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遼) 나라는 10~12세기에 거란족(契丹族)의 야율(耶律) 아보기(阿保機)가 중국 북방의 네이멍구(內蒙古) 지역을 중심으로 세운 왕조로서, 916년 건국 당시의 명칭은 거란국(契丹国)이었다. 938년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 석경당(石敬瑭)으로부터 연운 16주(燕雲十六州)를 획득한 뒤 중국지배를 위해 나라 명칭을 요(遼)라 하였다. 후진(後晉, 936∼947)을 세운 석경당 이후 출제(出帝)의 통치기간에 이들을 다시 쳐들어 가서 멸망시켰다. 통치 구조도 이중으로 남면관(南面官)에서는 당(唐)의 군현 제도를 그대로 본떠 한인(漢人)을 통치하고, 북면관(北面官)에서는 거란의 관습에 따라 통치했다. 1125년 여진(女眞)에 세운 금(金, 1115∼1234)에 멸망되었지만, 야율대석(耶律大石)이 중앙아시아에 서요(西遼, 1132∼1218)를 건국하여 1218년 칭기즈칸(成吉思汗, 1155?~1227)의 몽골에 병합될 때까지 존속되었다. 유목민답게 요나라는 말안장을 집으로 삼기 때문에 왕후나 비빈들도 활쏘기 말타기에 아주 능했다. 그래서 전투나 사냥에 여성들도 같이 나가서 싸운다. 거란에는 오로지 야율씨(耶律氏)와 소씨(蕭氏) 두 개의 성씨만 귀하게 여긴다. 칸 즉 황제는 야율씨 집안이고 황후는 소씨 집안 출신이다.
태조(太祖) 야율아보기가 죽자 순흠황후(淳欽皇后) 술률평(述律平)이 태자 야율배(耶律倍)를 제치고 둘째인 야율덕광(耶律德光)을 태종(太宗)으로 세운다. 이때 선왕 때의 대신들과 태자 쪽의 많은 신하들이 학살을 당한다. 심지어 자기의 오른 팔도 잘라서 남편의 관에 함께 묻는 냉혹함을 보였단다. 하지만 3대 황제는 야율배의 아들인 야율완(耶律阮)이 세종(世宗)으로 되고, 폭정을 하자 피살된다. 그러자 2대 황제 야율덕광의 아들 야율경(耶律璟)이 제4대 황제 목종(穆宗)으로 즉위한다. 그는 음주와 횡포가 심했다. 회주(懷州)로 곰 사냥을 떠나는 길에도 별다른 이유 없이 앞에서 행차를 인도하는 말급(末及)과 익랄(益剌)을 죽이고, 그 시신을 잘게 썰어 내버리는 잔혹한 짓을 저질렀다. 이후 잔뜩 술을 마셔 만취한 채로 행궁에 들어왔고 근시(近侍)인 소가(小哥), 세숫물 담당관인 화가(花哥), 요리사 신고(辛古) 등 6명이 모의해 목종을 시해했는데 이때 황제의 보령 39세였다. 예로부터 권력은 금단의 열매와 같아서 없으면 가지고 싶고, 가지면 절대 나누어 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금단의 달콤한 열매를 힘들여 쟁탈하지 않았는데, 황제의 최측근들이 덜커덕 사고를 저질러 주인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그때 3대 황제 야율완의 아들인 야율현(耶律賢)이 어부지리로 제5대 황제 경종(景宗)으로 즉위한다.
보통 촌수 같으면 삼촌뻘인 전왕의 원수를 갚으려고 군사를 일으키거니 시해에 가담한 놈들을 색출하여 반역죄로 다스려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는 이 일로 권력이 넝쿨째 굴러 들어왔으니 도리어 쿠데타 주역의 3총사인 소가, 화가, 신고에게 정권 창출의 공로벼슬을 내리고 정국을 평정시켰다. 경종은 뜻밖에 최고의 권좌에 올랐으나, 전임자들의 최후를 잘 알고 있었기에 나름 정치를 잘하려고 애를 썼다. 한족(漢族) 관료를 채용하기 시작하였고 부패를 없앴는데 뇌물 수수자와 무능력자들을 해고하였다. 그는 비판을 받아들여 사냥놀이도 줄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때까지 미혼으로 남아 있어서, 옆구리가 늘 허전했다. 초원의 겨울날씨에 옆구리가 허전하면 긴긴밤을 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닐 거다. 이 같은 상황에 절세미인 소작(蕭綽)의 소문이 황궁에까지 흘러들어 갔다. 소작은 초원 사람들이 이승 사람이 아닌 전설상의 미인으로 부르는 서왕모(西王母)와 비견한다 해 세칭 세랑(細娘)이라 부르며 추앙한 대상이다. 소작(蕭綽)의 자(字)는 염염(炎炎)이며, 아아극(雅雅克)으로 기록되기도 하고, 아명은 연연(燕燕)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소사온(蕭思溫)이고 어머니는 연국대장공주(燕國大長公主)이다. 이들은 아들은 없고 딸만 셋이었는데 막내딸이다. 옆구리가 비어 있는 처지에 좋은 소식을 들은 경종은 지방에 있는 위왕(魏王) 소사온(蕭思溫)을 황궁으로 불러 장인이 되어 달라고 청혼을 했다.
소작은 벌써 몇 달 전에 약혼을 한 몸이다. 소사온은 기쁘기도 하지만 이미 약혼까지 한 딸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몰라 겁부터 났다. 스물이 넘은 경종은 원래 몸도 약하고, 그동안 황궁에서 관심 밖의 인물 취급을 받았으나 황제에 등극하고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황후와 후사 문제를 동시에 해결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소작이 떠올랐다. “자 이리 편히 앉으세요. 오늘 위왕(魏王)을 뵙자고 한 것은 잘 아시다시피 짐(朕)이 아직 장가를 못 갔기 때문입니다. 내 듣자 하니 여식이 있다기에 내가 장인으로 모실까 하는데 생각은 어떠하오?” 소사온은 황궁에 들어올 때 내관의 귀띔으로 짐작은 했으나 막상 황제가 직접 청혼을 하자 기쁨과 두려움이 동시에 엄습했다. “왜 내가 마음에 안 드시오?” 황제는 대답을 못하고 술잔을 든 채 멍하니 앉아있는 소사온을 다그쳤다. “아무 걱정 말고 딸을 내게 주시오.” “예, 황제폐하…” 소사온은 얼떨결에 대답하면서 술잔의 술을 술상 위로 주르르 흘렸다. 경종은 보기 보다 성질이 급하다. 미인으로 소문이 자자한 소작을 입궁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어 밤마다 미행(微行)을 나고자 작정했다. 소사온은 황궁에서 나오자 딸에게 언제라도 황제가 오면 모실 준비를 시켰다. 말과 함께 행동으로 옮기는 황제의 성품을 알고 있어서다. 경종은 그 이튿날 밤에 미행을 했다. 소작은 낮부터 목욕재계하고 황제를 기다렸다. 술시(戌時)가 조금 지나자, “주인장 계시오. 지나가는 과객인데 하룻밤 신세 집시다.”라며 황제가 내관 한 명과 당도했다. 소사온은 황급히 나와 황제를 맞았다. “누추하오나 이곳으로 드시죠. 연연(燕燕)아 귀한 어르신께서 오셨다. 인사 올려라.” “내 너를 결코 불행하게 만들지 않으리라!” 경종은 첫눈에 소작의 미모에 빠졌다.
소작은 토브슈르(Tovshuur : 전통악기)를 켜면서 고운 목소리로 툴리(Tuuli : 서사시)를 부르면서 들어왔다. 낭랑한 음성과 함께 가늘게 울려 퍼지는 토브슈르의 음률이 아름답게 어울렸다. 백합같이 흰옷에 삼단 같은 검고 긴 머리가 어우러져 경종의 눈엔 소작이 이승의 여인이 아닌 천상의 선녀인 듯해 보였다. “그래 이제 이리 와서 술 한 잔 따르어라.” “황제폐하 소신은 이제 나가 보겠습니다.” 소사온은 딸만 두고 밖으로 나왔다. 하늘엔 보석 같은 별들이 손에 닿을 듯이 총총하다. “그리 편히 앉아라. 우리는 며칠 있으면 부부가 될 터인데, 내가 너를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어 참지 못하고 이렇게 급히 왔노라.” “예 황제폐하 소녀도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이 곡을 다 들으시면 어떠하신지요? 소녀 황제폐하를 모시고자 정성껏 준비하였사옵니다.” “그랬느냐? 그래도 이리 앉아라. 너를 세워놓고 어디 술맛이 나겠느냐. 그 노래야 두고두고 들을 수 있지 않느냐?” 황제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소작을 잡아끌어 앉혔다. 소작은 못 이기는 척 술상 맞은편에 앉았다. “너도 한잔 하여라.” 경종은 술잔을 소작에게 건넸다. 술잔이 하나라 자연스럽게 주거니 받거니 하였다. 여인은 몇 잔에 금방 얼굴이 연분홍 동백꽃 빛깔로 변했다. 황제는 소작의 연분홍빛의 얼굴을 보고는 더는 참을 수 없어 발길로 술상을 밀어 제치고 풋풋한 여체를 끌어안았다. “너는 어찌 그리도 사내 애간장을 녹이느냐? 우린 어차피 부부가 되는데 며칠 일찍 합궁을 하는 거다.” 사내의 손길은 거칠 것이 없이 여인의 옷을 벗기고 사정없이 공격을 했다. 소작은 사내가 처음이다. 아랫도리가 아프고 눈물이 샘물처럼 솟았으나 이를 악물고 참았다. 술기운으로 황제는 여인의 신음소리도 아랑곳 않고 한동안 음락을 즐기더니 벌떡 일어나 자기의 물건을 살폈다. 사내의 물건엔 선혈이 선명하다. 황제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소작을 다시 힘껏 끌어안았다. 숫처녀임을 확인하고 기분이 좋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는 결혼날까지 참지 못하고 이틀에 한 번씩 미행을 했다. 소작의 나이 17세에 요나라 국모가 되었다. 979년 5월 송나라 태종(太宗)이 연운(燕雲) 16주를 수복하고자 원정군을 몰고 쳐들어오자 경종과 황후들 이들을 맞아 싸워 물리쳤다. 국경과 국내의 정정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경종은 조정에서 정치를 하는 것보다 사냥을 다니기를 좋아했다. 그러니 자연히 조정의 일은 황후인 소작이 맡아서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정치의 달인이 되어갔다. 982년 어느 날 사냥을 나갔던 경종이 부상을 당하여 귀환하던 중 사망하고 만다. 향년 34세로 일찍 세상을 떠나자 소작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 야율융서(耶律隆緖)가 10살의 나이로 성종황제로 즉위하고, 소작은 29살에 섭정을 담당한다. 성종은 다음 해 그녀에게 승천황태후(承天皇太后)라는 존칭을 내렸으며, 또한 그녀의 성인 소를 따서 소태후(蕭太后)라고 불렸다.
어린 아들 대신 모든 권력을 잡고 이제 그야말로 황제의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실제로 경종은 976년 칙령을 내려 소작이 황제의 칭호인 짐(朕)이나 여(予)라고 칭하라고 했다. 그녀가 집권하면서 취한 조치는 먼저 낡은 제도를 타파하고 유능한 인재를 기용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요나라가 건국된 후 계속 유지해 온 관리 세습제와 당시의 종족 제한을 타파하고, 야율사진(耶律斜軫)·야율휴가(耶律休哥)와 한족출신 한덕양(韓德讓) 등을 발탁, 정책 결정과정에서 이들을 적극 활용하여 정국을 안정화시켰다. 야율사진과 야율휴가는 그녀를 따라 동분서주 정벌에 나섰다. 이들을 나라를 경영할 만한 재능과 탁월한 전공을 올린 종친이었다. 소태후는 이 두 사람의 충성을 지속시키기 위해 조카딸을 야율사진에게 시집보냈고, 성종 야율융서와 야율사진에게 화살과 말안장을 교환하여 절친한 친구 사이임을 맹서 하게 했다. 이어 성종은 말을 야율휴가에게 내리니 야율사진과 야율휴가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죽을힘을 다해 충성할 것을 약속했다.
소작은 처녀시절 혼담이 오가다가 약혼까지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한족 출신으로 요나라에 귀화한 한덕양(韓德讓)이다. 이 때문에 그녀는 언젠가 한덕양에게 “오래도록 사이좋게 잘 지냈으면 좋겠소. 지금 어린 주상은 당신의 아들과 같으니 친아들처럼 잘 보좌해 주시오.”라고 당부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고는 한덕양의 아내 이씨에게 독주를 내려 독살시킨다. 얼마 뒤 소태후는 한덕양에게 거란의 제1성인 야율(耶律)이란 성을 내리고 이름도 융운(隆運)으로 바꾸게 한 다음 총관양원추밀원으로 발탁하여 군사와 정치의 대권을 총괄하는 대승상 자리에 앉혔다. 그야말로 파격이었다. 한덕양, 아니 야율융운은 여기에다 황궁의 수비를 책임지는 숙위병 총령까지 맡았다. 한덕양은 좌우로 백 명이 넘는 시위병을 거느리며 황제만이 누릴 수 있는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이러한 조치들로 조정은 안정을 찾았다.
소작은 침소로 한덕양(韓德讓)을 극비리에 불렀다. 그것도 깊은 밤이다. 낮엔 보는 눈이 많아 아무리 조심을 해도 비밀이 없기 때문이다. 한덕양은 갑작스러운 소작의 부름에 겁이 덜컥 낫다. 최근의 앞 뒤 일들을 곰곰이 생각해 봐도 책잡힐 일이 없을 것 같으나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얼마 전에 진왕(晉王)으로 봉해짐과 동시에 야율융운(耶律融運)이란 이름까지 하사 받은 것이 왠지 마음에 걸렸다. 아버지 대에서부터 공을 세워 한족으로선 최고의 직까지 올랐으나 기쁨에 앞서 뭔가 두려움의 그림자가 앞을 가렸다. 한덕양의 발걸음은 소작의 부름이지만 가볍지만은 않았다. “어서 오세요. 진왕! 밤늦게 오시라 해서 미안해요.” 소작은 방문 밖까지 나와 진왕을 맞았다. 한덕양은 긴장되어 소작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45도로 숙여 어깨 밑으로만 보았다. 이같이 가까운 거리에서 보는 것은 18년 전 처녀 총각으로 약혼식 이후 처음이다. “진왕, 그리 편히 앉으세요.” 소작은 한덕양을 상석에 앉히고 넙죽 절을 하며 “소첩 18년 전의 일을 사과드립니다. 오늘 이 시간부터 진왕을 저의 실질적 낭군으로 모시겠습니다.”라며 약혼식에서 나누어 가진 옥(玉) 가락지를 앞에 내어 놓았다. 사실 한덕양도 소작과의 약혼식을 치른 후 한 달 후면 결혼식을 하고 정식 부부로 꿀 같은 신혼생활을 할 수 있었으나 경종이 소작을 도둑질해 감으로써 오늘 극적으로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마마! 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한덕양은 얼떨결에 절을 받기는 했으나 안절부절 엉거주춤한 자세로 몸 둘 바를 몰라했다. “진왕, 그렇게 어려워할 것 없어요. 지금부터 우리는 18년 전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너희들은 내가 부를 때까지 너희들 처소에 가 있거라.” 궁녀와 내관들도 모두 물리치고 소작의 처소는 18년 전 처녀 총각 둘만이 되었다. “소첩은 한공자(公子)와 강제로 헤어진 후 한시도 공자를 잊어본 적이 없어요. 공자는 소첩과 헤어진 후 결혼해 행복한 가정을 꾸렸지요?” 소작의 입에선 술향이 풍겼다.
수만의 병사를 이끌고 전장에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했던 초원의 철의 여인도 순정을 받치려던 옛 연인 앞에선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미리 술을 마셨던 것이다. “한공자 지금 이 자리는 18년 전의 우리입니다. 이 술 한잔 받으세요. 이 술이 대국주(大麴酒)인데 5대 명주 중 하나지요. 소첩은 거란족이지만 한족을 존경합니다.” 한덕양은 발그레하게 갓 피어난 복사꽃 빛깔의 소작의 얼굴을 정면으로 처음 쳐다보며 술잔을 받았다. “황공하옵니다.” “그렇게 말하지 말라니까요. 어서 한잔 하시고 저에게도 한잔 주세요.” 소작은 술잔을 재촉했다. 한덕양은 단숨에 술잔을 비우고 소작에게 술작을 넘겼다. 안주도 먹을 사이 없이 몇 잔의 술이 오가고 술기운이 오르자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지난 세월을 아쉬워했다. “진왕…!” 여인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사내의 품에 몸을 맡겼다. 사내도 안겨오는 여인을 처음엔 목석같이 덤덤하게 맞다가 뜨거운 열기가 전이되자 서둘러 쓸어안았다. 소작은 속내의가 없이 겉옷 바람이었다. “소첩이 공자를 얼마나 사모했는지 알고 계십니까?”여인은 주저주저하는 사내의 옷을 손수 벗겼다. 사내의 물건은 의외로 겁에 질려 누에고치의 번데기 모양 바짝 오그라져 있다. “아직 실감이 안 나세요? 이 시간부터 우리가 만날 땐 한공자와 소첩은 이전의 연연(燕燕)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자 어서 힘을 내세요.” 여인은 엷은 은은한 분홍빛 겉옷을 훌렁 벗어 내렸다. 늘씬한 몸매에 남자 장수 못지않게 전장을 누비며 단련된 몸매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리고 급히 마신 술기운이 온몸에 퍼져 더욱 신비롭고 요염(妖艶) 해 보였다. 어른거리는 등잔불이 싱싱한 남녀의 전라를 비추어 아름다운 분위기를 넘어 신비롭기까지 하다.
“한공자 우리 술잔을 연리지(連理枝) 같이 마십시다.” 소작이 러브샷을 하자며 반발짝 다가서자 한덕양의 심벌이 여자의 비너스 언덕에 닿았다. 여인은 사내의 물건이 커지길 기다리는 시간이 아쉬웠다. 중원을 내달리듯 쳐들어 왔으면 좋으련만 적토마(赤土馬)로 생각했던 한덕양은 비루먹은 말 같아 슬픈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사내는 너무 갑작스러운 분위기에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고 있다. 몇 잔의 술잔을 더 비워도 취기가 오르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지금 상황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전라의 여인을 몇 번이고 확인을 했다. 사내는 18년 전 연연의 얼굴을 상기하면서 입속으로 “역시 소작은 천하제일의 미인이었구나…”라며 두 손으로 탱탱하고 비단결 같이 부드러운 여인의 엉덩이를 힘껏 당겼다. 비루먹은 것 같던 말은 그 사이 적토마가 되어 고개를 추켜들고 숲과 달콤한 물이 비옥한 중원의 계곡 속을 종횡무진으로 달렸다. 소작은 죽은 경종과 결혼을 해 4남 3녀를 낳았으나 후사(後嗣)를 이을 생산기지 역할만을 했을 뿐 애틋하고 달콤한 부부생활은 하지 못했다. 이제 미망인이 되어 그 옛날의 첫사랑을 만나 18년 전으로 돌아가 한 덩어리가 되니 몸은 용광로가 되어 삽시간에 사내를 용해시키고 말았다.
두 몸이 동시에 숨이 막힐 듯한 한차례의 말 달리기를 즐기고 기진맥진(氣盡脈盡) 해 있는 적토마를 조몰락거리며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는 궁으로 들어와 저와 저녁을 같이 하세요.”라며 한덕양에게 명령하듯 말하는 소작의 두 눈엔 애원의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고였다. 경종은 붕어하고 어린 아들이 성종으로 즉위하였지만 소작은 모든 정치를 섭정하니 황제나 다름없었다. 더욱이 죽은 경종이 황제의 칭호인 짐(朕)과 여(予)를 스스로 쓸 수 있게 정식으로 허락했으니 정식 황제가 아니지만 황제나 다름없다. 송나라와 국경분쟁으로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으나 아들 성종(聖宗)이 등극하고 본인이 섭정하고부터는 정국이 안정되어 소작은 첫사랑 옛 약혼남과 밀회를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17살의 어린 나이에 국모가 되어 궁궐에서 노심초사하며 권력 다툼을 정리하고, 베갯머리에 눈물 자국께나 남겼지만 이젠 아니다. 그간의 배고프고 허기가 졌었던 것까지도 찾아서 먹으려는 욕심이 은근히 발동하고 있다. 성종 나이 이제 겨우 12세로 소작이 일일이 섭정을 하고 있으나 병권은 연인 한덕양에게 맡기고 여인으로 돌아가 사랑의 정원에 피곤한 날개를 접었다.
경종과의 사이에 낳은 넷째 아들은 일찍 여위고 3남 3녀가 모두 국정에 참여해 튼튼한 성(城)이 되어 요나라는 건국 이래 최고의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다. 소작으로 금상첨화는 옛 약혼자 한덕양을 병마대원수에 임명해 송나라와의 전쟁이나 국경을 수시로 순시할 때 밀월여행 삼아 그간 못다 한 사랑을 불태울 수 있어 하루하루가 금쪽같이 아까운 것이다. 한덕양 역시 병마대원수가 됐으나 소작의 세 아들과 세 사위가 철통 같은 방위를 하고 있어, 초순 중순 하순 한 달에 3번 정도 국경수비대를 순찰하는 것이 군무(軍務)의 전부였다. 이처럼 3번 순찰을 나아가는 것도 소작과 밀월여행을 하기 위함이다. 문무백관들이 나이 어리나 성종의 사려 깊은 언행 뒤엔 실세 소작이 있음을 알고 있어 그들은 요나라의 측천무후(628~705)라고까지 불렀다.
어느 봄날 봄꽃이 만발할 즈음 한덕양에게 남쪽으로 밀행을 하자는 소작의 전갈이 온다. 송나라와 국경을 하고 있는 둘째 아들이 왕으로 있는 지역을 순찰 나가자는 통보다. 소작이 몰래 독살하여 한덕양도 1년 전부터 홀아비 신세라 소작과의 국경 순시가 은근히 기다려지는 처지다. 한번 순시를 나아가면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열흘이 걸려 사실상 꿈같은 신혼여행이다. 한덕양은 신바람이 났다. 순시길의 노정에선 승천황태후(承天皇太后 : 소작)와 병마대원수가 아닌 그냥 사랑하는 한 쌍의 남녀 소작과 한덕양이 되어 뜨거운 사랑을 마음껏 나눌 수 있어 그들은 순시행을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올핸 봄이 유난히 만발했어요. 복사꽃이 마침 늦게 맞은 소첩의 사랑처럼 만개한 것 같아요.” 소작이 한덕양의 품을 파고 들으며 벌써 코맹맹이 소리를 해댄다. 차남 야율융경(耶律隆慶)의 성에 도착하자마자 온천욕을 하면서 온몸을 녹지근하게 녹였다. 그리곤 몇 잔의 마유주(馬乳酒)에 몸과 마음을 벌써 하늘로 날아오르는 기분이다.
지난날 말을 타고 장검을 휘두르며 초원을 누볐던 철의 여장부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여보 저를 꼭 안아 보세요. 순찰 나와선 우린 부부가 되는 거예요. 저는 이 순찰이 없었다면 이 삭막한 초원지대에서 어떻게 살아갈까 막막했어요. 그럴 때 당신이 혜성같이 나타난 거예요.” 전장을 종횡무진으로 누비며 단련된 육체에서 뿜어 나오는 정염엔 건강에 자신이 있는 한덕양도 힘이 부쳤다. “조금만 더 힘을 쓰세요.” 여인은 사내의 피스톤 운동이 성에 안 차는지 밑에서 엉덩이를 들썩이다 말고 두 손으로 사내의 엉덩이를 힘껏 잡아당긴다. 사내의 등엔 어느새 구슬땀이 흐르고 있다. 여인의 입에선 열락의 신음 소리와 달콤한 사랑의 단내가 아침 안개처럼 피어올라 사내의 코를 자극했다. 짙은 사향(麝香)과 장미향이 섞인 향기가 대뇌로 들어가자 사내는 꺼져가려던 욕망에 다시 불이 붙어 두 다리에 힘을 넣어 고개를 쳐든 말머리로 여인에게 재차 공격해 나아갔다.
술기운과 열락(悅樂)이 동시에 나타난 여인의 얼굴은 장맛비 후에 흐드러지게 핀 연꽃 모양이다. 두 개의 눈망울도 사랑의 감미로움에 활짝 열렸으며, 백합보다 더 희고 고운 앞가슴에도 홍역 앓는 어린아이 같이 붉은 반점(斑點)들이 그림을 그렸다. 여인은 커다란 수건으로 아랫도리만 겨우 가린 채 늘어져 있었다. 풀어 늘어뜨린 삼단 같은 머리가 갓 피어난 연분홍 복사꽃 빛깔의 얼굴과 조화를 이뤄 방금 천상에서 내려온 선녀와 같았다. “당신은 갈수록 더 예쁘오!” 소작은 함박웃음을 다시 보이며 “당신한테 예쁘단 말을 들으니 정말 행복해요.”라며 남자의 품을 다시 파고들었다. “그런데 당신은 우리가 사랑을 할 때 그렇게 즐겁게 하는 것 같지 않던데요? 무슨 근심거리라도 있나요?” 한덕양으로서는 옛날의 연인이지만 지금은 하늘과도 같은 태후가 아닌가. 까딱 조금이라도 실수가 있으면 언제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상황이니까 그녀와의 사랑놀음이 마냥 즐거운 것이 아니다. 열심히 풀무질을 하면서도 그녀의 눈치와 상황을 살펴야 하니 제대로 집중이 되질 않을 것이다. 사내의 성심리가 의외로 예민하고 상처를 잘 받는 걸 여인들은 등한시(等閑視) 하기 쉽다.
소태후에 대한 역사상 평가는 대체로 좋은 편이다. 거란을 발전시킨 현명하고 대의에 밝은 여걸의 모습이 대부분이다. 남편 경종이 몸이 허약하여 황위에 있던 시기에도 그녀가 중요한 국사를 주로 처리하였다. 이후 아들 성종이 황위에 오르자, 12세의 그를 대신하여 섭정(攝政)을 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섭정 기간에 중국의 제도를 많이 도입하여 법전을 편찬해 공포하고, 과거제를 실시하여 인재를 등용하고, 불경을 편수하여 불교문화를 발전시켰다. 우리나라와의 악연도 있다. 993년 소손녕(蕭遜寧)에게 80만 대군으로 고려를 침략케 하였다. 그때 고려의 유명한 외교관 서희(徐熙)가 소손녕의 진영에 들어가서 담판을 지어 거란군이 물러나고 압록강 동쪽의 땅 280리 즉 강동 6주를 획득한 계기를 만들게 하였다. 이것이 고려와 거란의 1차 전쟁이었다. 소태후가 죽은 후이지만 1010년에는 강조(康兆)의 정변을 이유로 쳐들어왔고, 1018년에 3차로 침입했지만 강감찬(姜邯贊) 장군이 귀주대첩으로 물리친다. 역시 우리 민족이 끈질기다.
중국과는 1004년 송나라와 직접 전쟁을 하여 거란에 유리한 화약을 맺었다. 이를 전연의 맹(澶淵之盟)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후로 송은 거란에 매년 은 10만 냥과 비단 20만 필을 세폐(歲幣)로 바친다. 한족의 나라가 이민족에게 조공을 바치는 꼴이었으니 알만하다. 이후, 거란은 그를 기반으로 재정을 닦고, 송과의 무역도 활성화되었다. 소작은 거란이 거대한 정복 왕조로 대제국을 이루고, 성종 때 전성기를 이룩하기 위한 기반을 닦은 여인으로 평가된다. 소작은 옛 첫사랑의 연인과 후회 없는 사랑을 나누다 1009년 12월 57세로 남편을 따라갔다. 성종(聖宗)은 소작에게 성신선현황후(聖神宣献皇后)로 추존했다 다시 예지황후(睿智皇后)로 추존해 그의 모친의 영혼을 달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