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 및 잡보장경(雜寶藏經)에 등장하는 몸 하나에 머리가 두 개 달린 새를 공명조(共命鳥)라 부른다. 산스크리트로는 Jīvamjīvaka(지왐지와까)라고 한다. 설산(雪山) 즉 히말라야 산속에 산다는 이 공명조는 머리 두 개가 밤낮으로 교대로 하나씩 깨어 있는데, 어느 날 머리 하나가 다른 머리가 자고 있는 사이에 맛있는 열매를 발견하고 그것을 먹어버렸다. 다른 머리가 잠에서 깨어나서 자기가 자고 있는 사이에 맛있는 열매를 그 머리가 혼자서 먹은 것을 알았다. 열 받은 자던 머리는 그 머리에게 복수하겠답시고 독이 든 열매를 먹어버렸는데, 두 새는 하나의 몸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독이 몸에 퍼져서 두 머리가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공생관계가 아닌 공동운명체 관계이다. 이 보다 덜한 공생(共生) 관계란 란 서로 다른 생물 종(種)이 상호작용을 통해 서로에게 이익을 주거나, 한쪽만 이익을 얻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함께 살아가는 관계를 의미한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교환방식인 ‘주고받기’는 정치·경제·결혼·문화 등 문명세계의 모든 분야에서 갖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심지어 사람의 몸속에서도 그런 과정이 진행되어 박테리아와 인체의 세포, 기관(器官), 신경계통이 매우 훌륭한 상호의존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서로 이익을 주고받는 공존관계가 가장 극적으로 나타나는 곳은 식물과 동물의 세계다. 이와 같이 서로 다른 종(種) 사이에 형성되는 호혜적인 관계를 공생(Symbiosis)이라고 부르는데, 이 용어는 1879년에 과학자 하인리히 드 바리(Heinrich Anton de Bary)가 만들어 낸 것이다. '더불어 살아간다.'는 뜻의 이 용어는 원래 종과 종 사이의 호혜적인 관계를 기준으로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대체로 상호 호혜적인 상리공생(相利共生, Mutualism)뿐 아니라, 한쪽에는 이롭고 한쪽에는 해로운 기생(寄生, Parasitism)과 한쪽에만 유익한 편리공생(片利共生, Commensalism), 한쪽만이 피해를 입고 다른 한쪽은 아무 영향 없는 편해공생(片害共生, Amensalism)을 모두 포괄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양쪽이 다 같이 이익을 보는 훌륭하고도 자연스러운 협동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흔히 사용되고 있다.
벌꿀을 끔찍이도 좋아하는 아프리카의 한 조그만 새인 꿀잡이새(Prodotiscus regulus)를 보자. 이 새가 벌집을 찾아내기는 쉽지만, 그것을 부수고 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기 위해서는 큰 발톱이 있어야 한다. 새는 양자택일에 직면하게 된다. 꿀을 단념하느냐, 아니면 발톱을 기르느냐. 하지만 이 새는 그 어느 쪽도 택하지 않는다. 대신 꿀오소리(Honey Badger Ratel)를 찾아 나선다. 꿀오소리는 가죽이 거칠고 질긴 포유동물로 꿀을 무척 좋아하지만, 스스로 벌집을 찾아낼 만한 재간이 없다. 바로 벌꿀 안내자(Honey guide)라고 부르는 이 새가 꿀오소리를 발견하면, 바로 코앞에서 야단법석을 떤다. 그러면 꿀오소리는 마침내 그 뜻을 알아차리고 둘이서 함께 벌집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 이 새들은 하드자 부족 사람들에게도 같은 행동을 보인다. 이 부족은 이 새를 부르는 휘파람 소리를 낼 수도 있다. 이들 두 도둑은 꿀을 훔쳐 열심히 나눠 먹는다. 큰 짐승과 작은 짐승 사이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신기한 공생관계 중의 하나는 치과 등의 의료행위를 주고받는 것이다. 이를테면, 나일강의 사나운 악어는 가냘픈 악어물떼새가 그 무서운 아가리 속으로 깡충깡충 뛰어 들어가는 동안 입을 딱 벌린 채 가만히 기다린다. 새가 자살하러 들어가는 것은 아니고, 배가 고프기 때문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악어의 잇몸에 붙어 병을 옮기는 기생충들을 쪼아 먹어 자기도 좋고 악어에게도 좋은 일을 한다. 악어물떼새는 또 먹이를 쪼지 않을 때는 악어의 등에 앉아 조기 경보장치의 구실도 해준다. 하지만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는 요즘 와서는 공생관계가 아니라는 학설도 강력하다. 이와 비슷한 관계는 눈이 밝은 소등쪼기새(동물 등을 해치는 진드기를 잡아먹는 아프리카새)와 코뿔소·물소·기린 사이에, 임팔라(아프리카의 큰 영양)와 붉은부리 소등쪼기새 사이에, 그리고 하마와 그 이빨에 낀 음식 찌꺼기를 알뜰히 쪼아 먹는 왜가리 사이에도 유지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바다 밑에서 이루어지는 청소의식이다. 열대의 바다에서는 청소놀래기(Cleaner wrasse)라는 선명한 무늬의 조그만 물고기들이 산호초라든가 난파선같이 눈에 잘 띄는 곳에 '정화소'를 차려 놓고 있다. 거기서 바라큐다(Barracuda), 곰치 등의 '손님'들을 받는데, 손님이 물속에 가만히 있으면 청소부 고기들이 그 몸에 붙은 기생충을 뜯어먹고 상처 부위를 깨끗이 씻어 준다.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가는 이런 정화소는 한 군데에서 하루에 최고 300마리까지 손님을 받을 수 있다. 물속의 공생은 묘한 동료애를 낳는다. 말미잘의 총총히 뻗어 있는 촉수에는 독이 있다. 그래서 가는손부채게(Boxer crabs)는 말미잘을 양집게발에 끼고서 잡아먹으러 덤비는 적에게 언제라도 일격을 가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소라게는 말미잘을 자기 집인 소라껍데기 입구에 배치시켜서 지킨다. 그런가 하면, 댐즐(Damsel) 피시와 흰동가리(Clownfish)라는 열대어는 말미잘의 치명적인 촉수의 덤불 속에 들어가 살면서 모든 적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다. 그런데 이 열대어는 언제나 자기의 말미잘을 찾아 들어가며, 집주인 말미잘은 귀신같이 그 고기를 알아보는데, 이것은 아직도 자연계의 불가사의로 남아 있다. 말미잘은 자기의 촉수 숲 속에 들어와 사는 댐즐피시뿐 아니라 그 짝과 새끼들까지도 알아보고 관용을 베풀지만, 같은 종이라도 다른 댐즐피시가 다가와서 얼씬거리면 촉수로 쏘아서 잡아먹어 버린다.
완전한 공생관계에서는 한쪽이 없으면 다른 쪽도 존재할 수가 없다. 고깔해파리(Portuguese Man o' War) 속에 있는 복잡한 생물들의 조직체는 오직 하나의 집단으로서만 살아갈 수 있다. 독이 있는 촉수를 아래로 늘어뜨리고 바다거품을 타고 이동하는 이 해파리는, 사실상 서로 다른 무수한 생물의 개체가 집단을 이루고 사는 일종의 군체(群體)다. 훨씬 더 경이로운 것은 개미 집단에서 볼 수 있는 고도의 협동 작업일 것이다. 개중에는 사람의 농사일을 방불케 하는 것도 있다. 이를테면, 나뭇잎을 자르는 전문가 개미들은 조직적으로 나무를 발가벗기지만, 그 잎을 먹지는 않는다. 나뭇잎은 조각조각 잘려서 땅 밑의 큰 굴속으로 운반되고 거기서 개미들은 잎을 씹은 다음 깔아 놓아, 먹을 수 있는 균류(菌類)를 배양하는 데 사용한다. 어떤 농사꾼 개미들은 심지어 사람이 소를 치듯이 진딧물 떼를 사육한다. 개미가 살살 어루만져 주거나 젖을 짜 주면 진디는 꿀을 분비하는데, 이것은 개미에게는 암브로시아(Ambrosia ;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음식)나 다름없다. 목동 개미들은 진딧물 떼를 조심스럽게 돌보며, 나뭇잎 위로 데리고 나가서 '방목'까지 한다. 진딧물로서는 그리 나쁠 것은 없는 셈이다.
이 지상의 식물은 대부분 벌과 파리 그리고 나비 따위의 수분(授粉 ; 암술에 수술의 꽃가루를 묻혀 주는 일) 작용에 의해 강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사실 꽃은 이 관계에 대응하여 그 색깔과 향기를 진화시켜 왔다. 식물은 또 소의 창자 속에 박테리아가 없다면 소를 살찌우지는 못할 것이다. 이 박테리아는 풀의 섬유소를 분해하어 소가 풀을 소화하게 해 준다. 모든 반추동물(反芻動物) 또는 초식동물에서 볼 수 있는 이 같은 미생물의 활동이 없다면, 소는 풍요 속에서 굵어 죽고 말 것이다. 오래전에 멸종한 모리셔스섬의 어리석은 도도새도, 한 과학자가 가정하고 있듯이, 한때는 어떤 나무와 공생관계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마지막 도도새가 사라진 것과 거의 같은 시기부터 300년 동안 모리서스의 칼바리아(Calvaria) 나무는 새싹이 트지 않고 있다. 이제 이 나무는 거의 전멸상태에 있지만, 아직도 몇 그루는 남아서 두꺼운 껍질에 싸인 열매를 맺고 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 껍질이 벌어지지 않는 것이다. 도도새가 이 열매를 먹고 소화하는 과정에서 틀림없이 껍질이 벗겨졌을 것이라고 생각한 과학자들이 칼바리아 열매를 칠면조에게 먹였다. 그리고 나서 회수한 씨를 심었더니, 몇 개가 싹이 텄다. 이렇듯 그 숙맥(菽麥) 같은 도도새도 대자연의 무대에서 광범하게 펼쳐지는 공생의 드라마에 나름대로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던 모양이다.(금삿갓 芸史 琴東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