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 매장된 물질 중에서 가장 단단하여 같은 양으로 비교할 때 지구상의 그 무엇보다도 값이 비싸다. 그러나 실상 다이아몬드는 가장 풍부하고 또 전 세계에 가장 널리 분포되어 있는 물질 중의 하나이며 인공으로 만들 수 있는 탄소결정체의 일종에 불과하다. 다이아몬드의 어원은 '길들일 수 없는, 무적의'라는 뜻의 그리스어 Adámās이다. 번역은 금강석(金剛石) 또는 찬석(鑽石)이라 한다. 약 2,000년 동안 알려진 유일한 다이아몬드 공급원은 고대 인도의 개울 바닥이었다. 인도의 개울바닥에서는 '조약돌만 한' 다이아몬드 덩어리가 물에 씻긴 채 발견되곤 했다. 다이아몬드는 매우 귀하기 때문에 큰 값어치를 지녀 왕족들이 지니고 있었지만 아무도 자르는 방법을 몰라 겉모양은 루비나 에메랄드보다 훨씬 볼품이 없었다. 1730년까지 인도는 다이아몬드를 수출한 유일한 국가였다. 그 후 브라질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도 원석이 채굴되었다. 커팅 기술은 1357년 독일 뉘른베르크에 다이아몬드 커팅 길드가 설립됨으로써 발전되었다. 다이아몬드의 가공하는 방법을 알아내면 딸과의 결혼을 허락하겠다는 말에 마침내 다이아몬드로 다이아몬드를 깎는다는 방법을 찾아냈다는 네덜란드의 보석 가공사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알고, 사랑하는 아름다운 다이아몬드 커팅의 진정한 선조는 벨기에인이었다. 1456년 브루게에 거주하던 로데베이크 반 베르켄은 현대 다이아몬드 커팅 공정의 시초를 마련했다. 그는 다이아몬드가 자체 다이아몬드 가루를 사용하여 커팅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다른 재료로는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다이아몬드를 절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7세기에는 주민 중 한 명인 마르셀 톨코프스키가 오늘날 라운드 브릴리언트 컷으로 알려진 58면 다이아몬드를 최초로 커팅하는 과학적인 공식을 고안해 냈다. 일설에는 17세기 후반에는 베니스의 보석 세공업자인 빈첸조 페루치가 '브릴리언트 컷'(Brilliant cut)이라고 알려진 새로운 다이아몬드 세공법을 개발했다. 이것은 수학적인 비례에 따라 다이아몬드를 58면으로 깎아 '광휘' 즉 광선의 굴절을 극대화시키는 세공법이다. 다이아몬드는 이렇게 세공됨으로써 더욱 눈부신 광채를 발하게 되었다.
다이아몬드가 혼인서약의 징표로 사용된 최초의 기록은 1477년에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Maximilian) 1세가 아직 황제가 되기 전에 마리 부르고뉴(Marie Bourgogne)에게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를 주면서 결혼서약을 했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다이아몬드는 그 소유자를 재앙으로부터 보호해 준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메리는 결혼 후 얼마 안 되어 숨을 거두었다. 그래서 다이아몬드의 저주도 있다. 인도산 블루 호프 다이아몬드에 얽힌 이야기다. 믿거나 말거나 이지만, 이 보석은 힌두교 사원의 신상(神像) 이마에 있던 것인데 도난을 당했고, 그 후 인도를 침공한 페르시아의 총독이 입수하여 자기네 왕에게 바쳤다. 공교롭게도 총독은 도둑에게 살해되고, 페르시아 왕은 반란군에게 살해된다. 다시 세월이 흘러 1642년 프랑스 보석상인 장 바티스트 타베르니에(Jean-Baptiste Tavernier, 1605-1689)가 인도에서 이 다이아몬드를 구해서 1669년 파리로 가져온다. 이때 이 보석은 ‘타베르니에 블루(Tavernier Blue)’라는 이름을 얻었다. 컷팅이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였던 이 보석은 투박한 삼각형 모양으로 컷팅이 되었으며, 무게는 약 115캐럿(23그램)이었다. 타베르니에는 이 푸른빛의 다이아몬드를 다른 많은 보석 및 금 등과 함께 태양왕 루이 14세에게 팔았고, 루이 14세는 그 보답으로 그에게 남작 작위를 내렸다. 그러나 타베르니에는 아들의 도박 빚 때문에 파산했다. 그래서 다시 보석을 구하기 위해 떠난 여행지에서 들개에게 물려 죽었다고 한다. 1678년 루이 14세는 타베르니에 블루를 왕실 보석세공인 Sieur Pitau에게 다시 컷팅을 하라고 했고, 컷팅 후 무게는 67.125캐럿(13.425그램)으로 절반 정도 줄어든다. 그리고 왕실 자산목록에 ‘프랑스 왕관의 블루 다이아몬드(Diamant Bleu de la Couronne de France)’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차지했다. 삼각형 모양으로 컷팅되어서 골드 크라바트핀에 세팅되어 행사가 있을 때 루이 14세가 착용했다고 한다. 루이 14세의 궁전에서 이 보석을 몸에 지녀 불운을 얻은 사람들이 속출했다는 설이 있지만 정확히 알려진 건 없고, 루이 14세는 말년으로 갈수록 실정을 거듭하다가 막판에는 아들인 왕세자를 포함한 왕세손, 첫째 증손자 및 왕위 계승자들이 줄줄이 죽는다. 그리고 결국 둘째 증손자인 루이 15세에게 왕위를 넘기고 국민들의 원성과 원망 속에서 쓸쓸히 세상을 떴다.
다이아몬드 열풍'은 1860년대 후반에 남아프리카 오렌지 강가에 있는 호프타운 부근에서 흠 하나 없는 85.8캐럿짜리가 발견되면서 비롯되었다. 호프타운 부근의 황토로 된 농장에 다이아몬드가 더 파묻혀 있음이 알려지자, 이곳에서 농사를 짓던 드 비어(De Beer) 형제는 구매 당시에 50파운드짜리 농토를 엄청 높은 값인 6,300파운드에 팔고 떠나 버렸다. 그들이 남겨 놓은 것은 오늘날 유명한 다이아몬드 회사의 이름뿐이었다. 오늘날 드비어스 광업회사는 전 세계의 다이아몬드 시장을 거의 독점하고 있는 회사로 간주되고 있다. 이 회사는 세계 다이아몬드 생산량의 40%를 생산할 뿐 아니라, 런던에 있는 이 회사의 중앙 판매기구를 통해 다이아몬드의 가격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드비어스농장과 그 주변에서는 표면에서 다이아몬드가 나오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밑의 청토(靑土) 또는 킴벌라이트라고 불리는 단단한 바위 속에도 많은 다이아몬드가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매장된 다이아몬드의 채굴 사업은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관계로 회사는 크게 합병되기 마련이다. 1888년쯤에 영국 사업가인자 정치인인 세실 로즈(Cecil Rhodes)가 로스차일드 가의 자금을 받아 ‘드비어스(De Beers)사’를 설립해 모든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다이아몬드 채굴업을 장악하였다. 이로써 그는 식민지 아프리카에서 총독을 하면서 가장 돈 많고 힘 있는 인물 가운데 하나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각종 정책과 법을 영국인과 드비어스사에 유리하게 만들었다. 인근 지방에 대한 무력 정복도 서슴지 않았다. 로즈는 군대를 동원해 보어 원주민들과 전쟁을 일으킨 ‘침략자’였다. 그는 아프리카 남부 일대에 ‘제국’을 건설했는데, 그가 정복한 지역은 그의 이름을 따서 ‘로디지아’라고 불렸다. 로즈의 땅이란 뜻이다. 이 지역이 1980년 독립한 ‘짐바브웨’다. 로즈는 정계에서 은퇴한 뒤 자신의 이름을 따 ‘로즈 장학재단’을 설립했다.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블레어 전 영국 총리를 비롯한 많은 영재들이 받은 ‘로즈 장학금’이 바로 로즈 재단에서 지급한 장학금이다. 세실 로즈 사후인 1916년에 어니스트 오펜하이머가 ‘앵글로아메리칸’이라는 광산회사를 설립해 남아공의 다이아몬드 광산을 지배했다. 이때부터 세계의 금 업계도 오펜하이머 일가가 움직여 왔다. 이후 독일계 유대인인 이 오펜하이머 가문이 다이아몬드 시장도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1880년 유대계 담배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오펜하이머는 영국 보석상의 대리인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킴벌리에 파견되면서 다이아몬드와 인연을 맺었다. 1916년 JP모건으로부터 투자를 유치해 광산회사 ‘앵글로아메리카’사를 설립한 후 앙골라, 콩고, 남아공 등지로 사업을 확장해 갔다. 그러면서 꾸준히 드비어스의 주식을 사들여 1929년 마침내 드비어스의 회장 자리에 올랐다. 드비어스는 1888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을 때는 다이아몬드 시장의 90%까지 장악하기도 했다.
독점거래는 먹을 게 많기 때문에 언젠가는 무너지는 법이다. 캐나다, 호주, 러시아 등지에서 연달아 드비어스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됐다. 캐나다는 지난 1998년부터 다이아몬드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망하고 고속 성장하는 다이아몬드 원산지이다. 이 보다 드비어스의 독점체제가 도전받는 더 근본적인 이유는 강력한 라이벌 레브 레비브(Lev Leviev)의 등장이다. 최근 들어 다이아몬드 시장에서 유대인들 간의 싸움은 치열하다. 드비어스를 상대로 1990년대 말부터 급부상하고 있는 이스라엘 다이아몬드 거상 레브 레비브도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유대인으로 현재 국적도 이스라엘인이다. 그는 세계 다이아몬드 원석 최대생산국인 러시아와 앙골라에서 이미 드비어스 시장을 많이 잠식했다. 그는 원래 드비어스의 ‘150명 지정 고객’ 가운데 한 명이었다. 레비브는 사이트홀더를 다루는 드비어스의 고압적 태도에 격분했다. 드비어스는 사이트홀더(지정 고객)들에게 몇 상자의 원석을 제멋대로 정한 값에 떠넘겼다. 드비어스의 심기를 거스르면 거래는 영원히 중단됐다. 하지만 이러한 드비어스의 횡포가 계속되자 다이아몬드 가공업체 사장인 그는 드비어스의 사업 분야인 원석 개발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그가 어릴 때 우즈베키스탄에서 이스라엘로 이주하면서 재산을 100만 달러 상당의 다이아몬드 원석으로 바꿨다. 그러나 이스라엘로 건너간 가족들은 다이아몬드의 질이 낮아 20만 달러밖에 안 나간다는 말을 들었다. 당시 15세였던 레비브는 잘못을 바로잡겠다고 맹세했다. 그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대교 학교를 중퇴하고 다이아몬드 커팅을 배우기 시작했다. 1997년 레비브는 다이아몬드 커팅 공장을 설립했다. 당시 막 꿈틀대던 이스라엘 다이아몬드 시장의 투기 바람으로 3년 뒤 시장이 붕괴되자 은행들은 대출을 더 이상 연장해주지 않았다. 그 결과 많은 커팅업체가 파산했다. 재정 상태가 양호했던 그는 이후 5년에 걸쳐 12개 소규모 공장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그는 원석을 충분히 확보하기 위해 런던, 앤트워프, 남아공, 러시아로 뛰어다녔다.
게다가 레이저 기술과 당시 혁명적이었던 커팅 소프트웨어를 도입해 더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해 냈다. 1987년 드비어스는 레비브에게 사이트홀더 자격을 부여했다. 당시 레비브는 이스라엘에서 내노라하는 다이아몬드 세공업자로 성장해 있었다. 2년 뒤 레비브는 러시아 국영 다이아몬드 채굴·판매 업체 곧 현재의 ‘알로사’로부터 커팅 공장 설립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원석 생산에서 세공까지 마무리하는 최초의 합작회사 ‘루이스’(Ruis)는 그렇게 탄생했다. 당시 거래를 인연으로 레비브는 러시아 원석 공급량의 일부를 확보하게 됐다. 드비어스가 발끈한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1995년 사업에 탄력이 붙으면서 레비브는 사이트홀더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게 됐다. 레비브는 루이스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다. 그와 푸틴의 관계는 1992년 시작됐다.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 부시장이었던 푸틴은 시장이 주저하던 유대교 학교 설립을 허가했다. 레비브가 자금을 지원한 유대교 학교는 50년 만에 처음 세워진 것이다. 그는 이런 인연을 계기로 푸틴 대통령과 알게 되었다. 러시아 푸틴 대통령과 앙골라 산토스 대통령은 매우 끈끈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1990년대 중반 앙골라 내전 당시 다이아몬드 광산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반군으로부터 12억 달러 상당의 다이아몬드 원석을 밀반출시킨 드비어스에 대한 앙골라 정부의 반감이 높았다. 이것이 레비브에게는 다이아몬드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레비브는 1996년 앙골라에 6,000만 달러를 투자해 현지 최대 다이아몬드 광산의 지분 16%를 받아냈다. 앙골라와 콩고, 시에라리온과 같은 아프리카 중서부의 소위 ‘피 묻은 다이아몬드(Blood Diamond)’ 국가들은 향후 정치만 안정이 되면 캐나다, 러시아를 능가할 만큼의 잠재성이 무궁한 나라들이다. 다행히도 반군들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최근 들어 다이아몬드 생산량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채굴된 다이아몬드의 약 20%만이 보석으로 쓰일 만한 품질을 지니고 있다. 나머지는 공업용, 주로 연마제로 쓰이고 있다. 어쨌든 거친 다이아몬드 1캐럿을 얻자면 250톤의 킴벌라이트를 필요로 한다. 깎는 과정에서 다이아몬드는 무게가 반으로 줄어든다. '캐럿(Carat)'이란 말은 캐럽(Carob)의 열매로 고대 그리스인들이 보석의 무게 단위로 이용했다. 쥐엄나무 열매는 콩과 비슷한 모양이고 그 크기가 일정해서 동방의 시장에서 저울추로 사용됐다. 1캐럿은 약 0.2g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큰 다이아몬드는 1915년 남아프리카에서 발견된 컬리넌이다. 가공하기 전 이 다이아몬드는 무려 3,106캐럿이었다. 이 다이아몬드는 트랜스발 정부에 의해 영국왕 에드워드 7세에게 그의 66회 생일선물로 보내졌다. 몇 달간의 연구검토 끝에, 이 원석은 '아프리카의 큰 별'(532.20 캐릿) 등 9개의 큰 덩어리와 96개의 보다 작은 덩어리로 쪼개져 가공되었다. 현재 이 다이아몬드들은 영국 왕관에 장식되어 있다. 캐럿이라는 무게 단위 외에 색깔, 투명도, 가공스타일 등이 다이아몬드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다이아몬드는 흔히 색깔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상 색깔이 없거나 흰 다이아몬드는 극히 드물며 값이 엄청나게 비싸다. 보석으로 쓰이는 대부분의 다이아몬드는 약간의 색조를 띠고 있으며, 특히 색조가 강한 다이아몬드를 '팬시'(Fancy)라고 부른다. 유명한 '팬시'로는 남청색의 44.50 캐릿짜리 호프다이아몬드가 있는데, 현재 스미스소니언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투명도란 광선의 통과를 방해하는 탄소반점이나 갈라진 틈 등 흠이 없는 정도를 가리킨다. 배율 10인 확대경으로 보아서 아무런 흠이 발견되지 않아야 그 다이아몬드는 흠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가공 시에는 다이아몬드의 표면을 몇 면체로 하고, 각 면을 어떻게 배열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데, 이 가공이 정확히 되어야 보석이 충분한 광휘를 발휘할 수 있다.
보석용 다이아몬드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열광적인 투자의 대상이 되고 있다. 다이아몬드에 가치를 부여한 것은 순전히 사람이 한 일이지만, 앞으로 세월이 갈수록 다이아몬드의 가치는 더욱 높아질 것으로 보아야 옳을 것 같다. 정변(政變)으로 인해 도망치는 사람들이 쉽사리 지니고 다닐 수 있는 재산으로 다이아몬드보다 더 적합한 것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경전 금강경(金剛經)이다.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하고 날카로운 지혜로 인간 내면의 번뇌를 끊어내어 깨달음을 얻도록 하는 것이다. 다이아몬드와 연필심 속의 흑연과 한우를 구워 먹거나 된장독에 넣는 숯은 모두 똑같은 탄소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다이아몬드가 숯이나 흑연과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고온 고압을 견디느냐 못 견디느냐에 달려 있다. 똑같은 탄소 덩어리이지만 엄청난 온도와 압력을 이겨 내면 맑고 투명한 지구상 최고의 보석 다이아몬드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고온 고압의 고통을 극복하면 맑고 영롱한 보석이 되듯이 사람도 어려운 환경과 고난을 이겨 내야 존귀해지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천왕성과 해왕성의 중심부에 메탄가스가 고온 고압에 응축되면 무한한 다이아몬드 비가 내릴 것이라고 추정한단. 내구성이 있는 비옷을 개발해서 다이아몬드 채취여행을 갈 시대를 기대해 보자. 여성들이 행복할 것이다.(금삿갓 芸史 琴東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