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64> 對雪獻從兄虞城宰(대설헌종형우성재)

금삿갓의 漢詩工夫(251031)

by 금삿갓

對雪獻從兄虞城宰(대설헌종형우성재) / 눈을 대하고 우성고을 원인 종형에게 드림.

- 李白(이백)


昨夜梁園雪

작야양원설

●●○○●

어젯밤 양원에 눈이 내려


弟寒兄不知

제한형부지

○○○●●

아우는 추웠는데 형은 알지 못하죠.


庭前看玉樹

정전간옥수

○○○●●

뜰 앞 눈 덮인 나무를 보니


膓斷憶連枝

장단억연지

○●●○◎

이어진 가지를 생각하며 간장이 끊어지네.

此(차)는 從弟納詩于從兄也(종제납시우종형야)라. 從兄(종형)은 宰於虞城(재어우성)하고, 從弟(종제)는 居於梁園(거어양원)하야. 昨夜雪下(작야설하)하야. 天氣甚寒而弟之寒苦(천기심한이제지한고)를 兄必不知矣(형필부지의)라. 看庭玉樹之冒雪成玉(간정옥수지모설성옥)하니 同根連枝(동근연지)라. 可以人而不如樹木乎(가이인이불여수목호)아. 心膓欲斷(심장욕단)하야. 歎之深而思之切也(탄지심이사지절야)로다.

이는 사촌 동생이 사촌 형에게 바치는 시다. 사촌 형은 우성의 고을 원이요. 사촌 동생은 양원에 살고 있는데, 지난밤에 눈이 내리고 날씨가 매우 추워 동생이 추위에 괴로워한 것을 틀림없이 형은 몰랐을 것이다. 뜰 앞에 나무가 눈에 덮여 옥이 되었으니, 같은 뿌리로 이어진 나뭇가지인 것이다, 사람이 나무보다 못해서야 되겠는가? 심장을 도려내는 것 같이 탄식이 심하여 마음이 끊어진다.

* 虞城宰(우성재) : 당나라 시절 송주(宋州)의 우성현(虞城縣)의 고을 원님. 지금 후난성 우성현.

* 梁園(양원) : 당나라 때 송주(宋州)에 있는 지명. 일명 양원(梁苑)으로 한나라 양효왕(梁孝王)의 유람지였다. 지금의 하남성 상구(商丘).

* 連枝(연지) : 같은 뿌리에서 나와 연결된 가지로 동기간을 말함. “况我連枝樹(황아연지수) 與子同一身(여자동일신)”이라는 고시가 있다.

낙엽.JPG

* 이백(李白, 701~762) : 중국 성당기(盛唐期)의 시인으로서 자는 태백(太白)이며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다. 이백은 중국의 수많은 시인 가운데 두보와 더불어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칭송되며, 오늘날 이두(李杜)라 병칭 하며 두보를 시성(詩聖), 이백을 시선(詩仙)이라 부른다. 출생지와 혈통에 관해서는 정설이 없고 관련 기록을 참고하여 유추해 보면 수나라 말에 그의 먼 조상이 서역(西域)으로 유배되어 갔다가 당나라 신룡(神龍) 원년(705)에 그의 부친 이객(李客)이 몰래 가족들을 데리고 촉(蜀)이라는 지방의 사천성(四川省) 면주(綿州) 창명현(彰明縣) 청련향(靑蓮鄕)에 들어와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백은 서역에서 태어나 5세 때 서역에서 무역상을 하던 아버지를 따라 들어와 25세까지 20년 동안을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청련거사라는 그의 자작호도 자신의 고향이라 여긴 청련향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호방한 성품의 이백은 학문에도 자질이 있어 부친으로부터 가학(家學) 교육받고, 일찍이 어려서부터 학문을 연마하여 다방면의 지식과 사상을 습득하였다. 이백은 지방 관리에게 자신을 천거하는 편지글에서 5세 때 60 갑자를 외웠고, 10세 때 유가를 비롯한 제자백가의 사상을 섭렵하여 황제 헌원 이후의 일을 알고 있었다. 15세 때 기서(奇書)를 읽고 부(賦)를 지어 사마상여(司馬相如, 기원전 179~기원전 117)를 능가하였으며, 검술을 좋아하고 두루 지방 관리들을 배알 하였다고 술회하였다. 송나라 축목(祝穆)이 편찬한 『방여승람(方輿勝覽)』의 기록에 의하면 이백이 미주(眉洲)의 상이산(象耳山)에서 독서할 때 공부에 싫증을 내고 하산하다가 한 노인이 시냇물 옆 숫돌에 절구를 놓아두었는데, 이백이 노인에게 왜 그것을 갈고 있느냐고 물으니 노인이 바늘을 만들려고 한다고 답했다. 이에 이백이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이후 학문에 계속 정진하기로 마음먹고 산으로 다시 돌아가 독서를 계속하였다고 한다. 이로부터 마저성침(磨杵針)의 고사가 인구에 회자되었다. 이백은 10대 후반에 민산(岷山)의 남쪽에서 동엄자(東嚴子)라는 은자를 스승으로 도술을 배우며 세속에서 누릴 수 없는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 동강(潼江), 지금의 재주(梓州) 부근의 산에서 은거하고 있는 은사 조유(趙蕤)를 방문하기도 하였는데, 그의 정치사상이 이백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백이 흠모하였던 역사상 인물들은 관중(管仲), 안영(晏嬰), 악의(樂毅), 장량(張良), 제갈량(諸葛亮), 소진(蘇秦), 노중련(魯仲連) 등이 있다. 특히 계책에 능하고 공을 세우고도 상을 받지 않고 절개를 지킨 노중련에 대한 이백의 존경과 추종은 지대하여 여러 편의 시에서 찬양하고 있다. 노중련에 대한 이백의 각별한 존경과 숭상하는 마음은 「고풍(古風)」 제10수에 잘 나타나 있다.


말년에 이백은 장안을 떠나 허난[河南]으로 향하여 뤄양[洛陽]·카이펑[開封] 사이를 유력(遊歷)하고, 뤄양에서는 두보와, 카이펑에서는 고적(高適)과 지기지교를 맺었다. 두보와 석문(石門 : 陝西省)에서 헤어진 그는 산시[山西]·허베이[河北]의 각지를 방랑하고, 더 남하하여 광릉(廣陵 :현재의 揚州)·금릉(金陵 : 南京)에서 노닐고, 다시 회계(會稽 : 紹興)를 찾았으며, 55세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쉬안청[宣城 : 安徽]에 있었다. 적군에 쫓긴 현종이 촉나라로 도망하고, 그의 황자(皇子) 영왕(永王) 인(璘)이 거병, 동쪽으로 향하자 그의 막료로 발탁되었으나, 새로 즉위한 황자 숙종과 대립하여 싸움에 패하였으므로 그도 심양(尋陽 : 江西省 九江縣)의 옥중에 갇히었다. 뒤이어 야랑(夜郞 : 貴州)으로 유배되었으나 도중에서 곽자의(郭子義)에 의하여 구명, 사면되었다(59세). 그 후 그는 금릉·쉬안청 사이를 방랑하였으나 노쇠한 탓으로 당도(當塗 : 安徽)의 친척 이양빙(李陽氷)에게 몸을 의지하다가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이백의 생애는 방랑으로 시작하여 방랑으로 끝났다. 청소년 시절에는 독서와 검술에 정진하고, 때로는 유협(遊俠)의 무리들과 어울리기도 하였다. 쓰촨성 각지의 산천을 유력(遊歷) 하기도 하였으며, 민산(岷山)에 숨어 선술(仙術)을 닦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방랑은 단순한 방랑이 아니고, 정신의 자유를 찾는 ‘대붕(大鵬)의 비상(飛翔)’이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63> 別東林寺僧(별동림사승) / 동림사 스님과 이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