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피레네의 슬픈 전설(7/15)

금삿갓의 산티아고 순례길-피레네는 안개와 비에 젖어

by 금삿갓

피레네 산맥의 이름은 그리스 신화에 기인한다. 피레네는 본래 나르본(Narbonne) 지방을 다스리던 베브릭스(Bebryx) 왕의 딸이었다. 헤라클레스가 게리오네우스(Geryoneus)의 황소를 얻으러 가는 중 나르본을 지나가게 되었다. 베브릭스 왕은 기꺼이 헤라클레스를 궁정으로 맞아들였다. 그리고 만찬을 베풀어 주었는데, 술에 잔뜩 취한 헤라클레스가 왕이 모르게 피레네와 눈과 배를 맞추게 된다. 말하자면 하룻밤 풋사랑인 원 나이트 스탠딩이다. 그는 힘 좋고 잘 생겨서 여복도 많나 보다. 가는 곳마다 여자들이 널였으니.

날이 밝자 헤라클레스가 떠나고 얼마 후 그녀는 뱀을 낳았고, 겁이난 그녀는 깊은 숲 속으로 달아났다가 산짐승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무사히 과업을 마치고 귀향하던 헤라클레스는 피레네의 슬픈 소식을 듣고 찢긴 그녀의 시신들을 모아 이 산에 잘 묻어주었다. 그리고 피레네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그곳을 그녀의 이름을 따라 피레네(Pyrenees) 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슬픈 전설이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데, 그래도 서리가 아닌 비가 오니 다행이다.

슬픈 전설의 영향인지 목적지에 도달하자면 아직 한참인데 짙은 안개가 앞을 가린다. 그러다가 있으라는 이슬비인지, 가시라는 가랑비인지도 모를 비가 촉촉하게 내리기 시작한다. 촉촉하게 옷깃을 적시는 것으로 봐서 보슬보슬하게 감싸 안아 주는 보슬비겠다. 피레네의 슬픈 하룻밤의 풋사랑과 비명의 죽음을 애도하듯 소리 없이 나를 적셔준다. 헤라클레스와 피레네의 슬픈 사랑의 눈물이 비가 되어 오늘 이곳을 지나가는 조선 과객의 옷깃을 적셔 준다니 기꺼이 받아 줄 수밖에 없다. 800Km는 조선의 거리 표기로 2천 리가 되는 긴 여정이다. 무사히 시작되고 무탈하게 끝날 수 있도록 피레네 여신의 가호를 기원해 본다. 잡신에게 기도한다고 기독교도나 가톨릭 신도가 들으면 엄청 화를 낼 일이지만 그냥 전설 따라 삼천리라고 생각하자.

길가의 말 목장에서는 말들이 도로로 넘어와서 어슬렁거리며 다니고, 아스팔트 도로에 소와 말들의 대변이 즐비하다. 한 눈 팔고 가다가 말똥이나 소똥 무더기에 빠질 수 있다. 여기 모든 사육 동물들 목에는 방울이 달려있어서 움직이면 청아한 소리가 고요한 피레네 산속을 울린다. 마치 죽은 피레네의 원망 섞인 한숨소리 마냥 그리 높지 않고 낮지만 멀리까지 들린다. 길잃은 동물들을 쉽게 찾자면 이런 방울이 요긴하리라. 한국의 워낭소리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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