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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운사 Jul 03. 2023

21> 夷山八絶 其六(이산팔절 기6)

漢詩 工夫(한시 공부)

夷山八絶 其六(이산팔절 기6) / 이산에서 8 절구를 읊다. 그중 6번 수

 - 허봉(許篈) -


春來三見洛陽書

춘래삼견낙양서

○○○●●○◎

봄 되어 서울서 온 편지 세 번이나 받아보니


聞說慈親久倚閭

문설자친구의려

●●○○●●◎

어머님이 문에 기대어 오래 기다리신다고 들리네.


白髮滿頭斜景短

백발만두사경단

●●●○○●●

짧은 석양빛 아래 흰머리만 가득하실 터인데


逢人不敢問何如

봉인불감문하여

○○●●●○◎

만나는 사람에게 어떻게 지내시는지 감히 묻지 못했네.

이 시는 하곡(荷谷) 허봉(許篈·1551~1588)이 귀양 가서 어머니를 그리며 쓴 것으로 <하곡집(荷谷集)>의 하곡선생시초(荷谷先生詩抄)에 총 8수(首)가 실여있는데, 그중에서 6번째 시이다. 홍만종(洪萬鍾)의 시평집인 <시평보유(詩評補遺)> 상권에 ‘甲山(갑산)’으로 수록돼 있다. 갑산(甲山)은 삼수갑산(三水甲山)의 준말로 가장 험한 지방의 대명사이며 유배지였다. 이곳은 오랑캐의 땅으로 있다가 조선에 편입되기도 했으므로 오랑캐의 산이란 의미로 이산(夷山)이라 고도한다. 시는 칠언절구 평기식(평기식(平起式)으로 압운(押韻)은 ◎표시한 서(書), 려(閭), 여(如) 자이고 어운목(魚韻目)이다. 기구(起句)의 3번 삼(三) 자와 전구(轉句)의 3번 만(滿) 자의 평측을 변화시켰지만 평기식 전형(典型)을 아주 잘 지킨 것이다. 시어(詩語)에서 낙양(洛陽)은 동주(東周)의 수도였으며 누대에 걸쳐 수도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장안(長安)과 마찬가지로 문학적으로는 서울을 이르는 대명사 정도이다. 의려(倚閭)라는 말은 어머니가 동구 밖으로 나가서 자녀가 돌아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말이다. 의려지망(倚閭之望)의 준말이다. 어머니가 마을 문에 기대서 돌아오는 아들을 기다리는 모습은 <전국책(戰國策)>의 ‘제책(齊策)’에도 나온다. 제나라 왕손가(王孫賈)가 열다섯 살에 민왕(閔王)을 섬겼다. 그 모친이 “네가 아침에 나가 저녁에 돌아올 때면 내가 집 문에 기대어 너를 기다렸고(倚門而望·의문이망) / 네가 저녁에 나가 돌아오지 않을 때면 내가 마을 문에 기대어 너를 기다렸다(倚閭而望·의려이망)”고 했다. 어머니의 끝없는 자식 사랑이다.

허봉은 초당(草堂) 허엽(許曄)의 3남 1녀 중 장남 허성(許筬)의 동생으로 허난설헌의 오빠이자 허균(許筠)의 형이다. 허봉이 1583년 7월 전한(典翰)으로 재직하던 중 병조판서 이이와 심의겸 등의 실책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박근원·송응개와 함께 각각 회령·강계·갑산에 유배되었다. 이 시는 갑산 유배 당시 지은 것이다. 허봉(許葑)이 죄를 입어 갑산(甲山)으로 귀양 갈 때 친구들과 다음과 같은 이별하는 시를 지었다.

深樹啼鴉薄暮時(심수제아부모시) / 까마귀 우는 숲에 엷은 어둠 깔리어 올 제

一壺來慰楚臣悲(일호래위초신비) / 한 병 술로 귀양 슬픔 와서 위로하는구려.

此生相見應無日(차생상견응무일) / 이 인생 살아서는 다시 볼 날 없으리.

直指重泉作後期(직지중천작후기) / 황천 길 가리키며 뒷기약 남기노라.

살아서는 다시 볼 날이 없다니 아마 금생에서는 마지막 하직을 말하는 것이었을까? 황천길을 가리키며 뒷기약을 남긴다니 완전히 죽기로 작정한 사람이 말 같기도 하다. 훗날에 그는 비록 유배에서 해배되어 귀양에서 풀려났지만, 위의 시가 시참(詩讖)이 되었는지 결국 한양 도성 안에는 들어오지 못하고 길에서 죽었다. 조선 시대 뛰어난 시인들의 경우 젊어서 쓴 시의 내용대로 말로(末路)가 이루어진 경우가 제법 있다. 실제 하곡 허봉은 1585년 6월에 유배가 풀려 재기용되나 거절하고, 유랑하다가 1588년 38세 젊은 나이로 금강산 아래 김화연 생창역에서 병사하였다.

하곡(荷谷) 선생과 필자의 선대 할아버지와는 사제지간의 연(緣)이 있다. 필자의 12대 종조(從祖)이신 언공(彦恭) 금각(琴恪)께서 어렸을 적에 하곡의 막내 동생 허균(許筠)과 비슷한 연배였는데, 그와 동문수학으로 그의 중형 하곡에게 일정기간 학문을 배운 인연이 있다. 허균이 쓴 할아버지의 묘지명을 참고로 덧 붙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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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유년(1585, 선조 18) 중형(仲兄 : 하곡 허봉)이 귀양살이에서 돌아오다가 백운산(白雲山)에서 글을 읽고 계실 때 금생(琴生 : 금각)이라는 사람이 가서 공부하고 있다는 소리는 들었으나, 나는 결혼하는 일 때문에 함께 하지 못하였다. 며칠 후 편지 온 것이 있어 열어보니 단정한 해서(楷書)로 쓴 정교한 편지였다. 글은 매우 간결하고 조리가 분명하며 군의 솜씨는 풍자가 많아 마치 고인의 글을 읽는 듯하였다. 그 뜻은 대개 만나고 싶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는 것이었고, 함께 형에게 가자는 것이었다. 나는 급히 그가 살고 있는 집을 방문하고 매우 가깝게 지냈다. 다음 해 봄에 김군 확(金君 矱)을 데리고 백운산에 가니 군과 심군 액(沈君 詻)은 이미 먼저 와 있었다. 네 사람은 조석으로 함께 노닐고 서로 공부하여 바로잡고 하여, 그 정은 친형제나 다름없어 늙을 때까지 함께 보전하기를 바랐는데, 불행히도 군은 병들어 8월 25일에 졸하였다. 아아, 애통하다.

공은 영남(嶺南)에서 태어났으니 고려 때의 학사 금의(琴儀)의 후손이다. 사람됨이 재기가 뛰어나고 호탕하며 생김새는 마치 옥을 세운 듯하여 바라보면, 신선 중의 한 사람인 것 같았다. 그의 아버지 봉화공(奉化公 : 성재 금난수)은 그를 각별히 사랑하였다. 다섯 살 때 묘려(墓廬 무덤 옆에 세운, 상제가 거처하는 초막)에서 글을 배울 때 벽에 붙여 놓은 《주역》의 괘상(卦象)을 보고 바로 외우는데, 그 차례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그때 산소에서 재고(齋庫)를 짓느라 일꾼이 많았는데 그 이름을 모두 기억하였다. 글 읽기에 열중한 나머지 어머니를 뵈러 갔다가도 꼭 기한에 돌아왔다. 아홉 살 때 그의 아버지를 따라 제릉(齊陵 신의왕후릉(神懿王后陵))에 가서 옛 서울의 산수를 보았으며, 아버지가 집경전(集慶殿)으로 전임되자 또한 동경(東京 : 경주를 일컬음)의 옛 자취를 찾아보았다. 어려서부터 이렇게 유별난 뜻이 있었다. 계미년(1583, 선조 16)에 그의 아버지가 서울에서 벼슬을 하게 되자 군은 아버지를 모시고 와서 송미로(宋眉老 : 자는 거인, 계림군 이유의 사위)에게 소시(蘇詩 : 소동파의 시)를 배웠고, 15세에 비로소 나의 중형에게 고문과 시를 배웠다. 그 글이 날로 진보하고 읽으면 바로 그 법을 터득하였으며, 논하는 바는 속기(俗氣)를 벗어 깔끔하며 보통 사람의 생각이 미치지 못한 곳에서 나왔다. 중형께서는 그를 사랑하고, 탄복하여 그의 아버지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댁의 아드님이 멀리서 오자 그의 말을 듣고 그의 조촐한 마음을 살펴보니 청명하고 영수(英粹)하여 같은 또래들보다 이만저만 뛰어난 게 아닙니다. 참으로 봉(葑 : 하곡 허봉)의 스승이라 해야지, 그의 스승은 될 수 없습니다.”

그의 저술인 《주류천하기(周流天下記)》·《풍창낭화(風窓浪話)》·《일동록(日洞錄)》·《전의독서문(專意讀書文)》 등 글은 당시 문예를 논하는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여, 전해 베껴 외웠으므로 서울의 종이 값이 갑자기 오르기까지 하였다. 중형께서는 크게 칭찬하고 치켜세워 고인의 글이라도 이 글에 품제(品題)할 수는 없다고 하셨다. 군은 마음이 편안하고 욕심이 없으며 행동에 법도가 있었다. 비록 글짓기를 좋아했으나 유학자의 할 일이 말을 잘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 항상 정성으로 사리를 철저히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육경(六經)·사자(四子)와 염<濂 : 주돈이(周敦頤)>·낙<(洛 : 낙양(洛陽)>의 정호(程顥)·정이(程頤)·관<關 : 관중(關中)>의 장재(張載)·민<閩 : 민중(閩中)>의 주희(朱熹)의 책들을 두루 연구하고 항상 성현과 같이 되기를 스스로 기대하였다. 고금의 서적을 두루 읽어 치란흥망(治亂興亡)의 원인과 현과 사의 구분을 논함에 있어 득실과 가부가 명백하고 통쾌하여 듣는 사람이 지루하지 않았다. 또한 국가의 고사(故事)에도 밝아 마치 직접 경험한 사람 같았으니 그의 문학의 높고 깊음과 뜻의 원대함이 이상과 같았다.

병술년(1586, 선조 19) 가을에 폐결핵(肺結核)에 걸려 날로 쇠약해졌으나 손에 책을 들고 부지런히 읽었다. 부형들은 병이 더할까 걱정하여 이를 말리니 순종하지 않고,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습니다. 나는 하나도 힘들지 않은데 왜 몸이 상합니까.”하고는, 마침내 사마온공(司馬溫公)의 《통감(通鑑)》과 《강목(綱目)》 및 여러 의서(醫書)를 읽고 나서, “하늘이 내게 몇 년을 빌려주어 아직 보지 못한 책들을 모조리 읽는다면 내 소원은 다 이룬 것이다.” 하였다. 병이 아주 심해졌는데도 정신은 말짱하여 쓸데없는 기도를 금지하면서, “죽는 것은 운명인데 기도한다고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나는 장상(長殤 16세에서 18세 사이에 죽는 것)이니, 입주<立主 : 신주(神主) 모시는 것> 하지 않아도 된다. 하물며 몸과 혼백이 땅으로 돌아가면 혼기(魂氣)는 어디에나 있을 것이니, 나를 이곳에 장사 지내도 되는 것이다. 어찌 고향 선영으로 돌아가야만 하는가? 고향 길이 험하고 머니 부모님께 걱정을 더 끼칠까 두렵구나.” 하였다.

그리고 병중에 스스로 지문을 짓기를, “봉성인(鳳城人) 금각(琴恪)은 자는 언공(彦恭)이다. 7세에 공부하기 시작하고 18세에 죽었다. 뜻은 원대하나 명이 짧으니 천명인가 보다.” 하였고, 죽기 조금 전에 스스로 제문을 짓기를, “아버지, 어머니, 나를 위해 우시지 마옵소서. 아아, 가슴 아프다.” 하였다. 모년 9월 예안(禮安) 땅 백운동(白雲洞) 남향 뜰 묘소에 장사 지냈다. 그가 지은 시문 2권을 《조대집(釣臺集)》이라 하였다. 경술년(1610, 광해군 2) 봄에 그의 형 의부랑(儀部郞) 금개(琴愷)가 그의 행장을 가지고 와서, “죽은 동생의 행실은 형이 자세히 아는 바입니다. 그의 묘지를 기록하려는데 글을 지어 주지 않으시렵니까?” 하였다. 나는 울면서, “백운사(白雲寺)에 있었을 때 우리 세 사람은 군을 우러러보기를 쑥대가 높은 소나무 쳐다보듯 하였소. 그가 살아 있었다면 반드시 문장(文章)의 맹주(盟主)가 되어 나라의 보배가 되었을 것이오. 내가 어찌 감히 글을 가지고 세상에 이름을 날렸겠소. 불행히 먼저 갔으니 뒷사람에게 알리는 책임은 실로 내게 있소이다. 어찌 미치지 못한다는 핑계로 돌아간 군과의 두터운 우의를 내 몰라라 하겠소.” 하고 피눈물을 닦으며, 다음과 같이 명한다.

공의 글은 옛글보다 뛰어나고 / 公文軼古(공문일고)

공의 학문은 미세한 데까지 이르렀소 / 公學造微(공학조미)

예림에 붉은 깃발 꽂을 이는 / 赤幟藝林(적치예림)

바로 공이 아니고 누구였겠소 / 非公而誰

옥루에 적으련다 / 奄記玉樓(엄기옥루)

우리 슬픔을 / 吾黨之悲(오당지비)

마침내 서투른 솜씨를 놀리려니 / 遂令拙斲(수령졸착)

때로 손가락의 피를 흘리노라 / 血指于時(혈지우시)

공의 행적 더듬기에 / 摸公之行(모공지행)

어찌 감히 많은 말을 쓰오리까 / 焉用荒辭(언용황사)

다만 나의 정의를 적는 것이니 / 記我情也(기아정야)

공은 아마 아실 것이오. / 公倘有知(공당유지)

★ 허봉(許篈, 1551~1588) : 본관 양천(陽川). 자 미숙(美叔). 호 하곡(荷谷). 유희춘(柳希春)의 문인. 허난설헌과 허균의 형이다. 1568년(선조 1) 생원시에 합격하고, 1572년 친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으며, 1574년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가서 《하곡조천기(荷谷朝天記)》를 썼다. 이듬해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 김효원(金孝元) 등과 동인의 선봉이 되어 이이(李珥), 박순(朴淳), 성혼(成渾) 등 서인들과 대립하였다. 1577년 교리(校理)가 되고, 1583년 전한(典翰) ·창원부사(昌原府使)를 지내고, 그해 병조판서 이이(李珥)를 탄핵하였다가 갑산(甲山)에 유배되었다. 이때 함께 탄핵을 논의했던 박근원, 송응개도 함께 유배를 떠나게 되었는데 이 사건을 두고 계미삼찬이라고 부른다. 1585년 영의정 노수신(盧守愼)의 주선으로 재기용되나 거절하고, 백운산(白雲山) ·인천 ·춘천 등으로 유랑하다가 1588년 금강산에 들어가 병사하였다. 문집에 《하곡집》 《하곡수어(荷谷粹語)》 등이 있고, 편저에 《의례산주(儀禮刪註)》 《북변기사(北邊記事)》 《독역관견(讀易管見)》 《이산잡술(伊山雜述)》 《해동야언(海東野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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