 말인지 욕심도 많았다. 아무튼 이로 인하여 두 사람은 서로에게 큰 관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 1640년, 틀에 얽매이지 않고 과감했던 유여시는 남장(男裝)을 하고, 관직을 박탈당 후 고향으로 낙향해 있던 전겸익을 찾아간다. “아무도 안 계세요?” 유여시는 상숙(常熟) 우산(虞山)으로 전겸익(錢謙益)의 집을 물어 물어 찾아온 것이다. 괴나리봇짐을 메고 남장을 했으나 눈여겨보면 여자티가 완연하다. 전겸익은 마침 집에 있다가 유여시를 맞았다. “누구시죠?” “지나가는 과객인데 하룻밤 신세를 졌으면 합니다.” 유여시는 전겸익을 금방 알아보았다. 전겸익 역시 남장을 한 과객이 심상치 않은 인물임을 직감하고 “예, 집이 누추하나 날이 저물었으니 들어오시지요.”라며 안으로 안내했다.
유여시는 작고 허름한 집이나 어딘가 품격이 있는 분위기에 마음이 놓였다. 과객을 친절히 맞은 전겸익은 학식은 있어 보이나, 사내로서 풍모는 그간의 생각을 바꾸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나이도 36살이나 연상이지만 생김새가 성적 매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보였다. 지난날의 송징여와 진자룡에는 비교도 안되지만 첫 남자로 정조를 받쳤던 주도등만은 했으면 하는 기대가 한순간에 무너졌다. 전겸익은 자신이 거주하던 반야당(般若堂)에 그녀를 머물게 한다. 이때 유여시는 스물셋, 전겸익은 쉰아홉이었다. 전겸익은 친구 왕여겸에게 들은 얘기가 있어 남장과객이 표정과 분위기 등으로 봐 유여시가 틀림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적당히 술잔도 주고받으며 삼경(三更)이 되었다. 두 사람은 시(詩)를 창수(唱酬)하면서 서로를 추켜세운다. 유여시는 전겸익의 학문을 동한(東漢)의 경학대사인 마융(馬融)을 능가하고, 동진(東晉)의 사안(謝安)으로 비유했다. 그러자 전겸익도 그녀를 전한(前漢)의 사마상여(司馬相如)의 배필인 탁문군(卓文君)으로 비유하며 영원히 함께하고 싶다는 뜻을 피력(披瀝)했다. “우리 집이 좁아 젊은 선비는 나와 같이 쉬어야겠소. 마침 처가에서 처제가 와 아주 불편하게 됐단 말이오.” 유여시는 전겸익의 속내를 알아차리고 “저야 주인어른과 함께 쉬면 영광이요. 혼자 자면 적적도 하고요.” 술병이 비워지고 촛불이 꺼지려 하자 그들은 아쉬운 얘기를 접고 나란히 누워 잠을 청했다. 전겸익은 예민한 후각으로 젊은 선비에게서 성숙한 여인의 체취(體臭)를 맡을 수 있었다. 마음속으로 단정하고 나니 잠이 오지 않았다. 여시도 마찬가지다. 강남 지식인 집단에서 뿐만이 아니라 중국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덕망 있는 학자와 나란히 누워 있으니 벌써 부부가 된 기분으로 손을 내밀고 사내 품으로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입술을 깨물며 참고 있다. 침도 꼴깍 넘어갔다. 여인은 잠든 척하며 잠버릇 하는 것처럼 왼쪽 다리를 번쩍 들어 전겸익의 다리에 올려놨다. 사내는 애써 아무 반응이 없다. 여자는 또 돌아누우며 다리를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 유여시가 움직이는 바람에 이불이 벗겨졌다. 전겸익은 여자에게 다시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날 이후 유여시는 그 집에 기거하며 단도직입적(單刀直入的)으로 몇 번째 부인도 좋으니 첩이 아닌 아내로, 전겸익의 여자로 살게 해달라고 청혼을 했다. 전겸익은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 와 속으로 조강지처(糟糠之妻)를 내보내고 그녀를 맞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 세대 하고도 6년이란 세월의 차이가 남에도 불구하고 학문의 세계로 공감대가 형성되어 동갑내기 송징여 때 보다도 유여시는 더 행복했다. 둘은 1641년 6월 7일에 호화 유람선인 부용방(芙蓉舫)에서 정식 결혼식을 올렸는데, 그녀의 나이 24살, 그의 나리 70살이었다. 정식 본처가 건재한데도 또 이중으로 결혼하다니 전겸익도 대단한 로맨스이다. 전겸익의 본처는 아이가 없고 불교에 심취해 있어서 별로 간섭도 없었다. 도리어 다른 사대부들이나 이웃 주민들이 들고일어나 깨진 기왓장이나 돌멩이를 배로 던지면서 야유를 보냈다. 전겸익은 태연하게 시를 읊으며 사랑하는 여인을 보호했단다. 그들은 첫날밤부터 오랜 부부처럼 스스럽지가 않았다. 전겸익은 딴 여자와 할 때와 달리 황홀경의 횟수가 늘어갈수록 회춘(回春)이 되었다. 여느 때 두어 번 읽어야 이해가 됐던 것을 한 번만 읽어도 명료하게 인식되어 학문하는 재미가 배가 됐다. 유여시 또한 나이의 차이는 있어도 신뢰하는 사내에게 몸을 맡기니 하늘을 나는 기분이다. “당신 매일 나를 이렇게 즐겁게 해 줘도 괜찮겠어요?” “괜찮고 말고 아직은 거뜬하오. 내 비록 당신보다 나이를 좀 더 먹었으나 오늘 같은 날을 위해서인지 매일 산책과 요가를 게을리하지 않았소.” 사실 전겸익은 육십이 넘은 나이지만 타고난 강골에다 소식(小食)을 해서 얼굴에 잔주름이 많을 뿐 육체적 나이는 오십대다.
유여시는 나이 든 남편을 위해 잠자리에서만은 여성 상위 체위를 관철시켜 주도권을 잡았다. 전겸익은 유여시를 위해, 열흘 동안 공사를 직접 주관하여, 인근 홍두산(紅豆山) 기슭에 아름다운 작은 누각을 지어 준다. 그리고 누각의 이름을 아문(我聞)이라고 짓는다. 불교의 금강경(金剛經)에 제일 처음 서두에 나오는 말이 “여시아문(如是我聞: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이다. 즉 석가모니의 설법을 나는 이렇게 들었다는 것이다. 아문(我聞)은 여기에서 따온 말이고, 유은(柳隱)의 자(字)인 여시(如是)와 붙이면 금강경의 서두인 여시아문이 되는 것이다. 늦게 배운 도둑질 밤새는 줄 모른다더니, 전겸익은 젊은 여자에 빠졌고 유여시는 마음의 평정을 얻어 세상이 온통 제 것이다. “여보 오늘은 밖에서 수고가 많으셨어요. 이 놀이는 소녀가 황제에게 받쳤던 토연호(兎吮毫)라는 놀이입니다. 조용히 누워만 계세요.” 여자는 사타구니를 벌리고 사내의 불두덩에 올라타서, 사내 발 쪽을 향하여 엉거주춤한 자세 취한다. 엉덩이를 내려 사내의 심벌로 자신의 옥문 위쪽 음핵주위를 찌르며 상하운동을 하자 부부는 금방 동시에 황홀경에 진입했다.
때는 1644년 이자성(李自成)의 난으로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崇禎帝)가 목을 매 자살하면서 명나라는 멸망한다. 뒤이어 만주족의 나라인 청나라가 북경을 점령하고, 강남 공격을 시작한다. 강남의 부패한 조정을 비판하던 동림당을 비롯한 강남의 지식인들은 반청(反淸) 운동에 나섰고, 북경에서 쫓겨난 부패 환관들과 관료들은 숭정제의 조카를 복왕(福王)으로 추대하여 남경에서 망명 정부를 만든다. 그리고 전겸익을 비롯한 동림당 인사들도 망명 정부에 참여한다. 많은 사람들이 부패 환관과 관료들과 함께 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명나라를 지킨다는 대(大)를 위하여 소(小)를 희생한다는 마음으로 내린 결론이었다. 그러나 나라가 망했어도 탐관오리들은 변함없이 마지막까지 자신들의 탐욕만 채우는 모습을 보인다. 1645년 4월, 인근 양주(揚州)가 수많은 백성들이 학살당하면서 청군(淸軍)에 점령당하고, 청군은 남경을 향해 다가온다. 그러자 유여시는 전겸익을 진회하로 데리고 가서, 청나라에 항복하기보다는 함께 물에 빠져 죽자고 한다. 그러나 겁이 난 전겸익은 이를 거부하고, 유여시가 혼자라도 몸을 던지려고 하자, 전겸익이 끌어안으며 그마저도 못하게 한다. 나중에 전겸익은 체포되어 반청운동에 가담했던 전력이 있어 옥고까지 치르면서도 천수(天壽)에 가까운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유여시는 늦으막에 버팀목이었던 남편이 유명을 달리하자 불과 34일 후 스스로 목숨을 끊어 뒤를 따랐다. 그녀 나이 47세로 사내들을 한창 녹일 나이였다. 유여시는 기생이면서도 명말청초의 혼란기에 명나라에 대한 의리와 애국을 다한 여류 시인으로 후대의 사람들은 그녀를 협기(俠妓: 의로운 기생)라고도 불렀다.
20세기초 언론인이자 작가였던 서천소(徐天嘯)는 “지조의 고결함, 행동의 강경함, 말의 완곡함과 격렬함으로 진실한 애국자가 아닐 수 없다.”라고 그녀를 평가했다. 무려 10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마지막 작품으로 <유여시별전(柳如是別傳)>을 남긴 역사학자 진인각(陳寅恪)은 그녀를 “독립의 정신, 자유의 사상”이라고 평가했다. 진인각(陳寅恪)은 가난과 병으로 고생을 하면서도 온 힘을 다해서, 10여 년의 시간을 들여 그의 구술을 조수가 받아 적게 해서 80여만 자의 <유여시별전>을 썼다. 우리나라의 황진이(黃眞伊)나 이매창(李梅窓)도 시를 잘 짓고 얼굴도 아름다운 최고의 기녀이며 시인이었다. 그녀들은 사대부들과 교제하면서 주로 인생살이나 사랑과 이별, 신분에 대한 한탄, 자연의 이치 등의 주제에 천착(穿鑿)한 면이 많다. 그러나 유여시는 이런 주제를 포함하여 더 크게 우국충정(憂國衷情)을 노래하고, 실제 나라를 걱정하는 모임을 주도하는 등 그녀의 시세계가 남성의 영역까지 그 폭을 넓혔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그녀를 진회팔염의 수위(首位), 중국 10대 명기(名妓)의 수위로 인정하는 것이다.
유여시의 시문은 이미 그의 생전에 많이 판각되었다. <무인초(戊寅草)>는 숭정 11년(1638) 유여시의 나이 21세 될 때 지어졌는데, 수록된 작품으로는 시(詩) 106수, 사(詞) 31수, 부(賦) 3편이 있으며, 책의 앞부분에 사랑하던 진자룡의 서문이 있다. 이 문집은 진자룡에 의해 판각되었다. <호상초(湖上草)>는 진자룡 이후에 정신적으로 교제하던 왕연명(汪然明)이 유여시 본인의 필사본을 근거로 <무인초>가 나온 이듬해에 판각되었는데, 수록된 시가 35수이다. 또 그녀의 편지글인 <유여시척독(柳如是尺牘)>은 유여시가 왕연명에게 보낸 서간 31통이 실려 있는데, 역시 왕연명에 의하여서 판각되었다. 책의 앞부분에는 설림(雪林)의 「유여시척독소인(柳如是尺牘小引)」이라는 서(序)가 있다. 총체적으로 그녀의 시는 <무인초(戊寅草)>의 106수, <호상초(湖上草)>의 35수, <유여시시(柳如是詩)>의 29수, <동산수화집(東山酬和集)>의 18수, 그리고 <목재초학집(牧齋初學集)>이나 <목재유학집(牧齋有學集)> 등 다른 사람의 문집에 산재해 있는 10여수 등으로 약 200수가 전해오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진자룡이 과거를 보려고 북경으로 떠나갈 때 이별의 슬픔을 담은 시 한 편을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