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65> 臨高臺(임고대) / 높은 대에 나가서

금삿갓의 漢詩工夫(251031)

by 금삿갓

臨高臺(임고대) / 높은 대에 나가서

- 王維(왕유)


相送臨高臺

상송임고대

○●○○○

서로 보내며 높은 대에 임하니


川原杳何極

천원묘하극

○○●○◆

개울과 들판은 어디가 끝인지 아득하고


日暮飛鳥還

일모비조환

●●○●○

날 저물어 날던 새도 돌아오는데


行人尙不息

행인상불식

○○○●◆

행인만 오히려 쉬지 않는구나.

초원.JPG

此(차)는 送別之詩也(송별지시야)라. 相送而臨高臺則川原(상송이임고대즉천원)이 杳茫(묘망)하야. 何其極乎(하기극호)아. 此時(차시)에 日已暮矣(일이모의)라. 衆鳥(중조)는 高飛(고비)하야. 投於林間(투어임간)하되 行路之人(행로지인)은 尙不休息(상불휴식)하니 此亦感歎世之奔忙度了也(차역감탄세지분망탁료야)라.

이는 송별의 시다. 서로 헤어지며 높은 대에 임하니, 시내와 들판이 아득하여 그 끝이 어디인 것인가? 이때에 날이 이미 저물어 새들은 높이 날아 숲 사이로 머물러드나 길을 가는 사람은 오히려 쉬지 않으니, 이것 또한 세상의 분망함을 깨달은 것으로 감탄스럽다.

* 이 시는 중국 자료에는 제목이 臨高臺送黎拾遺(임고대송여습유)로 되어 있다. 그냥 임고대는 왕발의 작품이 유명하다. 여습유는 왕유의 친구 여흔(黎盺)으로 벼슬이 습유는 관직명.

* 王維(왕유) : 자 마힐(摩詰). 산시성[山西省] 출생. 9세에 이미 시를 썼으며, 서(書)와 음곡(音曲)에도 재주가 뛰어났다. 아우인 진(縉)과 함께 일찍부터 문명(文名)이 높았으며, 특히 기왕(岐王)의 사랑을 받아 731년 진사에 합격, 태악승(太樂丞)이 되었다. 후에 제주(濟州:山東省 荏平縣)의 사창참군(司倉參軍)으로 좌천되었으나, 734년 우습유(右拾遺)로 발탁되어 감찰어사 ·좌보궐(左補闕) ·고부낭중(庫部郞中)을 역임, 이부낭중에서 급사중(給事中)이 되었다. 안녹산의 난을 당하여 반란군의 포로가 되어 협박을 받고 할 수 없이 출사 하였다. 반란 평정 후 그 죄가 문책되었으나 아우 진의 조력과 반란군 진중에서 지은 천자를 그리는 시가 인정받아 가벼운 벌로 치죄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후 다시 등용되어 상서우승(尙書右丞)의 자리까지 벼슬이 올라갔다. 그 때문에 왕우승이라고도 불렸다. 또한 왕유는 육조시대(六朝時代)의 궁정시인의 전통을 계승한 시인이라 하여 장안(長安) 귀족사회에서는 칭찬이 자자하였고 존경도 받았다. 그의 시는 산수 ·자연의 청아한 정취를 노래한 것으로 수작(秀作)이 많은데, 특히 남전(藍田:陝西省 長安 동남의 縣)의 별장 망천장(輞川莊)에서의 일련의 작품이 유명하다. 맹호연(孟浩然) ·위응물(韋應物) ·유종원(柳宗元)과 함께 왕맹위유(王孟韋柳)로 병칭 되어 당대 자연시인의 대표로 일컬어진다. 또 그는 경건한 불교도이기도 해서, 그의 시 속에는 불교사상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는 것도 하나의 특색이다. 《왕우승집》(28권) 등이 현존한다. 그림은 산수화에 뛰어나, 수묵(水墨)을 주체로 하였는데, 금벽휘영화(金碧輝映畵)에도 손을 대고 있어 화풍 또한 다양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순정 ·고결한 성격의 소유자로, 탁세(濁世)를 멀리하고 자연을 즐기는 태도 등은 남송문인화의 시조로 받들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송나라의 소동파(蘇東坡)는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라고 평하였다. 당시는 장안(長安)에 있는 건축의 장벽산수화(牆壁山水畵)나 《창주도(滄州圖)》 《망천도(輞川圖)》 등이 알려져 있었으나 확실한 유품은 전하여진 것이 없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64> 對雪獻從兄虞城宰(대설헌종형우성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