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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息婦人(식부인) / 식부인

금삿갓의 漢詩工夫(251031)

by 금삿갓

息婦人(식부인) / 식부인

- 王維(왕유)


莫以今時寵

막이금시총

●●○○●

지금 총애를 받는다 해도


能忘舊日恩

능망구일은

○○●●◎

옛날의 은혜를 잊을 수 없어


看花滿眼淚

간화만안루

○○●●●

꽃을 봐도 눈에 가득 눈물


不共楚王言

불공초왕언

●●●○○

초왕과는 말을 하지 않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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楚文王(초문왕)이 聞息嬀之美(문식규지미)하고, 欲得之(욕득지)하야. 以巡方(이순방)으로 爲名(위명)하고 至息(지식)하야. 設伏擒息侯(설복금식후)하고 迫息嬀(박식규)하야. 載以歸(재이귀)하야. 息嬀生二子(식규생이자)호대 終不與楚王(종불여초왕)으로 說話(설화)하니 王(왕)이 恠問之(괴문지)하니 對曰(대왈) “一夫人(일부인)이 事兩夫(사양부)하니 縱不死守節(종불사수절)이나 何面目(하면목)으로 向人言語乎(향인언어호)아”하고, 淚下不止(루라부지)라.

초문왕이 식규의 아름다움을 듣고 그를 얻으려고 순방으로 명분 삼아 식나라에 이르러 매복을 세워 식 제후를 사로잡고, 식규를 윽박질러 싣고 돌아왔다. 식규가 아들 둘을 낳았으되 끝내 초왕과 말을 하지 않으니, 왕이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대답해 말하기를 “한 부인이 두 지아비를 섬기니 죽음으로 수절하지 못했으나 무슨 면목으로 사람을 향해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며 눈물을 멈추지 않는지라.

王維詩以記之曰(왕유시이기지왈) “莫以今時楚王之寵(막이금시초왕지총)으로 能忘舊日息侯之恩(능망구일식후지은)하라”하니, 此(차)는 戒之之言也(계지지언야)오. 花(화)는 息夫人名(식부인명)이니, 看花淚滿眼(간화루만안)하야. 不共楚王言者(불공초왕언자)는 此亦可謂烈貞之心也(차역가위열정지심야)로다.

왕유가 이를 시로 기록해 이르기를, “지금 초왕의 총애를 받는다 해도 옛날의 식후의 은혜를 잊을 수 없었다.”라고 하니, 이는 그것을 경계하는 말이다. 꽃은 식부인의 이름이니 꽃을 보며 눈에 눈물이 가득하여 초왕과 더불어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 또한 역시 맵고 곧은 마음이로다.

* 息婦人(식부인) : 옛날 중국 진(陣) 나라에 성이 규(嬀) 씨인 두 미인이 살았는데 언니는 채(蔡)나라에 시집을 가고, 둘째 딸이 식(息)나라로 시집을 갔다고 한다. 그런데 둘째딸이 식후에게 시집가면서 채나라를 지나게 되었는데 채후(蔡侯)가 식나라로 시집가는 처제를 강제로 모셔서 잔치자리에 앉혀서 무례한 행동을 하였다고 한다. 이에 화가 난 식후가 초(楚)나라 문왕에게 거짓으로 식나라를 쳐 들어오라고 하고는 초나라 침입을 도와 달라고 채나라에 원군을 청하는데, 채나라 군사가 식나라로 온 틈에 초문왕이 채나라로 쳐들어가서 채후와 그의 부인을 잡아가 버린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채후가 초문왕에게 식후의 부인이 더 빼어나다고 초왕을 부추긴다. 호색한인 초왕이 식나라를 정벌하여 식후를 잡아가서 처로 삼았다. 식부인은 초문왕과의 사이에 아들을 둘을 낳고도 잠자리에서는 초왕과 말을 하지 않았다. 이에 초문왕이 그 이유를 물으니 식부인 왈 비록 잡혀 와서 사는 입장이지만 어찌 옛 은혜를 잊을 수 있느냐고 했다고 한다. 뒷날 당나라 황제의 동생이 이웃에 사는 떡 장수의 부인이 예쁜 것을 알고 강제로 그 떡장수의 아내를 빼앗아서 살고 있었는데, 왕유가 식부인의 고사를 빗대어 이 시를 지어 당나라 황제의 동생이 자기의 권력만 믿고 힘없는 백성의 아내를 탐한 부도덕성을 성토한 시가 바로 이 식부인이란 왕유의 시라고 한다. 왕유의 이 시를 알게 된 황제가 동생을 꾸짖고 떡장수의 처를 다시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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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王維(왕유) : 자 마힐(摩詰). 산시성[山西省] 출생. 9세에 이미 시를 썼으며, 서(書)와 음곡(音曲)에도 재주가 뛰어났다. 아우인 진(縉)과 함께 일찍부터 문명(文名)이 높았으며, 특히 기왕(岐王)의 사랑을 받아 731년 진사에 합격, 태악승(太樂丞)이 되었다. 후에 제주(濟州:山東省 荏平縣)의 사창참군(司倉參軍)으로 좌천되었으나, 734년 우습유(右拾遺)로 발탁되어 감찰어사 ·좌보궐(左補闕) ·고부낭중(庫部郞中)을 역임, 이부낭중에서 급사중(給事中)이 되었다. 안녹산의 난을 당하여 반란군의 포로가 되어 협박을 받고 할 수 없이 출사하였다. 반란 평정 후 그 죄가 문책되었으나 아우 진의 조력과 반란군 진중에서 지은 천자를 그리는 시가 인정받아 가벼운 벌로 치죄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후 다시 등용되어 상서우승(尙書右丞)의 자리까지 벼슬이 올라갔다. 그 때문에 왕우승이라고도 불렸다. 또한 왕유는 육조시대(六朝時代)의 궁정시인의 전통을 계승한 시인이라 하여 장안(長安) 귀족사회에서는 칭찬이 자자하였고 존경도 받았다. 그의 시는 산수 ·자연의 청아한 정취를 노래한 것으로 수작(秀作)이 많은데, 특히 남전(藍田:陝西省 長安 동남의 縣)의 별장 망천장(輞川莊)에서의 일련의 작품이 유명하다. 맹호연(孟浩然) ·위응물(韋應物) ·유종원(柳宗元)과 함께 왕맹위유(王孟韋柳)로 병칭되어 당대 자연시인의 대표로 일컬어진다. 또 그는 경건한 불교도이기도 해서, 그의 시 속에는 불교사상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는 것도 하나의 특색이다. 《왕우승집》(28권) 등이 현존한다. 그림은 산수화에 뛰어나, 수묵(水墨)을 주체로 하였는데, 금벽휘영화(金碧輝映畵)에도 손을 대고 있어 화풍 또한 다양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순정 ·고결한 성격의 소유자로, 탁세(濁世)를 멀리하고 자연을 즐기는 태도 등은 남송문인화의 시조로 받들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송나라의 소동파(蘇東坡)는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고 평하였다. 당시는 장안(長安)에 있는 건축의 장벽산수화(牆壁山水畵)나 《창주도(滄州圖)》 《망천도(輞川圖)》 등이 알려져 있었으나 확실한 유품은 전하여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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