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武侯廟(무후묘) / 무후(제갈량) 사당에서
금삿갓의 漢詩工夫(260108)
武侯廟(무후묘) / 무후(제갈량) 사당에서
- 杜甫(두보)
遺廟丹靑落
유묘단청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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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사당은 단청도 떨어지고
空山草木長
공산초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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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산에는 초목만이 무성하구나.
猶聞辭後主
유문사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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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후주에의 출사표 들리는 듯
不復臥南陽
불부와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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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남양 땅에 눕지 못했네.
* 武侯廟(무후묘) : 제갈량(葛亮出)을 기리는 사당으로 여러 곳에 있다. 이 시에서는 충칭시(重慶市) 펑제현(奉節县) 백제성(白帝城) 서쪽에 있는 무후묘이다. 현재 섬서성(陝西省) 한중시(漢中市) 면현(勉縣) 일대에 있었다는 설도 있다. 무후묘는 심지어 우리나라에도 많았다.
* 空山(공산) : 빈 산인데, 이 시에서는 백제산(白帝山)을 가리킨다.
* 辭後主(사후주) : 후주(後主)는 촉(蜀) 나라 유비의 아들 유선(劉禪)을 가리키며, 제갈량이 출사표(出師表)를 쓰고 유선에게 작별을 고하는 장면을 연상하는 것이다.
* 南陽(남양) : 지금의 허난성(河南省) 난양(南陽)으로 제갈량의 고향이다.
武侯卒於軍(무후졸어군)하니 後主(후주)가 詔立廟於沔陽(조립묘어면양)이러니, 今丹靑(금단청)이 剝落(박락)하고 山木(산목)이 茂長則歲月(무장즉세월)이 亦已久矣(역이구의)라. 武侯上出師表(무후상출사표)하고 辭後主伐魏(사후주벌위)는 至今猶聞之(지금유문지)하고 但僇力王家(단륙력왕가)호대 天不祚漢(천불조한)하여 不得功成而歸(부득공성이귀)하여 復臥南陽(부와남양)하니 是其心忠直(시기심충직)이 與廟貌(여묘모)로 俱古矣(구고의)라.
무후(武侯)가 군중에서 죽자, 후주(後主)가 명령하여 면양(沔陽)에 사당을 세웠었는데, 지금 단청이 벗겨져서 떨어지고, 산의 나무가 무성하게 길었으니, 즉 세월이 또한 이미 오래된 것이다. 무후가 <출사표(出師表)>를 올리고, 후주를 하직하여 위(魏)를 친 것은 지금까지도 오히려 들린다. 다만 왕가(王家)에 힘을 쏟아도, 하늘이 한(漢) 나라에게 복을 주지 않아 공을 이루고 돌아가서 다시 남양(南陽)에 누워 지낼 수가 없었다. 이것은 그 마음의 충직함이 사당의 모습과 더불어 다 함께 오래되었다.
* 제갈량(諸葛亮, 181년 ~ 234년) : 무후(武侯)는 제갈량(諸葛亮)의 시호(諡號). 삼국시대 촉(蜀) 나라의 재상으로, 자(字)는 공명(孔明). 형주의 남양 융중(隆中)에서 은거하고 있을 때 유비(劉備)의 삼고초려(三顧草廬)에 감동하여 종군하니, 그의 나이 27세였다. 뒤에 오나라와 연합해서 조조의 대군을 적벽에서 물리치고 유비로 하여금, 촉나라를 건국하게 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유비가 죽은 뒤 유비의 유촉(遺囑)을 받들어 후주(後主)인 유선(劉禪)을 보필하다가 위(魏) 나라의 사마의(司馬懿)와 오장원(五丈原)에서 대치하고 있던 중에 진중에서 병들어 죽으니, 그의 나이 54세였다. 뒤에 충무(忠武)의 시호가 내려졌다. 그의 <출사표(出師表)>는 신하로서 국가의 장래와 군주의 안일을 걱정하는 그의 충정이 잘 드러나 있어 지금까지 애송되고 있다.
* 杜甫(두보, 712~770) : 자는 자미(子美). 본관은 양양(襄陽, 현재 후베이 샹양)이며, 공현(巩縣, 현재 허난성 공의)에서 태어났다. 이백(李白 : 701~762)과 더불어 중국의 최고 시인으로 일컬어진다(중국문학). '두릉(杜陵)의 포의(布衣)' 또는 '소릉(少陵)의 야로(野老)'라고 자칭한 것은 장안(長安)의 남쪽 근교에 있는 두릉 땅에 두보의 선조가 살았기 때문이다. 만년에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의 관직을 지냈으므로 두공부(杜工部) 또는 두습유라고 불리기도 한다. 두보는 7세 때부터 시를 지었다는 조숙한 소년이었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낙양의 숙모 밑에서 자랐는데 그의 시에 대한 재능은 일찍이 낙양의 명사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과거에 급제를 하지 못하고 곤궁한 생활을 계속해야 했다. 두보의 눈은 차츰 사회의 모순으로 향하게 되었고, 그의 시는 사회의 불합리한 실정을 여실히 그려냈다. 두보는 "부잣집에서는 술과 고기냄새가 나지만, 길에는 얼어 죽은 해골이 뒹굴고 있다."라고 하며 빈부의 차가 너무나도 현격한 세상에 대해 분노를 토로했다. 계속되는 전란 속에서 관직 생활과 귀향의 길을 오가면서 병을 얻어, 겨우 연명하다가 고된 일생을 마쳤다. 1400여 수의 시가 <두공부집(杜工部)>에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