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八陣圖(팔진도) / 팔진도

금삿갓의 漢詩工夫(260108)

by 금삿갓

八陣圖(팔진도) / 팔진도

- 杜甫(두보)


功蓋三分國

공개삼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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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로는 삼분된 나라를 덮었고


名成八陣圖

명성팔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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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은 팔진도로 이루어졌네.


江流石不轉

강류석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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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은 흘러도 돌은 구르지 않아


遺恨失呑吳

유한실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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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나라 평정을 못한 한이 서려있다

八陣圖(팔진도)는 在蘷州魚腹平沙之上(재기주어복평사지상)하니 石疊列爲八行(석첩열위팔행)하여 天,地,風,雲,飛龍,翔鳥,虎翼,蛇蟠也(천지풍운비룡상조호익사반야)라.

팔진도(八陣圖)는 기주(夔州, 중경시 봉절현)의 어복현(魚腹縣) 평사(平沙)의 위에 있다. 돌을 첩첩으로 쌓아 나열하여 여덟 줄을 만들었으니, 천진(天陣), 지진(地陣), 풍진(風陣), 운진(雲陣), 비룡진(飛龍陣), 상조진(翔鳥陣), 호익진(虎翼陣), 사반진(蛇蟠陣)이다.

〇 言孔明輔蜀之功(언공명보촉지공)이 三國之臣(삼국지신)은 皆不能及也라(개불능급야). 孔明鞱略見於八陣圖矣故(공명도략견어팔진도의고)로 曰名成(왈명성)이라.

〇 제갈공명이 촉나라를 보좌한 공로는 삼국(三國: 위魏, 촉蜀, 오吳)의 신하가 제갈공명에게 모두 미칠 수 없었다는 말이다. 제갈공명의 도략(韜略)이 팔진도에 나타나 있기 때문에 이름을 이루었다(名成)고 한 것이다.

峽水漲時(협수창시)에 如十圍巨木(여십위거목)과 百尺枯槎縱橫隨流而下(백척고차종횡류이하)하여 及乎水落(급호수락)하여 萬物(만물)이 皆失其故而八陣圖宛然(개실기고이팔진도완연)하여 所壘之石(소루지석)이 不改其處(불개기처)하니 其神異如此(기신이여차)라.

협곡(삼협三峽)의 물이 불어났을 때는 열 아름의 큰 나무와 백자의 고목 등걸들이 종횡으로 물의 흐름을 따라서 내려가다가 물이 떨어지기에 미쳐서는 만물이 모두 그 옛 모습을 잃었어도 팔진도만은 완연하다. 쌓은 바의 돌이 그 장소를 바꾸지 아니하였으니, 그 신이(神異)함이 이와 같았다.

徐而庵曰先主若無伐吳之擧則漢事(서이암왈선주약무벌오지거즉한사)를 猶可爲(유가위)어늘 何至我鼎足之勢而與吳(하지아정족지세이여오)로 反結脣齒之邦(반결순치지방)하여 孔明(공명)이 鞠躬盡瘁(국궁진췌)하여 卒無成功(졸무성공)하니 此所以爲孔明之有限耳(차소이위공명지유한이)라.

서이암(徐而庵, 명말청초의 시인 徐增)이 말하기를, "선주(先主: 유비劉備)가 만약에 오나라를 치는 거사(擧事)가 없었다면, 한(漢: 촉한蜀漢) 나라의 일은 오히려 할 만도 했으니, 어찌하여 우리와 정족(鼎足, 삼발이)하는 형세에 이르렀는고? 그리하여 오나라와 더불어 도로 순치(脣齒)의 나라를 맺고, 제갈공명이 병이 나도록 몸을 바쳤으나 이룬 공이 없이 죽었으니, 이것이 제갈공명의 한(恨)이 있게 된 까닭이다."라고 했다.

* 杜甫(두보, 712~770) : 자는 자미(子美). 본관은 양양(襄陽, 현재 후베이 샹양)이며, 공현(巩縣, 현재 허난성 공의)에서 태어났다. 이백(李白 : 701~762)과 더불어 중국의 최고 시인으로 일컬어진다(중국문학). '두릉(杜陵)의 포의(布衣)' 또는 '소릉(少陵)의 야로(野老)'라고 자칭한 것은 장안(長安)의 남쪽 근교에 있는 두릉 땅에 두보의 선조가 살았기 때문이다. 만년에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의 관직을 지냈으므로 두공부(杜工部) 또는 두습유라고 불리기도 한다. 두보는 7세 때부터 시를 지었다는 조숙한 소년이었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낙양의 숙모 밑에서 자랐는데 그의 시에 대한 재능은 일찍이 낙양의 명사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과거에 급제를 하지 못하고 곤궁한 생활을 계속해야 했다. 두보의 눈은 차츰 사회의 모순으로 향하게 되었고, 그의 시는 사회의 불합리한 실정을 여실히 그려냈다. 두보는 "부잣집에서는 술과 고기냄새가 나지만, 길에는 얼어 죽은 해골이 뒹굴고 있다."고 하며 빈부의 차가 너무나도 현격한 세상에 대해 분노를 토로했다. 계속되는 전란 속에서 관직 생활과 귀향의 길을 오가면서 병을 얻어, 겨우 연명하다가 고된 일생을 마쳤다. 1400여 수의 시가 <두공부집(杜工部)>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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