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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竹里館(죽리관) / 죽리관

금삿갓의 漢詩工夫(251125)

by 금삿갓

竹里館(죽리관) / 죽리관

- 王維(왕유)


獨坐幽篁裏

독좌유황리

●●○○●

홀로 그윽한 대나무 숲 속에 앉아


彈琴復長嘯

탄금부장소

●○●○●

거문고를 타다가 다시 길게 부네.


深林人不知

심림인부지

○○○●○

깊은 숲이라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明月來相照

명월래상조

○●○○●

밝은 달이 와서 서로 비추네.

산.JPG

此詩(차시)는 以獨坐二字(이독좌이자)로 爲眼(위안)하고 幽篁(유황)은 深林也(심림야)라. 彈琴(탄금)은 此獨坐之事(차독좌지사)니, 在竹間更韻(재죽간갱운)이라. 復長嘯(부장소)는 彈琴未已而復蹙口出聲(탄금미이이부척구출성)하야. 以叙淸嘯(이서청소)하니 此(차)는 獨坐之趣(독자지취)라. 深林(심림)은 竹林也(죽림야)니. 以一人(이일인)이 坐于深林(좌우심림)하니 誰復有知者(수부유지자)리오. 明月(명월)이 似解人意而徧來照獨坐之人(사해인의이편래조독좌지인)하야. 若不約而來者(약불약이래자)라. 獨坐人(독좌인)이 與明月(여명월)로 方纔是兩故(방재시양고)로 云相照(운상조)라.

이 시는 獨坐(독좌) 두 글자로 눈을 삼았고, 幽篁(유황)은 깊은 대숲이다. 彈琴(탄금)은 혼자 앉았을 때의 일이니 대숲사이에 있으며 다시 소리를 낸 것이다. 다시 길게 휘파람 분 것은 거문고 연주가 끝나기 전에 다시 입을 오므려 소리를 내어 맑은 휘파람 소리를 펼친 것이니 이것은 홀로 앉았을 때의 취미다. 깊은 숲은 대숲이다. 한 사람이 깊은 숲에 앉은 것이니 누가 다시 아는 자가 있겠는가? 밝은 달이 사람의 뜻을 아는 듯 홀로 앉은 사람을 두루 와서 비추어 마치 약속하지 않고 찾아온 것 같았다. 홀로 앉은 사람이 밝은 달과 더불어 이제 막 둘이 된 고로 相照(상조)라고 말한 것이다.


○ 竹裏舘者(죽리관자)는 舘在於竹林之中故(관재어죽림지중고)로 名(명)이라. 獨坐有琴嘯之樂而無人知得(족좌유금소지락이무인지득)하고 考無私之明月(고무사지명월)이 來照于竹間則玲瓏淸爽(래조우죽간즉영롱청상)이라.

죽리관은 관이 대숲 속에 있었기 때문에 이름붙인 것이다. 홀로 앉아 거문고와 휘파람의 즐거움이 있으므로 사람이 없는 것을 알고, 개인이 가질 수 없는 밝은 달이 대숲사이로 와서 영롱하고 맑고 상쾌하게 비춰준다고 생각한 것이다.

* 竹裏舘(죽리관) : 왕유의 망천(輞川) 별업이 있던 곳의 집. 집 주변에 대나무 숲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 幽篁(유황) : 그윽한 대나무 숲.

* 王維(왕유) : 자 마힐(摩詰). 산시성[山西省] 출생. 9세에 이미 시를 썼으며, 서(書)와 음곡(音曲)에도 재주가 뛰어났다. 아우인 진(縉)과 함께 일찍부터 문명(文名)이 높았으며, 특히 기왕(岐王)의 사랑을 받아 731년 진사에 합격, 태악승(太樂丞)이 되었다. 후에 제주(濟州:山東省 荏平縣)의 사창참군(司倉參軍)으로 좌천되었으나, 734년 우습유(右拾遺)로 발탁되어 감찰어사 ·좌보궐(左補闕) ·고부낭중(庫部郞中)을 역임, 이부낭중에서 급사중(給事中)이 되었다. 안녹산의 난을 당하여 반란군의 포로가 되어 협박을 받고 할 수 없이 출사하였다. 반란 평정 후 그 죄가 문책되었으나 아우 진의 조력과 반란군 진중에서 지은 천자를 그리는 시가 인정받아 가벼운 벌로 치죄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후 다시 등용되어 상서우승(尙書右丞)의 자리까지 벼슬이 올라갔다. 그 때문에 왕우승이라고도 불렸다. 또한 왕유는 육조시대(六朝時代)의 궁정시인의 전통을 계승한 시인이라 하여 장안(長安) 귀족사회에서는 칭찬이 자자하였고 존경도 받았다. 그의 시는 산수 ·자연의 청아한 정취를 노래한 것으로 수작(秀作)이 많은데, 특히 남전(藍田:陝西省 長安 동남의 縣)의 별장 망천장(輞川莊)에서의 일련의 작품이 유명하다. 맹호연(孟浩然) ·위응물(韋應物) ·유종원(柳宗元)과 함께 왕맹위유(王孟韋柳)로 병칭되어 당대 자연시인의 대표로 일컬어진다. 또 그는 경건한 불교도이기도 해서, 그의 시 속에는 불교사상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는 것도 하나의 특색이다. 《왕우승집》(28권) 등이 현존한다. 그림은 산수화에 뛰어나, 수묵(水墨)을 주체로 하였는데, 금벽휘영화(金碧輝映畵)에도 손을 대고 있어 화풍 또한 다양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순정 ·고결한 성격의 소유자로, 탁세(濁世)를 멀리하고 자연을 즐기는 태도 등은 남송문인화의 시조로 받들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송나라의 소동파(蘇東坡)는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고 평하였다. 당시는 장안(長安)에 있는 건축의 장벽산수화(牆壁山水畵)나 《창주도(滄州圖)》 《망천도(輞川圖)》 등이 알려져 있었으나 확실한 유품은 전하여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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