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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천하의 도둑들 이야기

by 금삿갓

세상이 뒤숭숭하여 교활한 도적들이 활기를 치는데, 판관(判官)과 포청(捕廳)은 영역 다툼으로 손 놓고 먼 산만 바라보니 한심하기 이를 데가 없다. 춘추시대의 도적도 이렇지는 않았을 텐데. 『장자(莊子)』 「도척편(盜跖篇)」에 따르면, 최고의 도둑인 도척(盜跖)에게도 지키는 5가지 도(道)가 있다고 했다. 1) 도둑질할 대상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성(聖), 2) 앞장서서 들어가는 것이 용(勇), 3) 제일 나중에 나오는 것이 의(義), 4) 실행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지(智), 5) 장물(贓物)을 공평하게 나누는 것이 인(仁)이라고 한다. 그는 노(魯) 나라에서 현인으로 추앙받던 형벌 재판관 유하혜(柳下惠)의 동생으로 본명은 전척(展蹠)이다. 유하(柳下)는 지명이고, 혜(惠)는 시호(諡號)이며, 본명은 전획(展獲)이다. 둘은 노나라 유하읍(현재 효직진) 출신으로 대부(大夫) 전우해(展尤駭)의 아들이다. 창이 있으면 방패가 있는 법. 재산을 잘 갈무리할 금고가 발명되어 안심하나 싶으면 이를 뚫어서 털어가는 도둑 있으니, 상호 기술의 발전이 촉진되는 부가 효과도 있다. 해킹기술 발달로 보안기술도 더 발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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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금고털이 관련 사건은 서부 영화에서 자주 제작된 관계로 그 수법이 날로 고도화된다. 오늘은 옛날 아날로그 시대의 은행털이범들을 살펴보자. 허버트 에머슨 윌슨(Herbert Emerson Wilson)은 전직 성직자이자 참전 용사였으며, 은행 강도, 우편 강도, 금고털이범, 탈옥범, 살인범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은 의심할 여지없이 20세기의 뛰어난 범죄자이다. 그는 1881년 3월 1일 캐나다 온타리오주 와이오밍에서 태어났다. 3남 5녀 중 넷째였으며, 부모인 맬컴과 크리스티나 윌슨은 독실한 신앙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니트로글리세린 제조법 개선에 관심을 가진 발명가이자 화학자였다. 아버지 연구실의 연구에 관심을 가졌던 허버트는 무의식적으로 과학적 절도 및 금고털이 분야에서 오늘날까지 전례 없는 경력을 쌓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줄 지식을 습득했다. 그의 어머니는 그의 어린 시절부터 종교의 근본 원리를 함양하기 시작했으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를 성직자로 키우겠다는 결심은 더욱 굳건해졌다. 허버트의 가족은 온타리오주 런던으로 이주하여 고등학교를 다녔다. 영국이 남아프리카 보어인들에게 전쟁을 선포했을 때 그는 19세에 제1도시의용군에 입대했다. 케이프타운, 포트엘리자베스, 그레이엄스타운에서 활동하기 위해 아프리카로 파견되었다. 남아프리카에서 승리의 기쁨으로 돌아온 그는 버킹엄 궁전에서 영예를 얻었고, 그곳에서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특별 훈장을 받고 그의 증서(Record of Deed)가 낭독되었다.

귀국하여 부모의 뜻에 따라 허버트는 온타리오주 런던에 도시 선교회를 설립하는 침례교 목사 안수를 받았다. 미국 여러 지역을 여행한 후 샌디에이고에 정착하여 1년도 채 되지 않아 샌디에이고 교회의 목사로 부임했다. 허버트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성직자 생활을 마감했는데, 이는 그 자신도 놀랄 만한 일이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던 이 남자는 기이한 변화를 겪으며 구식 종교적 신념과 교회 성직자들에 대한 그의 헌신이 무너졌다. 그는 갑자기 신앙을 잃고, 사역이 더 이상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고 결심했다. 그는 폭발물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좋은 도구와 조직력도 뛰어났다. 디트로이트에서 허브 콕스(Herb Cox)라는 이름의 범죄자를 만난 후, 완벽한 폭풍이 몰아쳤다. 로스앤젤레스의 성공한 사업가로 위장하고, 말솜씨가 좋고 품위 있는 침례교 목사였던 그는 금고털이범으로 변신했다. 완벽한 일을 해낼 수 있는 초강력 사기꾼들과 범죄 전문가들로 구성된 조직을 결성하고, 강도 사건을 세심하게 계획했다. 금고 전문 절도 한 길만 걸었다. 외골수 프로답게 털기 전에 먼저 해당 금고 제작공장에 취직한다. 첫 단계 용접 기술부터 배웠다. 그리고 전 공정을 익혔다. 이어 시중제품을 조사하고 팸플릿을 수집해 숙독했다. 몇 대를 구입해 스스로 금고 열기 실습도 했다. 그래서 그 팀은 한번 털이에 10만 달러 이하는 적자다. 윌슨은 목사 출신답게 훔친 돈의 배당금 중 일부를 가난한 교회에 보내곤 했다. 그는 금주법(禁酒法) 시대에 범죄 활동을 하며 총계 1,500만 달러가 넘는 돈을 챙긴 후 1921년 봄에 체포되었다.

금고털이는 잡히는 위험 이외에도 매우 고난도 위험 작업이다. 금고 파괴에 니트로글리세린을 썼다. 업계 용어로는 스프라고 한다. 휘발성이 높고, 작업하다가 하늘로 날러가기도 하고 폭발음도 컸다. 그래서 소리 줄이려고 햄을 몇 겹 둘렀다. 이것이 터져서 범행장소 일대에 비 오듯 쏟아져 내릴 때도 있다. 아닌 밤중에 동네 개와 고양이가 횡재한다. 때론 페르시아 융단으로 감싸기도 했다. 비용이 수천 달러짜리다. 그런데 금고에 단돈 100달러만 들어있다면 완전 적자다. 도척(盜跖) 도둑의 도 제1번 성(聖)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금고는 영어로 Safe 또는 Strong box다. Safe(안전) 보장하려는 메이커(Maker)와 약점(Weak point)을 탐색하여 Safe 파괴하려는 Breaker와의 대결이다. 니트로글리세린을 최초로 사용한 John Yegg(가명이며 실명은 윌리엄 배럿)를 기념해 Yeggman이라고도 한다. 도둑들도 기념할 건 다 기념하고 행사 치르며 산다. 신제품 금고가 출하되면 재주 겨루기에 나선다. 드릴과 폭약은 기본, 대포까지도 등장시켰다. 금고장인에게 더 치밀한 일거리 주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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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bert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12년을 San Quentin 교도소에서 보냈다. 그는 우편 강도를 포함한 어떤 강도 사건으로도 투옥되지 않았지만, 살인 혐의를 조작한 혐의로 투옥되었다. Herbert Wilson은 자기에 대한 검찰의 주요 증인인 Herb Cox가 두 사람이 계획한 탈옥 시도가 끔찍하게 잘못된 후 총에 맞아 죽은 채 발견되었을 때, 살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Wilson은 다시 체포되었고, 당국은 그가 Cox를 총으로 쏴 죽였다고 말했다. Herbert Wilson은 1935년 San Quentin에서 풀려나 미국에서 추방된 후 어머니와 함께 살기 위해 온타리오주 런던으로 돌아왔다. 1936년 그는 AE Ames and Company에서 거의 10만 달러를 사기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다음 6년을 Kingston과 Prince Albert 교도소에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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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서 풀려난 후 그는 호주로 가서 잠시 살다가 다시 캐나다로 돌아온 후, 그는 코트니(Courtenay)와 밴쿠버(Vancouver)에서 신문 칼럼니스트, 예술가, 그리고 문학 에이전트로 활동했다. 그는 또한 "윌슨의 미스터리 아케이드"라는 자신의 범죄 박물관을 운영했다. 1951년 4월 13일 금요일, 70세의 윌슨은 결혼을 발표했다. 그의 두 번째 아내인 에밀리아(Emelia)는 46세였고, 그의 설명에 따르면 매우 훌륭한 네덜란드 가문 출신의 젊어 보이는 중년 여성이었다. 그는 모든 감옥 작가 중 "가장 다작(多作)"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복역 중에 200만 단어를 썼다.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 믿을 수 없는 자서전인 <금고털이 왕(I was King of the Safe-Crackers)>를 썼고, 그 외에도 17권의 책을 썼으며, 일부는 자신의 문학 에이전시에서 출판했다. 출판사들은 그의 자서전에 관심을 보였고, 그의 좋은 친구이자 작가인 토마스 패트릭 켈리(Thomas Patrick Kelley)의 협력으로 그의 대작은 곧 결실을 맺게 되었다. 그의 인생 이야기의 전체 버전은 그의 원본 회고록과 <King of the Safe-Crackers> 라는 제목의 문학 작품에서 만들어졌다. 이 작품은 1955년 1월 18일에 출판되었다. New American Library와의 출판 계약에 따라 <King of the Safe-Crackers>는 <I Stole $16,000,000>라는 제목으로 미국에서 처음 데뷔했다. 1956년 1월, "Saga True Adventures for Men"에 실린 이 소설의 인기는 금세 인정을 받았고, 1956년 3월 미국에서 출간된 <I Stole $16,000,000>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눈길을 끄는 헤드라인은 영화 제작자 스탠리 큐브릭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그는 허버트의 모험담을 담은 영화 판권을 획득했다. 그는 범죄 조직의 우두머리이자 최고의 도둑이 되어 "성스러운 허브"와 "금고털이의 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성직자이자 범죄자였던 그는 많은 사람들이 수동적인 무(無)를 받아들이는 세상에서 무언가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미덕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위험천만한 생활 방식을 선호했고 많은 행운과 불운을 겪었다. 허버트 에머슨 윌슨은 1968년 8월 17일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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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프랑스 리비에라 해안 휴양지의 니스 은행에서 1천만 달러를 빼돌렸다. 은행금고털이 최대기록이다. 조직원 열다섯이 두 달에 걸쳐 하수구를 통해 9m 길이 땅굴을 팠다. 완벽한 터널이었다. 터널바닥에는 융단까지 깔았다. 흙부스러기는 하나도 남기지 않고 조심스럽게 제거하였다. 금요일 밤, 그들은 전선과 통풍관을 가지고 지하 금고실로 향했다. 그들은 쇠지레대·끌·천공기·수압재크·불꽃용접기·도끼·해머 그리고 24개 이상의 아세틸렌 탱크까지 준비했다. 예금주들이 활강장치를 통해서 그들 수중으로 직접 돈을 떨어뜨리는 동안, 주말 내내 그들은 텐트를 치고 그 안에서 술을 마시고, 음식을 만들어 먹으면서 리비에라의 보석과 현금이 가득 찬 317개의 귀중품 보관함을 차근차근 털었다. 그들은 전리품을 고무보트에 싣기 전에 지하 금고실 출입문을 안에서 용접으로 붙였다. 그 출입문을 여는 데에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월요일 오후 마침내 은행가들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절도범들이 의기양양하게 다음과 같이 갈겨쓴 메시지가 그들을 맞았다. “무기 없이, 폭력 없이, 증오 없이 가져간다.” 이들은 거기다가 평화의 상징을 그려놓고 사라졌다.

경비가 완벽한 감옥에서 몇 번이나 탈옥한 사실로 유명한 윌리엄 서튼(William Sutton)은 자기 고유의 강도양식을 개발하였다. 누구나 제복을 입은 사람에게는 문을 열어 준다는 것을 관찰한 '연기자' 윌리는 경찰관·배달원·관리인·우체부·교도관·수리공 제복을 빌어 입고 은행의 문이 열리자마자 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은행원들이 하나씩 하나씩 출근하자 그는 벽을 따라 놓인 의자에 모두 앉으라고 명령했다. 지배인이 나타나자 일은 이제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감옥과 은행 사이를 오가던 서튼은 숨어서 살아야만 했다. 한때 그도 경찰을 피해서 스태튼 아일랜드의 어느 양로원에서 주급 90달러로 일을 하기도 했다. 브루클린에서 조용히 살던 그는 마침내 체포되었고 이렇게 해서 결국 경찰의 오랜 추적은 끝났다. 경찰은 기고만장했다. "우리는 은행강도계의 베이브 루스를 이제 체포했다! "라고 그들은 기자들에게 자랑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서튼이 7000달러 이상의 현금을 갖고 총알이 장전된 38 구경 권총을 호주머니 속에 넣은 채 한 시간 동안 역사(驛舍) 안에 앉아 있었는데도 누구 하나 검문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시카고의 마천루 강도 멜빌 리브스 역시 그 같은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귀 뒤에 연필 한 자루만 꽂는 다면, 어느 사무실이라도 쉽사리 털 수 있다"라고 그는 경찰에서 진술했다. 리브스는 밤중에 건물 속으로 직접 들어가 자물쇠를 따거나 잡역부로 하여금 사무실 문을 열게 한 다음 유유히 금고를 부수곤 했다. 사무실 전문 절도의 기술 가운데 하니는 우표를 붙이고 자기의 주소를 적은 봉투에 훔친 물건을 집어넣고, 그것을 우체통에 넣은 후, 자기는 빈손으로 그 범죄현장을 유유히 떠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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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도 큰 도둑들이 더러 있었다. 소설 주인공이지만 홍길동(洪吉童)은 나라를 세웠고, 임꺽정(林巨正)·홍경래(洪景來)는 나라를 훔칠 태세였다. 도둑 이야기로 아들을 훈계한 사숙재(私淑齋) 강희맹(姜希孟)이 지은 <사숙재집(私淑齋集>에 <도자설(盜子說)>이 있다. 뛰어난 도둑 부자(父子)의 이야기인데, 도둑이지만 아들의 교만한 심지(心地)를 타일러 안전하게 만들어 주고자 하는 부모의 마음이 드러난다. 아비 도둑은 늘 기술과 용력도 중요하지만 모든 것을 스스로 터득하라는 자득론(自得論)을 주장하다가 마침내 아들을 위기 상황에 빠뜨려 스스로 터득하게 한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이 지은 <황금대기(黃金臺記)>는 연(燕)나라 소왕(昭王)이 대를 쌓은 후에 황금을 얹어 놓고 천하의 인재를 구하려고 했다는 유적을 보고 인간의 탐욕을 경계하면서, 세 명의 도둑이야기를 적었다. 도굴범들이 서로 황금을 차지하려다가 아무도 가지지 못하고 모두 죽었다는 허망한 이야기다. 재물이든 인생이든 흘러가는 세월 앞에 허망하지 않은 게 있겠는가? 그 당시의 금고털이 도둑들은 그래도 낭만이 있었다. 요즘의 정상배(政商輩) 도둑들은 나라를 들어먹으면서도 낭만도 염치도 없다. 도둑의 오덕(五德)이라도 한 번쯤 읽어보고 도둑질하길 바란다.(금삿갓 芸史 琴東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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