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의 패션에서 그다지 실용성은 낮지만 특별하게 해주는 우아함을 상징하고 차이를 강조하는 액세서리 중 최고가 바로 남자의 물건 넥타이다. 그 바보스럽고 불편하면서 어떨 때는 개목걸이처럼 느껴지는 물건에 짜증을 내면서도 이튿날 또다시 그걸 안 매고 출근하는 남자가 얼마나 있을까? 이런 넥타이의 미스터리에 대한 해답은 그 상징적인 가치에 있다. 요즘처럼 캐주얼한 차림이 유행하는 시대에도 대부분의 화이트컬러 계층은 아마도 자신의 계층과 지위를 나타내려고 그러겠지만 직장에 갈 때나, 사교장에 갈 때나 남자의 물건은 필수이다. 직장에서 매일 똑같은 제복을 입고 지내야 하는 남자들은 넥타이를 더 색상이 화려한 것을 고르는 데 더욱 신경을 쓴다. 요즘 들어 많이 완화되었지만, 대부분의 남성들은 결혼식이나 장례식 등 격식을 갖춰야 하는 모임에는 으레 넥타이를 매고 나가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문화인류학적으로 보면 사내가 처음 넥타이를 매게 된다는 것은 소년에서 당당한 남자로 성장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가톨릭 신부의 칼라는 넥타이를 맬 자리를 없앰으로써 속세의 제반사에 대한 단절을 상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뉴욕의 매디슨애비뉴 생활을 묘사한 최초의 소설 가운데 하나인 프레더릭 웨이크먼의 <광고장이들>에서 주인공은 중요한 인터뷰를 하러 가는 길에 가진 돈을 거의 다 털어서 비싸지만 점잖은 넥타이 하나를 사 맨다. 자신감을 갖기 위한 무장일 것이다. 여러 해 동안 파리의 어느 나이트클럽에서는 여주인이 요청하면 남자손님은 별수 없이 일어서서 노래를 불러야만 했다. 안 부르겠다고 하거나 노래솜씨가 시원치 못하면 여주인은 큰 가위로 그 남자가 맨 넥타이를 싹둑 잘라 버렸다. 이런 벌이 가해질 때마다 왁자지껄 폭소가 터지곤 했는데, 그 이유는 이 행위가 남자들 속에 잠재되어 있는 감정을 뒤흔들어 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 목에 무엇인가를 감기 시작한 것은 언제일까. 의류학자인 Kerr와 Lester는 고대 원시인들이 사자의 이빨이나 발톱 같은 전리품(트로피)을 목이나 허리에 걸면서부터였다고 주장한다. 넥타이의 전형은 서양보다 동양이 앞섰다. B.C 210년에 죽은 중국 최초의 황제 진시황의 무덤을 지키는 병마용은 목이 넓은 스카프로 장식한 전사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이 고고학 발굴을 통해 밝혀졌다. 서기 100년경 로마 장군과 상원 의원은 'Fascalia'로 알려진 목 스카프를 착용했다. 로마의 'Fascalia'는 군복의 일부였으며 추가적으로 권력과 권위를 의미했다. 계급의 상징으로 목에 스카프를 두르는 로마 전통은 넥타이가 미래에 사회적 지위 및 전문성과 연관될 것임을 예고한 것이다. 사실 인간은 아득한 옛날부터 땀을 빨아들이고 햇빛을 가리기 위해 목에다 천을 두르고 다녔을 것이다. 그러나 치장으로서의 넥타이의 기원은 루이 14세를 섬긴 크로아티아의 용병들이 목을 감아 장식한 목도리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이것을 ‘크라바트(Cravat)’라고 했는데, 크로아티아 말로 ‘Croata Hrvat’에서 따온 불어 ‘크라바트(Cravatte)가 변형되었다. 30년 전쟁(1618-1648) 기간 동안 프랑스군과 함께 싸운 크로아티아 용병들은 독특하고 화려한 천 조각을 목에 걸고 재킷을 걸쳤다. 이 기능적이면서도 눈에 띄는 넥웨어(Neckwear)는 처음에는 전투 중에 옷을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한 실용적인 솔루션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프랑스인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루이 13세(Louis XIII) 왕은 이 흥미로운 목장식에 주목하고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왕은 이 스타일을 채택하여 프랑스 궁정에 소개했다. 루이 15세는 넥타이 매는 것을 권장하기까지 했다. 그의 총애를 받은 라 바이에르(La Valliere) 공작부인이 여성의 의상에 최초로 넥타이를 사용하면서 그 후로 넥타이는 여성의 의상에 있어서도 그 명성을 떨치게 된다. 이 여성의 이름을 따서 여성 목 스카프의 일종을 라발리에르라 한다. 그러나 크라바트는 프랑스혁명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가 19세기초에 다시 나타났다.
스타일은 매는 사람의 직업이나 기질에 따라 달랐다. 로맨틱한 남자들은 시인 바이런(G. R. Byrun)이 맨 것 같은 길게 나부끼는 넥타이를 했다. 좀 점잖은 사람은 목에 꼭 조이게 맸다. 마음을 정하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서 1818년에 출간된 <넥타이백과(Neckclothitania)>라는 책은 캐주얼한 미국식 넥타이 등 20가지 이상의 넥타이 스타일을 삽화와 함께 소개했다. 19세기 최고의 멋쟁이며 패션의 아이콘이었던 보 브럼멜(Beau Brummell)은 넥타이 매는 데 몇 시간을 소비하곤 했다. 그의 이름을 딴 넥타이 제조업체에 랄프 론렌(Ralph Lauren)이 파트너로 참여하여 현재의 성공을 일구었다. 넥타이를 매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매듭을 짓는 것이었는데, 그는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 솜씨를 과시하곤 했다. 그렇게 야단스럽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 1897년의 시어스로벅 카탈로그는 1개에 19센트짜리 즉 6개에 1달러짜리 매듭이 지어진 실크타이를 제공했다. 현대적인 넥타이의 등장과 병행하여 애스콧(Ascot)과 나비넥타이(Bow-tie)는 남성 패션에서 그 중요성을 유지했다. Ascots는 고급스럽고 화려한 우아함을 발산했으며, 특히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공식 행사에서 상류층이 선호했다. 콤팩트하고 대칭적인 디자인으로 유명한 나비넥타이는 격식과 학문적 맥락에서 선호되는 지성주의의 아이콘이 되었다.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과 배우(俳優) 프레드 아스테어(Fred Astaire) 같은 인물들이 나비넥타이를 옹호하며 그 명성을 높였다.
<넥타이의 역사>
'넥타이(Necktie)'라는 말은 1830년경, 영국이 크라바트 대신 이를 사용하면서부터였다. 1890년에는 '더비타이'(Derby-tie, 길게 매어 늘어뜨리는 넥타이) 또는 '포어 인 핸드'(Four in hand)라는 명칭도 등장했다. 포어 인 핸드는 오늘날의 남자용 긴 타이를 말한다. 이런 명칭으로 불린 것은 길이가 매듭에서부터 손 폭의 네 배 길이였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지금도 남성들이 넥타이를 맨 후 완성된 길이가 알맞은지에 대해 신경을 쓰는 것을 종종 본다. 트럼프 대통령이 1차 취임식에서 길게 늘어지게 넥타이를 매고 나와서 패션의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정치지도자들은 회담 후에 서로 넥타이를 교환해서 매는 걸로 우정을 과시하기도 한다. 2001년 8월 11일 조 바이든(Joe Biden)이 미국 상원 외교위원장 자격으로 청와대를 방문해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만나 오찬을 함께 했다. 그 자리에서 바이든이 김대중 대통령의 넥타이를 마음에 들어 하자 두 사람은 서로 자신의 넥타이를 풀어 교환한다. 당시 김 대통령의 넥타이에는 수프 자국이 묻어 있었다. 바이든은 이에 개의치 않고 오히려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의 상징'이라고 하면서 소중히 보관했다고 한다. 결국 그도 대권을 잡았다. 이러한 넥타이는 축제나 예식, 의식과 같은 장소에서 한 개인의 정체성을 나타내 줄 뿐만 아니라 착용하는 사람의 개성과 이미지, 내면의 상태를 비춰줄 수 있는 없어서는 안 될 장식품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필자 금삿갓의 입장에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하던 1978년부터 최종 은퇴한 2020년까지 42년 동안 출근할 때는 으레 매던 넥타이를 이제는 매지 않으니까 개 목걸이에서 해방된 기분이다. 그래도 아직 옷장 속에는 수백 개의 타이들이 비상의 꿈을 꾸면서 잠자고 있다.(금삿갓 芸史 琴東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