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콩 하면 ‘심심풀이 땅콩’이 연상된다. 필자 금삿갓의 고교 시절에 유행했던 과자가 땅콩가루를 바른 ‘맛동산’과 오징어 향이 나는 ‘오징어 땅콩’이 엄청 인기라서 소풍이나 모임에는 약방의 감초 격이었다. 사실 땅콩이란 이름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전에는 이 식물의 열매 맺는 행태를 반영한 말인 낙화생(落花生)이라 불렀다. 꽃이 수정되고 나면 그 줄기가 아래로 자라 땅속을 파고 들어가서 어느 정도 깊이에 들어가서야 땅콩이 열리기 시작한다. 이런 특징 때문에 붙은 이름이 낙화생(落花生)이다. 조선에 소개된 문헌은 정조(正祖) 때 이덕무(李德懋)가 청나라 사신으로 가서 재배법을 물어서 <앙엽기(盎葉記)>에 기록했고, 1798년 서유문(徐有聞)이 청나라 사신으로 다녀오며 쓴 한글기행문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에 기록되어 있다. 또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완당집(阮堂集)>에 "중국에서 땅콩을 가져온 사람이 있는데, 이게 우리나라에서 재배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라고 적었다. 1836년에 비로소 남 아무개라는 사람이 재배에 성공하여 퍼트렸다고 한다. 원래 이 땅콩을 처음 재배한 남미 원주민들은 땅콩을 틀랄카카와틀(Tlalcacahuatl)이라 불렀는데, 재미있게도 이 명칭 또한 땅을 뜻하는 틀랄리(Tlālli)와 카카오 콩을 뜻하는 카카와틀(Cacahuatl)의 합성어로 '땅콩'과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대항해시대 당시 남아메리카를 탐사하던 유럽인에게 발견된 후,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고, 또 땅을 기름지게 한다는 점이 발견되어 50여 년 만에 전 세계로 퍼졌다.
땅콩으로 유명한 사람 중 하나는 조지아주에서 땅콩을 재배하다가 미국 제39대 대통령이 된 지미 카터(Jimmy Carter)를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우리에게는 키가 작은 사람을 놀리는 별명으로도 쓰이지만 대표적으로 슈퍼땅콩이라는 별명의 여자프로 골퍼 김미현이 유명했다. 한 세대 전에는 위대한 흑인 과학자 조지 워싱턴 카버(George Washington Carter)를 연상했다. 그는 노예로 태어나서 보잘것없던 땅콩을 미국 남부 경제의 대들보로 바꿔 놓은 인물이다. 흑인 노예로 조지 워싱턴을 존경한 그의 주인이 그에게 '조지 워싱턴'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으며, 훗날 노예제도가 폐지되자 조지 워싱턴을 자신의 양자로 삼아 '카버'라는 성을 물려주었다. 당시 미국 남부는 대량의 목화를 재배하던 때라 땅이 온통 척박해져 작물이 제대로 자라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에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고 지력(地力)을 회복시키는 땅콩이 농민들에게 전파되었다. 이에 지력이 회복되고 땅콩 생산량이 늘어난 것까지는 좋았으나 과잉 생산된 땅콩이 남아돌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바구미들이 창궐하면서 도리어 목화밭을 초토화시켰다. 주 작물인 목화는 바구미들이 전부 빼앗아먹고 지력을 회복시키고자 심은 땅콩은 처치 곤란이 돼버린 상황이다. 당시 땅콩은 간식으로 소량 소비하는 걸 제외하면 소나 돼지 같은 가축들의 사료로나 쓰이는 작물이었다. 이에 카버는 연구에 몰두하여 땅콩버터, 마가린, 식용유, 비누, 윤활유, 샴푸, 구두약 등 무려 300여 가지에 이르는 제품을 땅콩을 응용해 만들어낼 수 있도록 했다. 심지어 다이너마이트의 재료인 니트로글리세린의 원료 중에 땅콩도 들어있다. 이 덕분에 남아돌던 땅콩의 수요가 계속 발생하고 미국의 경제는 견실해졌다.
어린이들은 땅콩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군침부터 삼킨다. 달콤한 피넛브리틀, 와삭와삭 씹히는 땅콩 초콜릿바, 서커스와 구기 경기장에서 파는 까지 않은 땅콩. 그러나 미국 어린이들은 뭐니 뭐니 해도 피넛버터와 젤리를 칠한 샌드위치를 먼저 연상할 것이다. 땅콩이 진짜 빛을 보게 된 것은 메이저 리그 야구 덕분이었다. 경기를 관전하면서 주전부리가 필요했던 관중들이 땅콩을 엄청나게 소비했던 것이다. 응원가 가사에도 등장한다. 미국인들은 한 해에 1인당 1.8kg의 피넛버터를 먹는데, 그것은 미국의 땅콩 생산량의 55%에 해당한다. 미국 사람들은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 더 많은 땅콩을 소비한다. 수프, 빵, 케이크, 샐러드에 땅콩이 들어가는가 하면 심지어 술에도 들어간다. 카버와 그 후계자들의 선구적인 연구 결과 땅콩은 잉크, 샴푸, 리놀륨, 섬유, 비누, 페인트, 윤활유는 물론, 심지어 니트로글리세린의 원료로도 쓰인다. 중국, 인도, 서아프리카 그리고 원산지인 남아메리카에서도 여전히 땅콩은 널리 재배되고 있지만 그 지역에서는 대개 식용유로 소비되고 있다. 땅콩과 피넛버터는 가장 영양분이 많은 식품이다. 우주비행사들은 달여행 때 피넛버터, 젤리샌드위치를 먹었다. 피넛버터 샌드위치 1개, 밀크 1잔, 오렌지 1개는 균형이 잘 잡힌 식단인데, 이 식단에서 땅콩이 단백질의 대부분을 공급한다. 땅콩은 콩이나 완두와 마찬가지로 단백질이 풍부한 콩과의 식물에 속한다. 땅콩은 중국, 인도, 나이지리아가 생산과 소비 모두 각 1,2,3위를 차지하고 있다.
남미의 인디언들은 적어도 2000년 전부터 땅콩을 재배하였고, 잉카의 무덤에서는 땅콩 모양의 도기가 출토되었다. 스페인인들이 땅콩재배를 유럽으로 전했고, 곧이어 그것은 아프리카로 퍼졌다. 노예상인들은 잡아 온 흑인들을 경매에 붙이기 전에 땅콩을 먹여 살을 찌웠다. 아프리카의 노예들이 땅콩을 미국남부에 들여왔는데 남부에서는 그것을 '구버 피스(Goober peas)'라고 부르며, 노예나 가난한 사람들만 먹는 것으로 여겼었다. 그러나 남북전쟁 때 북군은 장거리 행군을 하면서 땅콩을 먹었고, 남부인들이 땅콩을 먹으며 즐겨 부르는 노래도 불렀다. 북군 병사들이 땅콩의 맛을 북부로 소개하면서 땅콩은 미국 전 국민의 식량이 되었다. 땅콩의 인기는 세인트루이스의 의사 존 하비 켈로그(John Harvey Kellogg)가 환자가 먹기 좋게 땅콩을 부드러운 풀처럼 이겨 놓는다는 멋진 아이디어를 생각해서 피넛버터가 탄생한 1890년 이후 절정에 달했다. 그는 이 일로 의사를 그만두고 세계 최대의 시리얼 기업인 켈로그를 창립했다. 켈로그의 직원이었던 조셉 램버트가 땅콩을 분쇄하는 기계를 발명하여 별도 회사로 독립하기도 했다. 이런 땅콩버터는 보관 중에 층분리가 생기고 땅콩기름이 많이 나와서 불편했는데, 1921년에 발명가 조셉 로즈필드(Joseph Rosefield)가 그 문제를 해결하여 오늘날 유명한 브랜드인 ‘스키피(SKIPPY)’가 탄생했다. 미국인에게는 땅콩버터가 국민식품이나 마찬가지인 셈인데도 미국을 비롯한 서양인들이 동양인 보다 땅콩 알레르기가 더 많은 것이 특이하다. 한 때 대한항공의 ‘땅콩 회항 사건’은 우리 시대의 ‘갑질’에 대한 커다란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사실 정확히는 땅콩이 아니라 마카다미아였기 때문에 땅콩 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사건이다. 하지만 당시 국내에 마카다미아가 크게 알려져 있지 않아서 이 사건을 비슷한 견과류인 땅콩을 붙여서 땅콩 회항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금삿갓 芸史 琴東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